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도서관 NoSmoking

밤의 도서관 - 10점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주헌 옮김/세종서적

 

『독서의 역사』(세종서적, 2000, 정명진 옮김)에서 처음 기쁘게 만났던 망구엘의 넓고 깊은 독서력을 또 다시 만난다. 『밤의 도서관』은 책과, 책들을 모아놓은 (공적이거나 사적인) 장소에 대한 얘기다.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참고로 가져오는 책들의 인용문과 저자 본인의 문장이 훌륭한 앙상블을 이루는 작품. 진정한 독서가의 글쓰기 면모란 이런 것인가, 하고 탄성을 내뱉으려니, 과연 글로 멋지게 정리까지 해주신다.


독서가의 힘은 정보를 수집해서 정리하고 목록화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눈으로 읽은 것을 해석하고 관련지어 생각해서 변형시키는 재능에 있다. (…) 각 종교의 진수를 담은 경전에서 확인되듯이, 지식은 텍스트나 정보의 축적에 있는 것도 아니고 경전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지식은 텍스트로부터 되살려내 다시 경험으로 승화시킨 경험, 요컨대 독자 자신이 속한 세계만이 아니라 바깥 세계까지 보여주는 언어에 있다. (101)


바로 저런 언어의 향연이 이 책이다. 도서관 얘기라면 으레 등장하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부터, 실제의 도서관들과 그 건축, 그리고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상상의 도서관과 본인의 서재까지 지칠 줄 모르는 책들과, 책들과, 책들의 만남. 그리고 기억과 망각의 하모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쩌면 자연스러운, 망각의 과정까지도 책에 대한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다는 식의 취지에서는 안도했고, 책들로부터의 자연스럽지 않은 '박탈'이라는 역사를 언급할 때는 함께 가슴 아팠다.


이디시어로 시를 쓴 라헬 코른은,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캐나다에서 조난된 기분으로’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녀는 폴란드 동(東)갈리치아의 고향에서 망명한 후 ‘모든 소지품을 가라앉는 배에 두고 떠나야 했던’ 사람의 기분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강요된 망각’에 저항했다. (…) 망명 생활을 하던 코른에게는 그렇게 머릿속에 담긴 텍스트만이 유일한 도서관이었다. (272)


코른처럼 망명 생활을 했던 슈테판 츠바이크를 떠올렸다.『어제의 세계』(지식공작소, 2001, 곽복록 옮김, 개정판2014)를 읽고 ‘참고할 책 한 권 없이 오로지 자신의 기억에서 건져 올린 기록들, 멋있고 대단한 자서전’이라는 감상문을 쓴 적이 있다. 내 보잘것없는 서재조차 완전히 떠나야 한다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기에 더욱 막막했던 기억.


한편, 콜롬비아의 산간벽지로 당나귀에 실어 책을 운반하는 이동도서관 얘기에서는 마음이 출렁거렸다. 실용서와 몇몇 문학작품들이 대여되었고 대부분 반납은 어김없이 지켜졌는데 단 하나의 예외, 반납되지 않아 결국은 선물로 증정했다는 에피소드. 그 책은 놀랍게도 에스파냐어 번역판『일리아드』였다. ‘호메로스의 이야기가 그들의 이야기와 딱 맞아 떨어’졌다며, ‘미친 신들이 인간의 운명을 제멋대로 결정해서, 인간이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도 모르고 언제 죽는지도 모른 채 싸우며 죽어가는, 전쟁으로 파괴된 나라에 대한 이야기’(239)라는 주민들의 설명에 가슴이 꿈틀-했다.


개인적으로 우리가 누구라는 의식에 공동체의 차원에서는 집단의 일원, 즉 시민이라는 의식이 더해질 때 우리 삶은 의미를 갖는다. 그 의미를 글로 표현한 것이 바로 도서관에 꽂힌 책들이다. (240)


망구엘이 구하는 것, ‘아마도 위안일 것이다’(337)라는 아름다운 마지막 문장처럼, 망구엘에게서 내가 얻는 또 하나의 위안은 천하의 독서가 망구엘도 잊는다는 사실.


그 구절을 절대 잊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책을 닫지만, 내가 젊고 더 똑똑했을 때, 예컨대 열두 살이나 열세 살쯤에 그 구절에 대해 표식해 두었던 흔적을 면지에서 발견한다. 레테 강이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다독거려주지는 않지만, 로저 애크로이드를 누가 살해했는지 몰랐고, 안나 카레니나의 운명에 눈물을 흘렸던 소년 시절로 되돌아가게는 해준다. (266-267)


로저 애크로이드를 누가 살해했는지 나는 안다. 블로그의 이 페이지를 넘어서지도 않는 위치에 애거사 크리스티 후기가 있는 지금은 그렇다는 얘기다. 또 몇 년 후에는 망구엘의 저 문장을 다시 보며 애크로이드가 누구지?라고 할지도 모른다. 슬프지 않다. 이 느낌은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여름언덕, 2008, 김병욱 옮김)에서도 받은 적 있다.


밑줄 친 문장도 많고 내용도 풍부해서 리뷰 올리기가 미안해지는 큰 책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불완전한 공간일 수밖에 없는 도서관처럼, 이 책에 대한 정리도 그렇다. 책들, 아니 이 『밤의 도서관』만 해도 나는 망구엘을 만났고 그가 언급하는 수많은 작가들과 독서가들을 만났으며, 리뷰들을 통해 이 책을 읽은 독자도 만났다. 별점과 밑줄이 겹치는 사람들을 더 유심히 보게 되고 그이의 서재에서 숱한 또 다른 책들까지로 만남은 연장된다. 책은 만남과 감동이다. 내 방 작은 서재는 내 자서전이고 내 생각의 지도다. 여기에는 당신도 있고 당신의 친구도, 조상도 있으며 그렇게 우리는 책을 읽는 동지가, 이웃이, 때로는 연인이 된다. 아름답고 넓고 깊은 『밤의 도서관』이다.


언젠가 세네카는 자신의 서가를 가리키며 “저 서가에 고귀한 유산을 물려받은 가문들이 있다. 당신이 속하고 싶은 가문을 마음대로 선택하라.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이름만이 아니라 재산까지 실제로 물려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재산을 인색하고 쩨쩨하게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과 나눠가질수록 그 재산은 더욱 불어난다…… 당신을 영원히 살아 있는 존재로 바꿔주지는 못하겠지만 당신의 죽음을 연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이다”라 말하고는(…) 따라서 그는 자아의 범위를 확대해 가족과 친구만이 아니라 적과 노예까지, 더 나아가서는 야만인과 외국인, 궁극적으로는 인류 전체를 포용했다. (327-328)








덧글

  • 포겟 2014/10/25 21:51 # 삭제 답글

    크윽 이 책 너무 좋죠? 전 망구엘을 진짜 좋아해요! 이 책은 비록 보다가 중간쯤에 덮고 다시 피지 못해서 아쉽지만..
    독서일기도 전 정말 좋았어요! ㅋㅋ 지금은 절판된 ㅜㅜ 근데 그것도 모르고 친구에게 선물했단! ㅋㅋ
    누가 애크로이드씨를 죽였더라? 훗 ㅋㅋ

    같은 책을 읽는 동지라는 건 정말 좋은 일이에요! 반갑기도 하고 묘종의 커넥티드랄까 ㅎㅎ
  • 취한배 2014/10/25 22:17 #

    이크, 깜짝... 이런 실시간적인 덧글!ㅋㅋ 지금 막 그라나다 사진 보고 왔는데욤, 축하해요. 어째 술장은 잘 보셨겠지요?
    네. 이 책 정말 좋았어요. 마음에 드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다 옮겨놓지 못할 정도로. 독서일기 친구에게 '너 혹시 별로면 그 책 돌려줄래?'라고 한번 해보시길.ㅎㅎ
    ㅋㅋㅋ애크로이드는 포겟 님 덕분에 영 안 잊을 것 같아요.
    그럼요, 그럼요. 그러니 '하수'라는 말 같은 거 하지 않긔- ㅎ 건배!!
  • 다락방 2014/10/28 12:17 # 삭제 답글

    저는 망구엘의 독서일기 읽다가 포기했다는 말을 쓰면서 일단 여기에 발을 담그고난 후,

    측근님, 저 부엉이 색칠한 건 알라딘에 올렸습니다.
    아직 다 칠하진 못했지만요.
    이거 알려드리러 왔어요.
  • 취한배 2014/10/28 12:30 #

    다락방 님이 포겟 님의 '독서일기 친구'는 아니시지요?
    아, 그렇군요. 알라딘 서재는 뜸하게 가서 다락방 님의 페이퍼들을 몰아서 보곤 한답니다. 알려주셔서 미안하고 고마워요. 놀러갈게요-
  • 다락방 2014/10/28 12:53 # 삭제

    네 포겟님의 독서일기 친구는 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누구인지는 알아요-속닥)
    포겟님과 저의 취향은 매우 많이 다릅니다. 사실 겹치는 게 거의 없다고 보면 맞지요.

    이렇게 두 줄 쓰고났더니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그냥 나갑니다 측근님. ㅠㅠ
  • 취한배 2014/10/29 17:30 #

    속닥ㅋㅋㅋ 어느 분이실지 절판본을 가지신 행운의 친구.
    포겟 님과 다락방 님 취향이 다름은 이미 파악했슴미담.ㅎㅎ
    이렇게 두 줄 쓰고 났더니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끝-
  • 다락방 2014/10/29 11:51 # 삭제 답글

    제가 오늘 선물용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를 구입했는데
    땡투를 측근님께 했음을 알려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
  • 취한배 2014/10/30 00:18 #

    와, 저- 아래로 밀려나 있을 페이퍼를 찾아가셔서 말이지요? <새벽 세 시> '전도사' 님으로부터의 오리지널 땡투라니 감개무량; 고맙습니다.ㅎㅎ
    저는요... (속닥) 지금 <루미시초>가 오고 있어요. (네, 엄마미소이용찬스를 1회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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