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언어 NoSmoking

피아노 레슨 - 10점
애나 골드워디 지음, 노혜숙 옮김/아니마

 

“오늘은 손가락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 “이 집게손가락은 모범생이야. 이 셋째 손가락은, 뭐라더라…… 그래, 아주 믿음직스럽지. 하지만 이 손가락은…… 아이고.” (…) “이 넷째 손가락은 지독한 게으름뱅이란다!” (…) “피아니스트를 만드는 것인 이 엄지손가락이야.” (…) “예술가를 만드는 것은 이 새끼손가락이야.” (…) “친구에게 인사하는 것처럼, 이렇게 바이바이.” (26)


애나 골즈워디가 시반 선생님과 함께한 피아노 레슨의 추억이다. 시반 선생님이 얼마나 멋진 예술가이자 스승인지가 골즈워디의 재치 있는 글발로 소개되는 아름다운 책. 한 분야에 전문적이 되면 꼭 거기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생 전반의 어떤 일반적인 진실이나 교훈에 가닿게 되곤 한다. 이 책이 그러하다. 피아노 연주와 작곡가, 음악을 얘기하고 있음에도 우리 삶의 자세를 생각해보게 한다.


“(…) 예술을 스포츠로 만드는 것은 큰 실수를 하는 거야. 그러면 안 되지. 물론 여론은 존중해야 해. 안 그러면 냉소적이 되고, 자동적으로 소리를 잃어버리니까. 하지만 여론에 의존해서는 절대 안 된다. 만일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어느새 로봇이 되거나 정글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되는 거야.” (56)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연주자이거나 아니거나. 정글에서 길을 잃게 된다는 것은 자기를 잃는다는 얘기일 것이다. 자기가 가치를 두고 있지 않은 사람의 평가까지 신경 쓰는 건 얼마나한 에너지 소모이며 자기파괴행위인가 말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자존감과 취향, 개성, 즉 자기가 추구하는 모습의 자신을 믿어야 할 것이다. 거기에 팁 하나를 더 보태자면,
 

“내가 비밀을 하나 말해 줄게. 콘서트에서 연주를 할 때는 한 사람의 관객을 정해서 그 사람을 위해 연주를 하는 거야.” 그녀가 싱긋 웃었다. “그러면 모든 관객이 자기를 위해 네가 연주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거야.” (87)


독후감이나 글을 쓸 때도 유용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저 한 사람의 관객이란 내게는 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존재를 소위 뮤즈라 부르기도 할 것이다. 어찌 보면 모든 음악이나 글, 예술은 넓은 의미에서 누군가를 향한 연서일지도 모른다. 상대는 바뀌어도 연서는 계속되는데, 그건 내 음악이나 글을 듣고 읽는 사람에 대한 사랑보다 내가 생산하는 음악이나 글을 더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솔직해지자.


시반 선생님의 훌륭함, 골즈워디의 성실함과 영리함 외에도 짚고 싶은 것은 골즈워디의 아버지다. 의사이자 작가로서 딸의 레슨에 꾸준히 함께 하며 (딸의 수업시간이, 자기가 쓰는 소설의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한 자료 수집처) 좋은 후원자의 역할을 하는데, 풋- 웃음이 나게 하는 귀여운 젊은 아빠의 모습이 몹시 사랑스러웠다.


“아니! 너는 설명을 하고 있어. 네가 얼마나 똑똑한 아이인지 보여 주려고 하는구나. 너는…… 뭐라더라?” 그녀(시반 선생님)는 마술 모자에서 또 다른 표현을 꺼냈다. “그래. 너는 아는 체를 하고 있어!”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에 적었다. ‘아는 체하지 마라.’

“주관은 객관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녀가 계속해서 말했다. “위대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위대한 과학자가 되어야 해.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하니까. 정돈이 안 되면 혼란하고 무질서해지지. 하지만 자유가 없다면 연주가 어떻게 될까? 연주가 사체 부검을 하는 것처럼 되는 거야.”

뒤에서 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63)


아버지가 딸의 수업에서 부지런히 메모를 해서 (물론 많은 변모와 각색을 거쳐) 완성하게 되는 책 <마에스트로>를 손보고 다듬는 일을 바로 골즈워디가 한다. 이 책만 읽어봐도 알게 되듯 무슨 음악가가 이렇게 글을 잘 다루나 싶은데, 골즈워디가 순전히 콘서트 연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음악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데서, 말과 글에 대한 감각의 재능, 필요성, 쓰임새 같은 것을 보게 된다.


골즈워디는 어릴 때부터 원체 똑똑해서 피아노 뿐 아니라 언어와 수학에 뛰어난 사람이다. 본인도 얘기하듯 연주‘만’ 하는 게 훨씬 더 쉬우리라는 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게, 자기 몸이 무의식적으로 연주하는 것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말로 설명하여 전수할 것인가 하는 것. 영화 <콘택트>에서 조디 포스터(내가 좋아하는 현존배우인데, 나와 생일이 같아서만은 아니다)가 우주 공간에서 은하를 보는 순간, 너무 아름다워 말문이 막히며 하는 말, “시인이 왔어야 했어.”의 장면을 떠올려 보면 상상이 가지 않는가. ‘뭐라더라’로 짐작할 수 있듯 러시아인으로서 서툰 영어에도 불구하고! 시반 선생님도 골즈워디도 다른 무엇보다 언어에 대한 감각이 그들을 훌륭한 선생으로, 예술의 전수자로 만들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피아노를 배운다고 누구나 전문적인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해. 어떤 면에서 교사는 가장 어려운 직업이지. 가르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는 것을 말로 옮길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설명해야하는 것들은 아주-뭐라더라?-미묘한 거야. 잡으려고 하면 미꾸라지처럼 손에서 빠져나가거든!” (229)


피아노에 관련된 책으로 또 굉장히 아름다운 에세이, 사드 카하트의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이 떠오른다. 책장에 그것과 나란히 꽂으면 될 작가, 음악가, 예술가 골즈워디의 <피아노 레슨>. 검색하다 알게 되었는데 이 책이 공연으로도 오른 적이 있는 모양이다. 작가 자신이 본인의 역할과 연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글에서 만난 그녀와 ‘세라핌 트리오’ 연주회의 조금은 낯가리는 듯한 모습이 둘 다 무척 좋았다. 그녀가 올린 동영상 중에 베토벤 연주는 없어서 다니엘 바렌보임의 공연을 첨부한다.
 

<발트슈타인 소나타>는 시반 선생님이 ‘폭풍우가 지나간 후 동이 트는 새벽하늘과 같다.’고 말한 곡이다. 쇼팽처럼 기교가 화려하고 서정적이면서도 쇼팽과는 다른 웅장한 느낌을 살려야 한다. 베토벤은 이 음악을 작곡할 당시에 청력이 점점 악화되고 있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다시 삶의 의욕을 되찾고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첫 C단조 에피소드가 세상을 흔들며 나의 위선과 가식을 털어 냈고 테마가 시작되자 대회장은 C장조의 밝은 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특히 3악장의 도입부는 행복감에 넘치는 밝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어 여러 가지의 감정이 나타난다. 불안한 정서가 엿보이나 힘차고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희망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진실을 말하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 눈부신 빛을 받으며 싸구려 기교를 부릴 수는 없었다.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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