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같은 독서+ NoSmoking

그들 각자의 낙원 - 8점
마이클 커닝햄 지음, 조동섭 옮김/마음산책



 

땅의 끝Land's End

프로빈스타운

영점(零點) 지대. 무덤과 중력이 음모를 꾸미는
변덕스러운 모래톱.

호박색 맥주병과 녹색 리큐어 병은
그 치명적인 사금파리를 포기한다.

먼지도, 유리도, 애초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재처럼.

해골 같은 부목과 해초 머리카락은
육신을 애걸한다. 아무 육신이라도.

그렇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파도뿐.
그저 계속되고 계속되는 무(無)뿐.

지금이든 나중이든, 그대가 우리를 떠나야 한다면,
바다가 그대를 다시 데려오리라.

(-멜빈 딕슨, 159)



<세월>의 마이클 커닝햄이다. 케이프코드 만 저 끄트머리 육지 프로빈스타운에 대한 애정을 담은 책. 구판인 <아웃사이더 예찬>으로 읽었다. 휴가 가자고 보채는 사람이 없어진 이래로 내 휴가는 책이다. 여행책이거나 책여행이거나. 고맙게도 커닝햄은 마침맞은 응답을 해주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해변이 있는 마을을 읽음은, 그 마을 안에 있는 것만큼이나 행복하다, 고 말하면 좀 과장일까. 그렇지만 이런 문장을 만났을 때는 과장 좀 하지 뭐, 하게 된다.


프로빈스타운에서는 밤 동안 집에 있는 것이 좋다. 여름에도 밤 기온이 따뜻한 날은 드물고, 여름이 아닌 나머지 계절에는 쌀쌀한 정도부터 생명을 위협하는 정도까지 오간다. 침대와 책이 프로빈스타운에서 특히 지켜야 할 계명이다. (137)


커닝햄이 전해주는 프로빈스타운은 보통 사회에서 요구되는 ‘정식’ 또는 ‘정상’, ‘평균’이 아닌 것에 매우 열려 있다. 규정된 틀과 인습을 고집하지 않는 분위기와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태도 등이 아주 멋진 동네다. ‘두 남자가 손을 잡고 입양한 페루 출신 아기를 데리고 다녀도 유별난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있’는(75) 곳. 그렇다고 사람들이 모두 지극히 개인주의적이어서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느냐하면 그건 아니다. 작은 마을의 자연스러운 친분과 친근함, 속속들이 알고 있음은 이 마을에서도 유효하다. 몇 년 만에 다시 가도 길에서 지인을 만나 어제 헤어진 것처럼 대화를 곧장 이어갈 수 있는 편안한 장소. 바뀐 제목에 ‘낙원’이 들어간 게 잘 이해된다. 김연수 작가가 추천사에서 언급한 적 있는 크리스 할머니 일화.


프로빈스타운이 그 가장 좋은 모습을 보일 때면, 더 개선된 세상, 섹슈얼리티가 당연히 늘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리 결정적인 요소는 아닌 세상에 있는 느낌이다. 오래전에 나는 여러 해 동안 수요일 밤마다 크리스 할머니 집에서 포커를 했다. 크리스 할머니는 70대 노인으로, 페이즐리 숄과 술 달린 베개, 낡은 동물 박제들로 둘러싸인 방에서 살았다. 그때 나는 스스로 게이임을 깨닫고 있는 중이었지만 가족에게는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크리스 할머니에게 내가 게이인 것 같다고 말하자, 할머니의 흐릿한 파란 눈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글쎄, 얘야, 내가 네 나이였으면 나도 한번 그래 보고 싶구나.” (86)


((술이 깰 때까지 자고 일어나 이어 (다시) 씀))

‘크리스 할머니는 나를 껴안거나 위로하지 않았다.’로 이어진다. 소위 ‘커밍아웃’한 이들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태도에서 늘 어이없는 게, 성적지향에 대해 왜 위로해야 할 문제라고 여기는지 하는 점이다. 성별이나 성적 취향, 지향은 내가 회를 안 먹는 것과 같은 수준의 사소한 어떤 것일 뿐이다. 인습과 권력이 늘 ‘정상’과 ‘평균’을 정해주는 세상과 대비되어, 그런 편견에서 자유로운 프로빈스타운은 커닝햄에게 마치 크리스 할머니 같았을 것이다. 편하고, 솔직해질 수 있고, 제대로 숨 쉴 수 있는 공간.


프로빈스타운에서 살며 작업했던 예술가들 얘기도 조금씩 소개된다. 8년 간 많은 작품을 완성한 유진 오닐, 이스트엔드에 있는 커다란 벽돌 요새에서 1년 내내 살았다는 노먼 메일러(2007년 작고), 바로 아랫동네인 트루로에서 작업한 에드워드 호퍼, 우리에겐 작년에 나온 <완벽한 날들>의 메리 올리버 등. 특히 커닝햄의 화가 친구 존 다우드의 집이 한 꼭지로 소개되는데 읽을 때는 몰랐다가 웹서핑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친 그 집은 정말 멋있었다. 커머셜스트리트112번지 

프로빈스타운에 직접 가 볼 일은, 글쎄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있으리라 생각하기 힘들지만, 커닝햄이 잔잔하게 소개하는 자신의 ‘낙원’에 함께 푹 담겼다 나온 내 휴가가 나쁘지 않았다. 고마워요, 마이클.

 

만약 내가 내일 죽는다면 내 재를 뿌려주기 바라는 곳도 프로빈스타운이다. 대체 누가 사람이 어떤 장소나 사람, 사상이나 물건과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알고 있을까? 30세기에 이르는 문학의 역사도 그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실마리를 잡지 못했으며, 그 미스터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했다. (38-39)



Sea-






핑백

  • 술집에서 문득 본 진실 : 책 나눔 합니다. 2016-11-03 12:21:01 #

    ... 최상.11. 아웃 1/2 : 1권은 중 상태인데, 결과적으로 새 책보다 더 비싸게 사게 된 사연이 있는, ‘슬픈 중고책’입니다. 2권은 깨끗해요.12. (얇)아웃사이더 예찬 : &lt;그들 각자의 낙원&gt;으로 재단장하고 나온 마이클 커닝햄의 여행기입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변주 &lt;세월&gt;이 무척 멋있었던 작가죠. ... more

  • 술집에서 문득 본 진실 : 빛 혹은 그림자 2017-09-12 13:57:32 #

    ... 점과 소설 17편이 실렸다. 소설과 짝을 짓지 못한 그림은 표지에 실린 &lt;케이프코드의 아침&gt;(1950)이다. 케이프코드라니, 마이클 커닝햄이 &lt;그들 각자의 낙원&gt;에서 ‘만약 내가 내일 죽는다면 내 재를 뿌려주기 바라는 곳’이라던 프로빈스타운이 위치한 곳 아닌가. 물론 가까운 동네 트루로에 호퍼의 작업실도 ... more

덧글

댓글 입력 영역


moon

CURRENT MOON

뉴스타파

알라딘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