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하고 아름다운 것들 NoSmoking

세상의 모든 우아함에 대하여 - 8점
제시카 커윈 젱킨스 지음, 임경아 옮김/루비박스

 

내가 쓴 백과사전도 선배님들의 백과사전과 마찬가지로 중구난방 엉뚱하고 약간 기이할지도 모르겠다. 아울러 그 백과사전들처럼 지극히 개인적이다. (…) 나에게 ‘강렬한 즐거움’의 불씨를 불러일으켜주고, 또 키워주는 이 수집품들을 나는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라고 부른다. ‘이곳’은 바로 지구라는 별이다. 기분이 별로일 때 나는 파일을 뒤적이며 꿈같은 쾌락의 세계로 빠져든다. 모든 일이 그렇게 나쁘게만 보이지는 않는 그곳으로. (7-8)


제시카 커윈 젱킨스가 쓴 우아함의 백과사전이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 ‘지극히 개인적’인 목록 백 가지. 알파벳순으로 진행되며 ‘목차’와 ‘찾아보기’가 없다. 다시 말해, 읽으면서 표시해두지 않으면 낭패, 또는 내가 좋아하는 항목 먼저 찾아보기도 조금 힘들다는 얘기.


패션지 에디터인만큼 주로 의상이나 장식품 소품 예술품 위주이기는 하지만 기적이나 게으름, 생의 힘이라는 ‘비리디타스,’ 서양의 암기법, 고요, 동의를 표현하는 ‘예스’ 등의 추상적인 것도 포함되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예스yes가 마지막 항목인데, 이것을 우아한 것으로 보는 저자가 멋지다. 오노 요코와 존 레논의 그 유명한 연애질을 소재로 엮었다.


<오노 요코, Ceiling Painting>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돋보기로 보게 되는 깨알 같은 YES. ‘읽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좋게 해’주는 단어. 오노 요코와 존 레논을 묶어 준 낙관주의.


달리아와 글라디올러스 편에는 시싱허스트 정원이 소개된다. 버지니아 울프가 사랑한 사람이자 <올랜도>의 모델인 비타 색빌웨스트가 꾸민 정원. 그들의 사랑은 나이젤 니콜슨의 <어느 결혼의 초상>에서 읽을 수 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초판본(1993, 움직이는책) 이후 다시 나오지 않은 모양이다. 나이젤 니콜슨은 색빌웨스트의 아들로서 버지니아 울프의 평전도 쓴 사람인데, 그의 <버지니아 울프> 또한 절판 상태임을 확인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색빌웨스트는 폐허가 된 튜더 성을 벙커로 바꾼 뒤, 흰색 목련과 흰 튤립, 흰 장미, 흰 백합들이 만개한 온통 흰색의 정원을 꿈꾸었다. 그처럼 멋진 정원이 어디 있을까? “심고 기쁨을 누려봅시다. 우리가 모두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내년 가을을 위해.” (58)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정원 중 하나인 시싱허스트의 흰 정원은 현재 일반 대중에게 개방되어 있고, 개화는 6월에 절정에 이른다.’고 한다. 지금쯤이면 절정은 지났겠다. 각종 색깔이 아우성치는 정원과는 달리 어떤 차분한 아름다움이 상상된다. 아무튼 참 멋진 색빌웨스트, 여기서 다시 만나 반가웠다.


저자는 혹시 흰색을 좋아하는 걸까. 흰색 정원 뿐 아니라 '흰색 페인트'도 우아함의 항목으로 떡하니 자리한다. 주택 내부 벽에 사용되는 흰 안료. (사실은 내 취향과 맞다. 주택의 새하얀 내부를 좋아한다.) 그리고 구름!이 있다. 적란운cumulonimbus라는 어려운 단어인데, 검색을 통해서 ‘쌘비구름’이나 ‘소나기구름’이라고도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CUMULONIMBUS 적란운 : 대개 심한 폭풍우를 동반하는 엄청나게 크고 치밀한 구름

아마추어 영국 기상학자 루크 하워드(1772-1864)는 하늘을 보는 방식을 바꾸어놓은 인물이다. 당시에는 아무도 그가 어떤 영향을 끼칠지 예측하지 못했다. cumulus(적운), stratus(층운), cirrus(권운), nimbus(비구름) 같은 오늘날 알려진 라틴어 구름 명칭들은 1802년 그가 만든 구름 분류 체계에서 나온 것이다. 19세기 말, 국제구름회의에서 나온 그 유명한 최초의 국제구름도감에서는 열 가지 구름 종류로 체계를 확장시켰다. (53)



 

‘국제구름회의’라니, 국제회의 중 이렇게 아름답고 귀여운 이름이 있을 수가. ‘국제구름도감’도 마찬가지. 질 좋은 사진의 <구름도감> 하나쯤 갖고 싶다. 어쩌면 폭풍우나 소나기를 기대하게 되는 현상이라 설레고 좋은 걸까. ‘비’ 항목이 없어 나로서는 섭섭할 수도 있었는데 저자는 대신 ‘낭만적인 가슴’들, 바이런 경과 퍼시 셸리의 일화를 소개하는 대목으로 폭풍tempest을 포함시키고 있다. 셸리의 마지막 순간을 그리면서.


이렇게 하여 7월의 어느 오후, 불길한 하늘 아래에서 배를 타고 미끄러졌던, 여전히 수영할 줄 모르던 셸리는 다시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주검은 10일 후 발견되었는데, 주머니 속에 있던 키츠의 시 <라미아>로 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227)


사실주의로 분류되긴 하지만 또 다른 낭만적인 가슴, 쿠르베의 일화가 이어 오는 게 좋겠다. 펜티멘토pentimento. 오래된 그림을 X-레이 촬영해 찾아낸 수정 자국을 말한다.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자화상 <상처 입은 남자> 아래 숨어 있던 ‘후회의 이야기,’ 잃어버린 사랑이다.


하지만 1973년 그 그림을 X-레이로 촬영한 결과, 그 슬픈 주인공이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음이 밝혀진다. 쿠르베의 고통에 찬 후회이던가? 그 작품의 초기 버전에는 14년간 그가 사랑했던 비르지니 비네가 그의 옆에 그려져 있었던 것. (160-161)



 

저 두껍고 큰 외투의 자리에 원래는 함께 낮잠을 자던 비네가 있었다는 얘기. 표정도 상처도 수정되어 남은 게 이것인데 그러한 상실감 때문이었을까, 쿠르베는 이 작품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 한다. 이야기를 알기 전보다 가슴의 핏자국, 상처가 훨씬 더 아프고 애틋해지는 그림이다.


그리하여, 고요silence. 드디어. 왜냐하면 베케트.


어느 날 베케트는 카페에 앉아 있다가 종이 식탁보 위에 ‘5장으로 된 소극’을 갈겨쓴다. 이것이 바로 인물도, 말도 없는 35초짜리 연극, <Breath>(숨)로 그는 그 극을 통해 고요한 심연을 찬미했다. 그 안에서 탄생, 삶, 고요, 죽음은 합쳐져 하나가 된다.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는 어두침침한 무대 위에서 커튼이 열리고, 5초 후에 아기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 뒤를 공기를 들이마시는 소리가 따르는 가운데 무대 조명이 밝아진다. 5초 동안 무대는 밝고 고요하다. 그러더니 숨을 내쉬는 소리와 함께 조명이 어두워지고 이 상태가 10초 동안 이어진다. 뒤따르는 울음소리. 이번에는 임종의 통곡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초 동안 어둠 속의 고요가 흐르며 막이 내린다. (204-205)


저자가 기록한 35초짜리 연극은 찾지 못했다. 대신 시대의 대세 데미안 허스트의 짧은 동영상을 첨부한다. 베케트가 ‘갈겨쓴’ 소극에 비하면 인생 전체가 전혀 그려지지 않았지만. 우아함에 베케트가 들지 않았으면 실망했을 터이다.






이 기회에 내 우아함의 목록도 한번 챙겨보았다. 젱킨스의 그것과 다르기도 닮았기도 하다. 우선은 지극히 개인적인 목록을 보여준 것에 감사한다. 말 그대로 취향이 고스란한 책. 다만 책에 '찾아보기'까지는 아니어도 '목차'가 있었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내 목록...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을 것이므로 일기에 혼자 간직하겠다. <세상의 모든 우아함에 대하여>, 호흡이 짧아 조금은 아쉽지만 참고문헌이 엄청날(역시 첨부되지 않았다), 충분히 우아하고 지적인 ‘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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