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상실 Smoking

트위스티드리버에서의 마지막 밤 1 - 8점
존 어빙 지음, 하윤숙 옮김/올(사피엔스21)


 

마음 푹 놓고 따뜻한 이야기가 읽고 싶을 때를 위해 아껴두었던 존 어빙. 이로써 『네 번째 손』만 빼고 번역 출간된 어빙의 모든 작품을 다 읽었다. 좋았던 순서로 치자면 꼴찌. 왜일까. 이 작품이 따뜻하지 않다거나 ‘어빙스럽지’ 않아서가 아니다. 어쩌면 어빙 보다 내가 더 변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너무 많아서 지겹고,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인물들이 유치해보였다. 어빙을 이제 그만 읽게 될지도 모르겠다. 기적처럼 짠-하고 다시 나타나는 어떤 사랑을 경험하거나 내가 무척 행복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때가 아니라면.


직업이 소설가인 중심인물 대니의 생각을 내가 존 어빙에게 돌려주고 있는 격이다. 대니가 십대 소년 시절에 알몸을 훔쳐보며 흠모해마지 않던 여인, 아버지의 당시 연인이었던 카르멜라를 50여년 만에 다시 만나서 하는 생각.


카르멜라는 틀림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새로 만난 남자와도, 그리고 그녀의 삶을 꾸려가는 일에서도. (행복했다는 것 말고는 카르멜라가 이토록 지겨운 사람이 된 이유를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2권 268)


 

존 어빙은 그러니까 어쩌면 내가 읽기에 너무 ‘행복한’ 작가일지도 모른다. 이 말은 작품이 ‘행복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소설은 바람을 거스르지 않는 돛 같은 숱한 사랑 얘기 외에도 엄청난 폭력과 상실감이 닻처럼 버티고 있는 이야기니까. 그리하여 그 상실에 의미와 깊이를 주는 어빙 표 공감과 연민과 배려의 이런 인물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루피타는 상처 받은 영혼이었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알아보았다. 루피타는 한 번도 조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대니의 3층 작업실을 청소할 때면 늘 눈물을 흘렸다. (2권 181)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겠어요.” 어떤 이와 헤어지거나 그 사람을 영원히 잃게 될 때 그간의 사랑을 대변해주는 건 이런 문장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사랑하는 만큼 우리는 상실하는 셈이다. 어빙의 소설에서 사랑과 상실이 돛과 닻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당연히 그 때문일 것이다. 대니의 아버지(요리사/쿠키)가 일하던 중국식당의 동료들이 이 아름다운 문장을 가르쳐준다. ‘셰 부 데.’

 

중국 고향땅을 떠나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또는 어린 시절 친구나 가족들을 다시는 못 볼지 모르는 먼 곳 어딘가로 떠날 때 셰 부 데라고 말하지요. (샤오 데는 셰 부 데가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겠어요.”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버리고 싶지 않을 때 이 말을 한다고 했다.) (2권 103)


 

영어권 나라들에서 어빙이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알지 못했는데 얄궂게 이 소설에서 힌트를 얻게 된다. 대니가 소설가로 나오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소설 자체를 쓰는 작가이기에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어빙 자신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는 느껴진다. 글을 가장 늦게 배웠으나 내가 보기에 최고 날카로운 비평을 해주는 케첨의 조언(좀 더 대범하게 쓰라)이 어빙을 변명하는 부분으로 보였으며 언론의 ‘상상력 없는’ 행태에 대해 대니가 성토하는 장면들이 그렇다.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니 엔젤은 미쳐 버릴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가 기자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것이다. 대체로 이들은 소설에서 신뢰할 만한 내용이 ‘전적으로 상상을 통해 나온’ 것이라고 믿을 만한 상상력이 부족했다. 또한 전직 기자였다가 나중에 소설을 쓰게 된 이들은 아는 것을 쓰라는 헤밍웨이의 지긋지긋한 금언을 따랐다. 이는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인가? 소설은 아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여야 한다고? 아무 영감도 없는 이 절름발이 충고 탓에 얼마나 많은 소설들이 지루하면서도 아무 느낌이 없을 만큼 현실적인 작품이 되었던가? (2권 175-176)


 

폭력과 사랑으로 얽힌 한 가족의 60여 년 이야기를 줄줄 풀어내는 면에서 여전히 이야기꾼 어빙을 인정한다. 어빙의 미덕은 긴 이야기가 귀에 들리듯이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는 데 있(었)다. 이번 작품이 내게 조금 덜 좋게 느껴졌던 이유에는 번역의 역할도 있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거의 양아들과 계모 사이처럼 지내던 대니와 카르멜라가 아무리 50년 만에 만났기로, 그들이 서로 높임말을 쓰게 될까? 대니가 코흘리개 시절 알았던 예전 마을의 괄괄한 싸움꾼 여인과 또한 그 정도의 세월 이후 만나면 서로 존대하게 될까? 대화체가 아무래도 어색하고 문장들도 조금씩 삐걱대어 글이 눈에 내내 설었다.


프랑스어 판 표지가 왜 저럴까, 했었는데 후반부 대니의 작업실 창문으로 보이는 나무가 바로 저것이었다. 눈이 내리고 거의 화이트아웃 상태가 되었을 때도 혼자 두드러져 보이는 휘어진 나무. ‘이 작은 나무가 끈질기면서도 위태롭게 생존의 끈을 붙잡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2권 208)고 대니가 말하는 나무. 인상적인 표지다.


 

“저 나무 보이세요, 아저씨?” 대니가 작은 소나무를 가리키며 케첨에게 물었다.

“바람이 자빠뜨린 소나무를 말하는 거겠지.”

“네, 그거예요. 저걸 보면 무슨 생각이 나세요?”

“네 아버지.” 케첨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저 나무 전체에 온통 쿠키라고 써놓은 것 같아. 하지만 괜찮을 거야. 대니, 네 아버지처럼 말이야. 쿠키는 괜찮아질 거야.” (2권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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