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주목 Smoking

장미와 주목 - 10점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포레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어느 누가 확정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까. 어느 한때, 누군가에게는 이런 사람이었다, 정도가 겨우 가능하지 않을까. 공시적으로는 상대에 따라, 통시적으로는 본인 자체가 변하는 게 사람이므로. 그런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인간적임’이 아마도 문학이, 특히 애거사 크리스티 같은 작가가 글감을 발견하고 독자는 감동과 공감을 얻는 원천일 터.


크리스티는 재미있고 놀랍다. 뜨개질을 하면서도 모든 상황을 혼자 다 파악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조용히 앉아 있는 미스 마플의 내공이 거저 온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 뜨개물을 한방에 쫙 풀어버리는 쾌감이 있다면 ‘본격소설’에는 한 올 한 올 짜나가는 직조 과정의 아름다움과 천재성이 존재한다. <장미와 주목>이 그랬다.


“그렇게 호전적이지는 않지만 직선적인 목표와 완전히 몰두하는 일면은 그래요. 이사벨라는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정말 어떻게 느끼는 걸까?’ 같은 자문은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죠.” 테리사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을 하죠.” (158)


어떤 상황이나 사람을 공시적으로, 또 통시적으로 보고자 하는, 그래서 마치 미스 마플 같은 답을 주는 이가 있다면 테리사이다. 어찌나 멋있는 사람인지 나는 이이의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한 사람이 어떻게 양면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이것저것 재지 않고 그냥 성큼 행동에 옮기는 이사벨라의 놀라운 단순성을 파악한 이도 그녀다.


사람은 여러 모습이라는 것, 사랑 또한 그렇다는 것, 세상은 생각보다도 훨씬 많은 오해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 같은 기회가 혹시 또 오더라도 똑같은 잘못을 반복할 수 있는 게 인간이라는 것, 어쩌면 그래서 장미의 시간과 주목의 시간이 같을 수 있다는 것. 작품의 제목이 빚지고 있는 T. S. 엘리엇의 시구는 이렇게 (역시 테리사에 의해!) 등장하는데-
 

“도련님은 시간을 가지고 판단하는군요. 하지만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 분이나 천 년이나 의미는 똑같아요.” 테리사가 나지막이 시구를 읊었다. “장미의 순간과 주목의 순간은 같다……” (316)




T. S. 엘리엇의 네 개의 사중주는 <Burnt Norton>, <East Coker>, <The Dry Salvages>, <Little Gidding>. 이 중 장미와 주목이 나오는 시는 <Little Gidding>이며 Little Gidding은 잉글랜드의 교구, 작은 마을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그냥 <리틀 기딩>으로 옮겨야 바르다. 아래 시를 보면 시작과 끝, 시간과 역사를 느끼는 ‘무거운 현기증’이라면 몰라도 ‘가벼운 현기증’의 분위기는 확실히 아닐 듯. 너무 ‘친절한’ 번역이 화근일는지.
 

What we call the beginning is often the end
And to make and end is to make a beginning.
The end is where we start from. And every phrase
And sentence that is right
(…)
Every phrase and every sentence is an end and a beginning,
Every poem an epitaph. And any action
Is a step to the block, to the fire, down the sea's throat
Or to an illegible stone: and that is where we start.
We die with the dying:
See, they depart, and we go with them.
We are born with the dead:
See, they return, and bring us with them.
The moment of the rose and the moment of the yew-tree
Are of equal duration.
A people without history
Is not redeemed from time, for history is a pattern
Of timeless moments. So, while the light fails
On a winter's afternoon, in a secluded chapel
History is now and England.

-T. S. Eliot's Little Gidding (V, 부분)



그리고 주목(朱木, Taxus cuspidata)은 이런 모습.

(출처: Alpsdake, Wikipedia)



멋지고 놀랍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과연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은 추리물과는 또 다른 크리스티의 면모를 보여주는 고맙고 소중한 시리즈.








덧글

  • 음주중인다락방 2014/10/09 00:13 # 삭제 답글

    으앗 벌써 읽으셨군요. 그리고 주목이 그 주목이 아니었네요.....
  • 취한배 2014/10/09 00:30 #

    注目...? 그죠, 읽기 전에는 알아채기 쉽지 않아요. ㅎ
    -음주중이부러운술떨어진배
  • 달을향한사다리 2014/10/16 18:21 # 답글

    음... 주목, 이라고 했을 때 전 묵주를 떠올렸어요. 묵주알처럼 진한 갈색의 나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파랗잖아요! 줄기라도 좀 진하던가...ㅋㅋㅋㅋ

    근데 이 책 엄청 끌리는데요^^
  • 취한배 2014/10/16 21:43 #

    묵주?!ㅋㅋㅋㅋ 주목의 다른 사진도 꽤 있더라고요. 저게 제일 멋져보여서 올린 거고요. 덜 파랗고 줄기 색깔이 더 진한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ㅋㅋㅋㅋ
    저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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