이언 매커버Macabre Smoking

이노센트 - 10점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문학동네

 

<파리 리뷰> 인터뷰에서 ‘역사소설로의 새로운 출발’이라고 매큐언 자신이 언급한 작품이다. 작가가 단 한 줄로, 아주 명쾌하게 얘기한 『이노센트』는 이렇다.


저는 거대한 규모의 사건들이 개인의 삶에 반영되는 그런 상황에 항상 이끌려요.
(파리 리뷰,『작가란 무엇인가』211-212, 이언 매큐언)


냉전과 도청, 스파이 등의 거대한 규모의 사건이 사랑과 성장이라는 개인의 삶과 엮이는, 우스꽝스럽고 어이없는 동시에 슬프고 애틋한 이야기. 매큐언이 ‘항상 끌렸다는’ 주제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독자를 사로잡는다. 여기에는 이언 매커버Macabre라는 별명이 허명이 아니게 하는 ‘칼질’(또는 톱질)까지 등장하여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 역시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의학, 해부에 관해 연구나 조사를 했느냐는 질문에, ‘본 것을 기억하는 것보다는 상상한 것을 훨씬 더 정확하게 기록할 수’(같은 책 214) 있었다는 작가다운 대답. 이 대답에 상응하는 부분을 『이노센트』에서도 보았다면, 칼질을 끝내고 나서 레너드가 하는 생각이 그러하다.


그는 연장들을 바라보았다. 쓰지도 않은 도끼가 거기 있었다. 어째서 저런 게 필요할 거라 짐작했는지 떠올려보려 애썼다. 상상은 현실보다 더 잔혹했다. (318)


좋은 문장으로 쓰인 잔혹한 장면은 내 취향이 아니라고 할 수 없기에, 이렇게 ‘센’ 느낌으로도 충분히 좋았지만, 물론 매큐언 식 사랑의, 설레고 아련한 공기도 빠질 수 없다. 그녀에게 남길 작은 메모 하나를 완성하기란 자고로 이런 것.


예닐곱 장을 다시 썼는데도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달변이면서도 무심한 인상을 주고 싶었다. 그녀로 하여금 집 문 앞에 서서 끼적거린 쪽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게 중요했다. (…) 부담을 주기는 싫었지만, 진심으로 그녀에게 빠진 바보처럼 보이기는 더더욱 싫었다.
점심때쯤 되자 망친 쪽지들이 사방에 널려 있고 손에는 최종본이 들려 있었다. 우연히 근처에 오게 되어서 인사나 하려고 잠시 들렀습니다. 쪽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는 그만 실수로 봉해버렸다. 칼로 봉투를 뜯으면서, 방금 퇴근해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그녀라고 상상해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할 거라고 생각하며 편지를 펼쳐 두 번 읽었다. 완벽하다 싶었다. 다른 봉투를 찾아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90-91)


저런 짓을 안 해본 사람에게는 매큐언을 권하고 싶지 않다. 그냥 지나치기에 (내가 왜...?) 너무 아까우니까. ‘최종본’을 마침내 띄워 보내고 ‘연습본’ 여러 장을 며칠 동안 그녀 또는 그가 된 심정으로 펼쳐 읽어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읏-하고 말리라. 나처럼.


1990년 작품으로 『속죄』에 11년 앞서고 『첫사랑, 마지막 의식』이후 15년에 위치한다. 통렬하면서 애틋함까지 품은, 내가 아는 매큐언이 고스란하다. 작품 연보를 보니 여태 나는 중기 이후 작품들만 읽은 셈인데, 위로 거슬러 읽게 될 매큐언이 더 기대된다. 절판본이 많지만 『이노센트』가 번역출간된 것을 보면 초기작들도 다시 나오지 않을까. 나오기를 바란다. 『작가란 무엇인가』를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했던 문장을 여기 옮겨놓을 수 있어 또한 기쁘다.


그러나 1987년이 배경인 마지막 장에서 나이 든 주인공인 레너드가 그 도시를 다시 방문하기로 작정하였는데, 저도 그와 함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저는 레너드가 그의 애인과 함께 살던 아파트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 여인에 대한 사랑이 주는 터무니없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작가란 무엇인가』212, 이언 매큐언)




옥의 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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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다락방 2014/11/03 22:45 # 삭제 답글

    저 망설이는 쪽지 때문에 저도 이 책을 읽어야겠어요, 측근님.
  • 취한배 2014/11/04 00:31 #

    '망설이는 쪽지' 장면 좋지요? (아니면 찌질...한가요;?)
    이번 매큐언 좀 세요, 다락방 님. 음- 세서 저는 좋았어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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