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농담 Smoking

무의미의 축제 - 10점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민음사

 

큰 이름, 쿤데라 앞에서 심각해질 필요 없다. 늘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이었으니, 이름 뒤에서, 라고 해야 할까. 가벼움을 지향하는 사람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것도 결례이리라. “심각한 말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한 사람이다. 길이도 가뿐한 최신작이다. 아니나 다를까 민음사 쿤데라 전집이 나왔을 때 염려했던 점이었다. ‘닫힌 작가’로 분류해서는 안 될 텐데, 했던 혼잣말. 통쾌하게, 경제적으로, 가장 ‘쿤데라스럽게’ <무의미의 축제>가 왔다.


이런 말이 가능할까, ‘경제적인 소설.’ 장편만큼의 입체감과 부피를 가지지 않는 인물들이지만 최소한의 문장으로 각 인물들의 ‘찌질함’이 극명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냉소다. 어떤 밑줄도 그가 바라는 바는 아닐 것이다(그가 바라는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손을 떠난 이상 작품은 그의 것이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우리 것, 내 것이다). 쿤데라가 가장 잘하는, 쿤데라 만이 할 수 있는 농담, 가벼움.


그러면 나의 웃음을 얘기해야겠다. 1번. ‘주인’의 존재다. 아주 가끔 출현하는 ‘나’라는 목소리. 작가다. ‘인형극’의 연출자, 쿤데라 또는 쿤데라가 만든 다른 창조주.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툭 불거져 나오는,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나’라는 존재의 유세. ‘심각해지지 마세요’라고 일깨워주는 것 같다. 브레히트의 소격효과처럼. 이 모든 건 내 ‘인형’들이 벌이는 소극이니 심하게 감정이입하면 안 됩니다, 가 행간에 읽힌다.


2번. 지질한 속마음과 위선, 순진함과 이기심들. 관심을 끌고 싶고 멋진 인상을 심어주고 싶어서 암환자 행세를 하며 다른 사람 눈에서 오직 자신만 보는(자신만 사랑하는) 다르델로, 또 관심을 받고자하여 없는 언어를 창조해 사용!하나 아무도 이해 못함으로 인해 관심 끌기에 실패한 배우 칼리방, ‘주인’이 밑줄 문장으로 임무를 주어 우스꽝스러운 스탈린을 연기하고자하는 샤를, 좋은 기분을 찾는 라몽,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결국은 승자(여자를 얻는?)인 카클리크, 너무 ‘어려’ 스탈린을 모르는 마들렌, 남편의 죽음을 지극한 행복으로 ‘승화’시키는 프랑크 부인, 어릴 때 떠난 어머니와 상상 속에서 대화하는, 시인이 되기를 포기한 알랭 등.


숱한 농담과 가벼움에 잘못된 밑줄을 긋지 않기 위해(제대로 웃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한다. 내가 원하는 쿤데라의 진심은 알랭이 상상한 어머니의 일화와 칼리방과 샤를이 만나는 마리아나, 그리고 악독한 스탈린의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오줌꾼 칼리닌에 대한 연민에 숨겨 놓았다고 믿고 싶다. 나는 이렇게 읽었다. 이 작품에 긋는 밑줄이야말로 자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지점일 것이다. 내 발췌문장을 숨긴 이유다. 다른 독자들의 쿤데라가 궁금한, 읽기, 읽어 소화하기의 말 그대로 자유와 가능성을 이토록 넓게 펼쳐주는 85세의 쿤데라다. 아직도 자신의 신념을 정답 하나로 주지 않고 독자 제각각의 마음에, 속마음을 들켜 스스로 찔리든, 다른 사람의 빤히 보이는 위선과 바보스러움에 웃든, 자유를 주는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번역을 짚지 않을 수 없는데, 냉소의 대가에 어울리지 않는 우리말 문장이 몹시 아쉽다. 대화에 ‘~다’라는 어말어미가 심하게 어색하다. 등장인물들의 나이가 알게 모르게 많이 드러나 있는 편인데, 대략 20살 연상의 라몽을 샤를과 알랭이 ‘너’라고 부르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도 ‘가장 정확한 번역’ 논쟁이 일었으면 싶은 은밀한 욕망이 일 정도로.


필요한 것만 있다. 짧다. 노련하다. 당신과 내 모습을 보았다 싶은데 그 인형들을 조종하는 ‘주인’이 있다. 소설인 것이다. 웃어야 한다. 웃지 않으면 저 위선들이 내 것이 된다. 눈물은 남 몰래. 밑줄도 혼자만 간직하길. 당신의 밑천을 드러내지 않으려면. 이 노련한 ‘경제성’이 육체적 쇠잔함의 결과일까 조금 슬프다는 말은 ‘사과쟁이’ 독자로서 덧붙이는 사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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