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풀이되는 제노사이드 NoSmoking

고전으로 읽는 폭력의 기원 - 8점
존 도커 지음, 신예경 옮김/알마

 

제목 ‘폭력의 기원’에서 ‘폭력’은 제노사이드라는 의미로 한정해 볼 수 있겠다. 제노사이드의 기원. 그것을 최초로 규정한 라파엘 렘킨부터 침팬지 사회에서의 제노사이드,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고대 그리스의 제노사이드, 그리고 고대희곡에서의 사례와, 빼놓을 수 없는 성경 속 잔인한 민족학살, 로마의 제국주의와 근대 식민지 개척, 그리고 계몽주의가 홀로코스트의 기원인가 하는 질문까지 이어진다.


역시나 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을 자료로 설명하는 부분이 가장 재미있게 술술 읽혔고 ‘피해자학’의 대명사 구약과 유대인 이야기에서는 속이 시원했다. 저자가 친절하게 용어설명부터 해 주는데 대체신학과 피해자학이 가장 핵심적으로 보인다.


ㆍ대체신학 :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파괴적인 신념의 하나로, 역사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스스로 믿는 특정한 민족과 집단이 다른 민족을 없애거나 제거하거나 대체해야만 한다는 관점.

ㆍ피해자학 : 과거에 속박, 박해, 고통을 받았다면 나중에 다른 땅이나 섬에서 최초의 속박과 박해에 가담하지 않은 민족을 대상으로 폭력, 정복, 파괴를 저질러도 정당하다는 신념이자 서사. (25)


 

정권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역사기록의 문제, 요즘 우리나라 역사교과서로 인해 낯설지 않은 큰 질문이다. 역사에 어떤 주의주장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니 도저히 어쩔 수 없이 어떤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면 약자의 쪽이 아닐까 싶은데 이런 문장을 만나 반가웠다. 무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


헤로도토스는 수없이 많은 식민지화의 사례를 들려준다. 침략과 이동에 관한 사례가 아니라 절박한 이주 혹은 강제 이주에 관한 사례들이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식민지화의 경우, 특히 제국을 확장하려는 욕망으로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상처를 입히려고 시도하는 상황을 이야기할 때면 식민지 개척자가 아니라 식민지 토착민에게, 정복자들이 아니라 정복당하는 사람들에게 공감한다. (74)


 

고대희곡은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성경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내 경우 그건 주위 사람들이 걸핏하면 심각해지기 때문이다. 이야기로만 따지자면 고대시인들의 펄펄 끓는 작품들만큼 잔인하고 가차 없는 얘기들이 성경 아닌가. 내가 남의 종교적 믿음을 존중하듯 내 무신도 그들이 존중해주면 좋으련만. 종교가 없더라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모세의 ‘대단한’ 여정 <출애굽기>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가 놀랍게 닮은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지적도 이 책의 흥미로운 부분이다.


파페의 주장에 따르면, 1948년부터 시온주의자들은 성경을 체계적인 학문 정치 군사 계획으로 활용하여, 자신들이 정복한 팔레스타인 고유의 영역인 이름, 지형, 생태, 역사에서 아랍적인 특징들을 제거해버렸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비유적 팔림세스트’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한 민족의 역사를 덧씌우기 위해서 다른 민족의 역사를 지우는 작업”을 숙원으로 삼는 것이다. 이쯤에서 <신명기>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신명기>에서 신은 히브리인에게 가나안의 풍경을 확실히 지워버리라고, 가나안 고유의 모습을 없애버리라고 지시한다. (189-190)


 

신이 저렇단다. 베르길리우스의 유피테르와 다른 게 뭔가. ‘신의 격려와 도움을 받아 파괴, 인종 청소, 정치적 학살, 도시 학살, 기억 학살, 대체 등 제노사이드와 식민지화를 진행하는 과정은 베르길리우스의 걸작에 등장한 사건과 이야기들의 주제가 아니던가?’ (190) 아래는 《아이네이스》에 드러난 피해자학을 설명한 부분이다.


도덕적 자각의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아이네이아스와 트로이인은 트로이를 멸망시킨 그리스를 보면서 아무런 교훈도 배우지 못했다. 자신이 그토록 고통 받았으면서도 다른 도시, 다른 민족, 다른 땅을 침략하고 파괴하고 불태우고 복속시키고 노예로 삼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기본적인 자각조차 없었다. (207)


 

이 제노사이드의 순환, 계속되는 폭력의 세기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지 않은 당신들도 알고 있다. 너무 당연한 결론이자 모두 알고 있지만 실행은 그토록 어려운, 결국 ‘비폭력’이다. 놀랍지 않지만 허무하지도 않다. 걸핏하면 핵무기의 필요성이며 전쟁 운운하는 일부 보수인사들은 그러한 폭력사태에서 자신은 가장 먼저 빠져나갈 위치에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이다.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은 결국 ‘미개한’ 군중들이라는 생각. 그들이 호가호위하며 겁 없이 전쟁 얘기를 할 수 있는 것도 비폭력을 지지하는 힘없고 ‘미개한’ 다수들이 있는 덕이다. 부디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