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을 보았다 Smoking



나의 특별한 동물 친구들 - 10점
제럴드 더럴 지음, 김석희 옮김/우리학교



 

 

“우리에게 필요한 건 (…) 바로 햇빛이에요. 우리가 ‘자랄’ 수 있는 고장이라고요.” (19)


햇빛이 필요해서 그것을 찾아간다. 세상에 이렇게 단순하고 간편하고 정당한 이사가 또 있을까. 멋진 어머니, 다 큰 누나와 형들, 열 살 막내인 나, 개, 그리스 코르푸(케르키라) 섬. 차가운 영국으로부터 햇빛의 낙원에 이르는 한 문단의 여정 또한 이토록 쉽다.


비에 씻긴 프랑스는 슬픔을 자아냈고, 스위스는 크리스마스 케이크 같았고, 이탈리아는 어수선하고 시끄럽고 악취가 났다. 우리는 그 나라들을 지나왔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혼란뿐이다. 이탈리아의 뒤꿈치에서 작은 배가 해질녘의 어슴푸레한 바다로 통통거리며 나갔다. 우리가 숨 막히게 답답한 선실에서 잠을 자는 동안, 달빛에 어른어른 빛나는 그 바다 어딘가에서 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국경선을 지나, 영국과는 정반대인 그리스의 찬란한 세계로 들어갔다. 이 변화의 감각은 자고 있는 우리에게 천천히 스며들어, 우리는 동이 트자마자 깨어나 갑판으로 달려 나갔다. (21-22)


열 살짜리가 5년을 보내기에 이보다 완벽한 장소가 있을까. 이오니아 해, 사이프러스와 올리브나무와 동물들의 섬 코르푸. 게다가 어른들. 섬 주민 늙은 염소치기 야니의 이런 말들.


“나무 밑에 ‘앉아’ 있는 건 괜찮아. 나무 그늘은 우물물처럼 시원하지. 하지만 바로 그게 문제란다. 시원한 나무 그늘에 누워 있으면 잠을 자고 싶어지지.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사이프러스 밑에서 잠을 자면 안 돼.”

그는 말을 멈추고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내가 이유를 묻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왜냐고? 왜 안 되느냐고? 그건 사이프러스 밑에서 잠을 자고 깨어나면 사람이 변해버리기 때문이란다. 그래, 검은 사이프러스는 위험해. 잠을 자는 동안 사이프러스 뿌리가 머릿속으로 들어와 뇌를 훔쳐가기 때문에, 깨어나면 머리가 공처럼 텅 비어서 미쳐버리지.” (60)


아놀드 뵈클린 <죽음의 섬>



책과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뵈클린의 사이프러스를 삽입한다. 고흐도 즐겨 그렸던 지중해의 나무. 오비디우스에서는 아폴론이 키파리소스를 사이프러스로 만들었고 이런 작별인사를 던진 적이 있다. “내 너를 애도하니 / 애도하고 슬퍼하는 모든 이들을 / 도와주거라.” 그래서 사이프러스는 애도의 나무가 되어 주로 지중해 지역의 공원묘지를 지키며 서있게 되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식물뿐 아니라, 제목이 말해주듯 어쩌면 이 책의 주인공은 동물들일 텐데 숱한 에피소드 중에서 박사님 테오도레의 대사를 하나 옮긴다. 신화의 장소에 어울리면서도 전문적인 설명.


“물벼룩을 키클롭스라고 부르는 건, 너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마 한복판에 외눈이 박혀 있기 때문이야. 키클롭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족인데,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 밑에서 쇠를 벼리는 일을 맡았지.” (109)


유머가 넘치는 가족들과 동물들과 친구, 주민들이 어울려 사는 모습에는 그림자 하나 없다. 아니, 어렴풋 있긴 한데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열 살짜리가 보는 세상과 사람들과 동물들. ‘영국 귀족’적인 삶이라고, 인간 중심적이라고 충분히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러고 싶지 않은 낙원 같은 책이다. 젖과 꿀이 아니라 동물과 포도주가 넘치는, 작품의 반향으로 관광객이 몰리고 섬이 변하고 하는 등의 후기를 알고 싶지 않은 사랑스러운 책. 오직 기쁨, 햇빛, 웃음만으로 완성된 글이 있다면 바로 이 책이다.

예술보다 더 예술적이고 웃기고 아름다운 곳. 지도에서 이 섬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고 해도 섭섭하지 않을 정도라면 조금 심할까.


“천만에.” 테오도레는 턱수염 속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다른 곳에서라면 이야기를 지어내야 할지도 모르지만, 여기 코르푸에서는… 말하자면 예술보다 실제가 앞선다네.” (349)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테오도레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멋진 곳이에요.” 어머니가 맞장구를 친 다음, 최고의 영예를 그곳에 부여했다. “나는 저곳에 묻히고 싶어.” (350)


친구 M에게,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지중해에 뿌려달라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불쑥 말했고 그러겠노라는 대답을 들은 게 바로 어제다. 이 책을 손에 들기 전이었다는 얘기. 또 한 번 책이 부리는 마술, 묘한 조우다. 이 책을 M에게 보내야겠다.

화자 제럴드(제리)의 큰형 로렌스(래리) 더럴은『알렉산드리아 4중주』를 쓴 작가이다. 가족을 코르푸 섬으로, 섬에서도 두 번이나 더 이사하게 한 괴짜 장본인. 시치미 뚝 떼고 적어 내려간 작품이 어떨지, 보관함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던 책인데 이제 제리가 묘사한 약간 괴팍한 사람을 떠올리며 반갑게 만날 수 있게 됐다. 그런 가운데, 조금은 우울한 제사를 자꾸 다시 보게 되는 건 또 왜인지. 가본 적이 없는데도 그리움 같은 것이 슬며시 차오르기 때문인가. 혹은 내가 죽어서야 갈 곳이기 때문인가.


그것은 온갖 성분이 조합된 우울, 온갖 사물과 내 여행에 대한

수많은 명상에서 추출해낸 내 특유의 우울이다.

그것은 자꾸만 곱씹다 보면 우스꽝스러운 슬픔으로 나를 감싼다.

-셰익스피어, 『뜻대로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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