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꿈, 사랑, 인생. Smoking

이런 이야기 - 8점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비채


읽은 지 한참 후에 리뷰를 쓴다. 남아 있는 것은 달랑 밑줄들. 기억을 더듬어보자.


모두가 쿨하다. 사랑은 끈적이지 않고 아름다우며 꿈은 이루어지고 만남은 어긋난다. 일생을 이루는 기다리기, 추억하기, 꿈을 이루기. 기다림은 길고 추억은 슬퍼 보이며 꿈은 높고 짧고 완벽하다. 20세기 벽두부터 70년까지, 자동차와 전쟁과 만남과 죽음, 미국과 유럽, 남미까지 종으로 횡으로 거침없다.


여러 화자 중에 울티모의 동생, 자폐증인지의 장애가 있는 이의 목소리 파트(잉글랜드, 시닝턴, 1947년)는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워 따로 하나의 단편으로 취급하여도 될 듯한데 모든 부분이 다 눈물이 핑글 돌 만큼 좋지만 여기가 특히.


형이 이건 네 거야 하고 말하니까 두려움이 사라졌어, 까닭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 흙이 내 거라고 형이 말하니까 두려움이 가셨어, 형이 흙을 조금 꺼내어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면서 이건 네 거야 하고 말하자 무섭던 것이 괜찮아졌어, 형이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는데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된 거야, 흙을 조금 꺼내어 친절한 동작으로 내 재킷 호주머니에 넣어주면서 미소 띤 얼굴로 이건 네 거야하고 말했기 때문이야. 그 흙 덕분에 두려움이 가신 거야. (367-368)


손을 꼭 잡고 있는 형제의 모습은 그들이 아이이거나 어른이거나 이상하게 마음을 울리는 데가 있다. 원서의 뉘앙스는 어떨지 모르지만 이 부분에서 서술형 어미를 ‘-다’형이 아니라 ‘-야’로 옮긴 독백체가 무척 마음에 든다. 읽은 지 한참 지난 지금도 이 부분 때문에 책을 계속 간직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또 인상적인 것은 엘리자베타와 울티모가 사랑을 만들어가는 방식인데, 참신하고 아름다우며 예상 밖의 진행 또한 그 속에 있어 깜짝 놀라고 만다. 두 사람 사이 일기를 쓰고 읽는 사이, 그건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보다 더 내밀한 과정이다. 일기로의 초대. 살로 만나는 것보다 글로 만나는 것이 내게는 늘 훨씬 더 강력한 힘을 행사해왔기에 더욱.


“그녀의 일기에는 그런 종류의 온갖 이야기가 적혀 있었어요. 그녀는 매일같이 글을 썼어요. 그러고는 일기장을 아무 데나 놓아두었죠. 일부러 그랬어요. 내가 읽어주기를 바랐던 것이죠. 그래서 나는 읽었습니다. 그런 다음 일기장을 제자리에 도로 갖다 놓았죠. 우리는 그것을 두고 일절 말을 하지 않았지만 둘 다 알고 있었어요. 얼마 동안 그런 식으로 일이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그건 같이 자거나 성행위를 하는 것보다 대단한 일이었어요. 매우 내밀한 것이었죠. 이해하시겠어요?” (401-402)


글로 만나는 게 살로 만나는 것보다 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살, 친밀해지면 만질 수도 있는 껍데기라는 사실 말고는 글보다 더한 강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글로 인해 사로잡히는 사랑 또한 살로 인한 그것만큼 속수무책이며, 기쁨과 아픔 또는 상처가 살만큼 물리적이지 않던가.


울티모는 엘리자베타의 글에 충실했다. 명령을 받드는 군인처럼 뒤돌아보지 않고 맹렬히. 그리고 세월이 있고 우연이 있고 우연을 알아채지 못한 채 살고 그것이 운명이 되고 꿈은 꿈이고 인생은 완결된다. 이런 이야기.


이 책을 읽고 난 지 한 달이다. 누군가를 잊는 게 최상의 복수라는 말이 불현듯 떠올라 밑줄문장을 다시 찾아보다가 이상하고 게으른 기록을 남기게 됐는데, 해당 부분이 여기다. 울티모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기억에서 지워버림으로써 자기가 받은 고통에 대해 보복한다. 더없이 좋은 방법. 내가 연습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그건 용서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냐. 나는 가비리아를 용서했어. 하지만 나에게 그는 이제 존재하지 않아. 누구에게 기억된다는 것은 중요한 거야. 죄인은 없어. 존재하기를 멈추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지. 누군가를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야. 그건 정당해. (282-283)


억지로 받아든 사과, 예의바른 내 작별인사, 그리고 존재하기를 멈춘 사람. 대신 한 달 만에 바리코를 다시 찾았다. 삐딱한 리뷰와 상관없이 좋은 이야기, 좋은 책이다. 『비단』이 보관함에 들어 있다. 벤디티의 <어리석고 더러운(?) 사랑 이야기>를 들어보자. 순전히 제목 때문에 떠오른 곡, 맞다. Questa (stupida e lurida) storia (d'amore con 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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