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음악성 Smoking

비단 - 8점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김현철 옮김/새물결


 

방 안은 모든 것이 멈춘 듯 고요했다. 그래서 그 일이 일어났을 때-실은 아무 일도 아니었지만-한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갑자기 / 그 어린 소녀가 / 미동도 하지 않고 / 눈을 떴다. (43)


아름답고 수수께끼 같다. 아니, 수수께끼 같아서 아름다운가. 첫 눈길에 사로잡히는 마음, 말 없는 소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진 듯한’ 비단의 감촉. 남성의 판타지 클리셰.


소녀가 살며시 머리를 들었다.

소녀는 처음으로 에르베 종쿠르에게서 시선을 떼고 찻잔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천천히 찻잔을 돌려 에르베 종쿠르가 입술을 대었던 바로 그곳에 입술을 갖다 댔다. (47)


또 한편으로는 그 판타지를 파괴한다. 약간은 작위적인 느낌의 장치. 발신인이 나중에야 밝혀지는 사랑의 편지. 극히 절제된 말, 짧은 문장, 적절한 반복과 변주가 음악 같다. 문장이 좋다. 역자는 김현철, 스페인어 전공자인 듯한데 책에는 설명도 역자의 말도 없다. 과묵한 작품에 어울리는 편집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떤 것을 상실하고 묵묵히 무언가를 건설하는 인물은 바리코의 일관성으로 보인다. 『이런 이야기』에서는 자동차 서킷, 『비단』에서는 정원이다. 『이런 이야기』에 비하면 길이가 거의 단편 수준이지만 놓친 사랑(또는, 그래서 판타지)과 긴 인생, 여행, 뭔가를 건설하는 것, 글로 전하는 사랑 또는 이별 등이 두 작품을 관통한다.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예요, 주인님.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예요.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의 만남은 이제 끝났습니다. 그래요. 영원히 끝났습니다. 당신은 제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사셔야 해요. 한순간도 망설이지 마세요. 그래야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아무런 미련 없이 작별을 고하는 이 여인을 부디 잊어주세요. (191)



『비단』은 조용하다. 신비한 소녀로부터는 목소리조차 들어보지 못하고 세상 어떤 소리보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다는 아내의 음성은 기껏 “돌아오셨군요.” 정도로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짧은 문장의 반복과 변주가 음악 같다고 해놓고 조용하다니, 무슨 감상이 이렇나. 그런데 그랬다. 눈으로 느끼는 리듬감 같은 것. 한없이 조용하고 가슴이 조금 아리고 긴 침묵이 뒤따르는 작품.


‘조용한’ 소설이라면 크리스토프 바타이유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도 있었는데 읽은 지 오래되어 기억이 뿌옇지만 어렴풋이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조용한 소설이 필요한 이는 찾아보아도 좋을 것이다. 『비단』의 띠지에 이렇게 쓰여 있다. “사랑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면 아직 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분실’ 여부는 모르겠다. 내게 더 확실해 보이는 건, 사랑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면 아직 못 ‘잊어서’다.


“알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가 나직이 말했다.

“무언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죽어가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 당신은 절대로 모를 겁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공원을 걸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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