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욕망-보여주고 싶은 욕망 Smoking

상자인간 - 8점
아베 고보 지음, 송인선 옮김/문예출판사


 

시선의 권력, 이라고 말을 시작해놓고 보니 그 권력의 이동이 쉼표 사이에 있지 않았나 싶다. 보는 자리에서 보이는 자리로. 카메라를 든 자리와 포즈를 취하는 입장 사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해 봐요.”였던 것이 “이렇게 찍어요.”로 바뀐 것 같은 느낌. 대통령부터 유명인까지, ‘패션외교,’ ‘이미지정치’ 등 그들은 보는 입장이기보다 보이는 자리에 있다. 심지어 보이지 않아야할 국정원도 요즘은 ‘홍보’나 변명을 하는 마당이니 과연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 시선의 권력 이동이라는 학설, 아직 어디서 읽어보진 못했지만 나 혼자 하는 생각이다.


40년 전이라면 더군다나 상상하기 힘들었을 얘기. 순전히 보려고만 하는 사람의 몰락이다. 카메라맨이라는 직업에 맞춤하여 자신은 보이지 않으면서 오로지 보는 ‘구멍’만 가진 존재. 익명을 지향하는 ‘상자.’ 투명인간이고자 하면서 보고 쓰려는 자. 피부처럼 눌어붙은 상자는 어쩔 수 없이 또 하나의 자기 정체성이 되어버리리란 사실. 궁지에 몰린 쥐가 자기 몸 안으로 숨으려 하는 끔찍한 상황처럼 돌파구는 죽음밖에 없지 않나. 상자라는 예스러운 장치로 이토록 ‘투명’해진 세상을, 거기로부터 익명으로 존재하고 싶은 심정을 1970년대에 고발한 작가가 새삼 놀랍다.
 

인터넷의 수많은 정보들, SNS의 홍수, 감정의 과잉들, 때로는 ‘관심 없거든요’라고 얘기하고 싶은 사생활들, 내가 뭘 했는지, 뭘 먹었는지,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슬픈지, 얼마나 외로운지, 내가 얼마나, 뭘... 을 보여주려는 거의 노출증에 가까운 욕망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넘침들이 유의미할 수 있는 빌미는 관계, 혼자 아님, 나아가 사랑일 수도 있다는 걸 안다. 2.5미터 반경 안, 상자가 필요 없는 지점처럼. 이 블로그도 다르지 않다.


엿보기라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애정 고백이, 그렇게 비난 받아야 할 일이라고는 아무래도 생각되지 않았다. (204)


엿보기와 보여주기, (이상성욕의 의미를 뺀) 적당한 관음증과 노출증, 우리는 그렇게 존재한다. 보고자 하는 욕망과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에 비해 심하게 클 때 폭력적이거나 병적인 상황이 빚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peep-peepshow-Saturday Night 연상 작용으로 듣고 싶어진 노래. Suede다. 아베 고보(코보)와 멀어졌는지 가까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베 고보를 구실로 나는 또 나를 노출하고 말았다. 존재하려고 버둥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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