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쓰기, '너'를 읽기 Smoking

몬타우크 - 8점
막스 프리쉬 지음, 이정린 옮김/고려대학교출판부

 

몬타우크
라는 지명은 인디언식 명칭이다. 맨해튼에서 백십 마일 떨어진 롱아일랜드의 북쪽 끝을 일컫는다. 또 날짜를 지칭할 수도 있다.
1974년 5월 11일이라는. (12. 볼드체는 책에서 고딕체였음. 이하 발췌 동일)


 

롱아일랜드라는 이름을 나는 어찌나 좋아하는지, 칵테일 중 가장 좋아하는 술도 롱아일랜드아이스티!다(두 번째는 블랙러시안). 몬타우크가 저기 위치한 지명이어서 벼르고 별렀던 막스 프리쉬 영접이 훨씬 행복하고 수월했다.


수월했다고? 솔직히 조금 힘이 들었다. 현재 상황을 얘기하다가 불쑥불쑥 회상이 끼어들고 ‘나’라는 화자가 어느새 ‘그’로 변하기도 하며 ‘그녀’는 몇 십 년 전 다른 ‘그녀’이기도 하다가 심지어 ‘너’가 되기도 한다. 막스 프리쉬는 자신을 이야기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그리고 특별히 사랑을. 그 내용이 얼마나 사실적인지 뒷받침이라도 하려는 듯 날짜와 장소가 선명하게 언급되는 경우도 많다. 이 소설이 읽어내기가 어려운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한 사람은, 그 사람이 자신일지라도, 이토록 알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독자들이여, 이 책은 솔직한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이 말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이유는? (229)


말하고 또 말한다함은, 말하지 않고 또 말하지 않는다는 의미와도 닿는다. 말을 한다는 것은 말하여지지 않는 내용을 항상 배제하기에. 선택적으로 말하지 않으려면, 즉 위장하지 않으려면, 존재하기를 멈추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말이 본질 또는 존재와 자꾸만 어긋나는 면모, 고발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베케트에서만이 아닐 것이다.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모든 예술은, 진실에 가 닿고자 하는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실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비극인가, 아이러니인가, 또는 아무것도 아닌가.


작가는 책으로 써 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감정을 두려워한다. 그럴 때 작가는 자신의 아이러니를 기다린다. 자신의 모든 감각과 지각을 두고 과연 그것이 서술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문제 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어쩔 수 없이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런 직업병은 많은 작가들을 술꾼으로 만든다. (19)


베케트를 언급하고 말았는데, 세상에- 이 책에 그와의 만남 일화가 언급된다. 아주 짧게. 명성에 관한 상념에서. 또한 막스 프리쉬의 마지막 연인 린과의 소통언어가 프리쉬에게는 외국어인 영어였다는 점에 대한 사유 장면에서도, ‘다른 나라의 언어로 침묵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전전긍긍’했던 베케트를 또! 떠올렸다. 프리쉬의 문장이 이렇다.


그가 보통 때 같으면 얘기했을 것도 게을러서 말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린과의 사이에 영어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와 같이 있을 때는 만약 보통 때처럼 쉽게 말할 수 있을 때라면 전혀 떠오르지 않을 그런 것들이 자주 떠오르곤 한다. 우리가 외국어로 침묵하느냐 아니면 모국어로 침묵하느냐 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외국어로 침묵하면서 나의 압박감은 덜어지고, 기억은 더 투명해진다… (126)


무슨 말인지 너무 잘 알겠다. 지구상 많은 언어들 중에 오직 프랑스어로만! 얘기할 수 있거나 침묵할 수 있는 말이 있는 것이다. 한창 파리가 그리웠을 때, 나는 어쩌면 오직 프랑스어로만 얘기될 수 있는 그런 말들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머리의 상념들을 프랑스어로 옮겨볼 때 그 생각이 훨씬 단순하고 명료해지던 기억도 난다. 혹시 그게 더 진실에 가까웠다면... 그런 아이러니도 없을 것이다.

함축적인 짧은 문장과 공백에 알 수 없는 아우라가 존재한다. 많은 경우 무심한 문장으로 여기며 지나치다가 가끔씩 예상치 못한 덜컥- 고통과 슬픔이 행간에 가득 차기도 한다. 예컨대, 이런 것.


1972년에 난 린을 알지 못했다. (66)


이 문장은 ‘1974년에 린을 알게 됐다.’하고는 다르다. 하루하루가 차곡차곡 쌓여 먼 훗날 뒤돌아보며 중요한 사건을, 사람을 개인사에서 소중하게 위치시킬 수 있는, 당시에는 겪지 않았고 알지도 못했던, 오지 않은 상실감과 그리움의 문장. 또 이런 것도 있다.
 

몇 살까지 살고 싶으세요?
누군가를 사랑하나요?
그런데 무슨 근거로 그런 결론을 내린 거죠? (213-214)


앞 뒤 문장과 크게 연관이 없이, 덩그러니 놓인 이런 문장들이 참 좋았다. 아래 발췌문에서 보듯, 구구절절 설명이 없는데도, 아니 없으므로, 언급되지 않은 최악의 비극을 상상하게 하고 같이 아파하게도 한다.


그때 그녀는 날 알아보지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난 그녀를 따라잡는다. 나는 그녀의 둥근 머리를 뒤에서 본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그녀는 분명 내 차의 경적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다. 경찰이 차를 정지시키기 위해 차 앞을 가로막는 것처럼 그녀의 차를 앞서기까지는 한참이 소요된다. 또 그 때문에 그녀는 깜짝 놀란다. 난 광대다. 난 그걸 안다. 그녀의 자유는 그녀가 가진 눈부신 면의 일부다. 질투는 내 쪽에서 치러야 할 비용이다. 그리고 난 그 비용을 철저히 지불한다. 로마가 내려다보이는 여름밤의 테라스에서 나는 내가 토한 것에 얼굴을 처박고 잠이 든다. (173-174)


저 ‘그녀’가 잉게보르크 바흐만(<삼십 세>의 저자, 맞다)이라면?
말년에야 알게 되어 지금은 고인이 되어버린 라이히 라니츠키의 평론 중에 이 책에 실린 문장은 이렇다.


“이것은 그의 가장 내밀하고 다감한 책, 그의 가장 겸손하고 어쩌면 가장 대담한 책, 그의 가장 소박하고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가장 독창적인 책이다.” (262, 해설 중)


라이히 라니츠키의 저작 <작가의 얼굴>에서 <몬타우크>에 관한 언급 중 내가 뽑아놓은 문장은 이것이다.


그러니 이는 고통의 이야기들이다. 물론 당연히 프리슈(프리쉬)가 말하지 않은 많은 것들이 있다. 많은 것을 감추려 했고, 그래야만 했다. 그는 암시와 생략의 대가다. 휴지(休止)는 그의 최고의 표현수단에 든다. 그는 자기 스스로에 대해 절제하는 미덕을 지킬 줄 알았다. 그런 식의 자기 폭로는 과시욕과 무관하며, 프리슈의 고별사는 감상에 빠지지도, 엄살을 부리지도 않는다. 『몬타우크』는 불안의 작가가 쓴 사랑의 책, 하나의 시적 결산이다. (『작가의 얼굴』279쪽)


이 책이 프리쉬의 ‘시적 결산’이라면, 독자로서 이런 호강도 없다. 연휴 동안 막스 프리쉬를 읽었고, 나는 아직 그를 알지 못한다. 말하기를 멈춘 그는 영원에 들어갔기에, 나는 그를 영원히 알지 못하게 되었다. ‘나’를 쓰기와 ‘너’를 읽기의 한계다. 문학의 한계이자 매력. 쓰거나 읽거나하는 존재들의 아우성과 아름다움이다.




P.S.
그 이후 미국 출신의 젊은 여성 앨리스 록-커레이가 프리쉬의 여생의 반려자가 된다. 그녀와의 만남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녀와 함께 5월 11일과 12일 롱아일랜드 북단의 조그만 해변 몬타우크에서 보냈던 주말의 추억이 1975년 발표된 소설『몬타우크』의 내용이다. (『호모 파버』387-388, ‘막스 프리쉬의 생애와 작품 세계,’ 봉원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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