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아니라면 누구든 Smoking


가면의 생 - 8점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마음산책

 

pseudo : 거짓·사이비·의사(擬似)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심지어는 내게서 아주 멀어질 수 있을 것 같아 스와힐리어까지 배웠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몹시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스와힐리어로 말한다 해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속된다는 게 바로 그런 것이었다. (11-12)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나이고 싶은 한편 유명한 사람이고 싶기도 하고 위대한 작가이고 싶기도 하면서 또한 익명을 원하는 ‘나’에 관한 정신분열적 소설. ‘나’이지 않기 위해 낯선 언어를 배운다는 설정이 아주 흥미롭다. 언어라는 장치가 아닌 게 아니라 소속감을 준다는 변할 수 없는 사실이렷다. 화자의 정신병원 다른 동료는 이집트 상형문자로 생각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지구 상 존재하는 언어란 적어도 두 명 이상(?)은 사용하는 것 아니던가. 의사소통을 위함이 바로 언어이므로.


가짜, 위장하는 나. 그렇다면 ‘진짜’가 있다는 말인가. 진짜는 누가 정하는가. 출생증명서? 주민등록증? 서명? 서류들은 행정의 편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누군가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 예컨대 도스토엡스키를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를 구분해주거나 어떤 이를 열렬히 사랑하다가 더 이상 그렇지 않은 나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살아 있는 시간은 끊임없이 ‘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분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더 나은 방향(누구 기준에서?)이든 그렇지 않든. 만약 지금의 ‘나’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가만히 있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존경하겠다. 내가 아는 한 이런 사람들은 죽은 이들밖에 없다.


이런 ‘나’를 과장된 정신분열증 환자로 익살스럽고도 아프게 기록해낸 소설이다. 허무맹랑한 듯 자기의 얘기를 주절주절 했다는 점에서 아프고, 약간의 과장만 벗겨내면 바로 우리의 ‘나’들이 고스란히 보인다는 면에서 익살스럽다. 유일한 차이라면 작가는 이런 분투를 멋지게 글로 써냈고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 그것은 이미 엄청난 차이다. 작가들이야말로 위장의 대가 아닌가. ‘위장’의 글쓰기에 대해 이승우가 한 말을 여기에 또 한 번 옮겨본다. 몇 번이고 되새겨도 좋을 명문이기에 기꺼이.


사람이 노출 본능 때문에 글을 쓴다는 말은 거짓이다. 더 정확하게는 위장이다.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이승우, 『생의 이면』에서)


 

익명(匿名)으로 남고자 하는 것과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다르지만, 철저하게 혼자 지낼 수 없는 필연적인 상황에서 그 익명은 자연히 어떤 이명(異名)을 갖게 되거나 추구하게 된다. 작가로서 이명의 본좌는 단연 페소아다. 70여 개의 인물을 자신에게서 분리해냈으며 이 모두들이 각자 부모와 애인, 측근들을 갖고 있는 다른 정체성들이었다. 이렇게 분리된 각각의 시인이나 작가들의 존재가 그에게는 혼란보다는 어떤 편안함 같은 것을 주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분리된 자아가 ‘빌리 밀리건’ 같은 범죄자가 될 수도 있는 반면 페소아 같은 훌륭한 작가가 될 수도 있음이 새삼스럽다.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 혹은 로만 카슈의 ‘나를 벗어나기’ 분투기, 『가면의 생』은 내게  그 어떤 글보다도 활력과 생기가 가득한 작품으로 읽혔다. 나 아닌 사람이 되려고 온 힘으로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증거로 보이기 때문이다. 보들레르의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든’을 ‘나만 아니라면 누구든’으로 바꿔 제목에 달아본다. 나 아닌 누구, 그 중 ‘진짜’가 궁금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1980년 12월 2일 총을 쏜 사람이자 맞은 사람이 진짜일 것이다. 진실로 영원한 건 변덕과 죽음밖에 없다.


존재하지 않으려 애쓰면 애쓸수록 나는 더욱 존재하고 있었다. 내게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더더욱 나를 광고하는 셈이었다. 은밀하게 감춰져 있던 나의 추악함이 맨눈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드러나고 말았다. 의사들이 ‘분열적 결함’이라고 부르던 내 증상이 약물에 의해 메워지고 닫혔다. 하지만 그 약물은 익숙한 일상이 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은 막아냈으나, 대신 자신들이 내 안에서 자리를 잡아 ‘아자르=파블로비치’라는 분명한 등식을 외부 세계에 과녁으로 제공한 셈이었다. 그 유일하고 집중되고 제한적인 과녁을 언론들은 날마다 더 잘 보이고 상처입기 쉬운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정체성이었다. (196-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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