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평과 밑줄: 주인공, 결, 담배영화, 책끝시작, SF세계 NoSmoking

주인공은 선을 넘는다 | 오후 | 사우


영화 텍스트가 비상하게 잘 쓰인 경우입니다. 전작들보다 오후 작가 의견이 훨씬 많이 드러나네요. 선을 넘는 화끈한 글발과 매력이 단비 같습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이런 용기. 부디 계속해주세요.


광풍을 뚫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했는데, 사랑하는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 세상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치열한 싸움 뒤에 공허함만 남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인가. 유치하게도 나는 여전히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 믿는다. 그 대상이 거대한 이상이 아니어도 좋다. 꿈이 아니어도 좋다.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너무 사소해서 다른 사람이 비웃는 것이라면 더 좋다. 남들이 비웃는 그 사소한 것을 위해 당신은 세상을 바꿀 것이다. (265-266, 포기하지 않는 용기 <소공녀Microhabitat(2017)>)


결: 거칢에 대하여 | 홍세화 | 한겨레출판


‘옳기 때문에 내 편이 되는 게 아니라 내 편이므로 옳다고 주장하는 세상’(39)에 환멸을 느끼던 참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존재가 고마운 홍세화 샘.


세계를 떠다니는 인간 부초들, 이주노동자들이 이 땅에 정주하면 안 된다는 정부 당국자의 발상에는 단일민족, 혈통 보존이라는 전근대적 사고와 함께 제3세계 출신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제3세계 사람들에 대한 한국인의 우월감은 백인들에 대한 비굴한 태도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제3세계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표시하는 사람일수록 비굴할 정도로 제1세계와 백인을 선망한다. 예멘 난민들에 대한 혐오는 이러한 ‘GDP 인종주의’에 무슬림에 대한 편견이 결합되어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196-197, 외교부 : 법무부)


담배와 영화 | 금정연 | 시간의흐름


어쩜 이렇게 잘 쓰실까. ‘실패’에 감탄+체호프 조언 이행해줘서 고맙습니다! (호프가 꿀맛은 아니었을 거야... 담배맛)


누군가 내게 담배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릴 것이다. 다시 한 번 묻는다면 말끝을 흐리며 잘 알아듣지 못하게 중얼거릴 거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묻는다면 그때 비로소 내 지저분한 신발 코를 바라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할 것이다. 문장…… (네? 뭐라고요? 제발 알아듣게 좀 말해요!) 담배는 문장이라고요……

하나의 문장은 언제나 다음 문장을 부른다. 담배 역시 언제나 다음 담배를 부른다. 로만 야콥슨의 분류에 따르면, 그때 담배는 은유가 아닌 환유가 된다. (125, 언어와의 작별)


책 읽기의 끝과 시작 | 강유원 | 라티오


부록 장미의 이름 읽기는 장미의 이름보다 더 잘 읽히고 유익하네요. 또 하나의 ‘아욱토리타스’ 되겠습니다. 절판 단행본이 아쉬웠던 독자라면 득템 기회.


서평뿐만 아니라 모든 글의 첫 문장을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든가, ‘우주는 거대한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 등과 같은 과대한 서사로 시작하는 것은 바보들이 하는 짓이다. 인류를 움직인 중요한 책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신약 성경의 첫 권 <마태오의 복음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읊겠다는 소박한 시도로 시작한다. 서평 말미에 ‘이 책을 읽었으니 앞으로는 이렇게 하겠다’는 맹세를 적는 것은 ‘나는 서평을 쓸 만한 깜냥이 결코 아닌 사람’임을 고백하는 짓이다. 책을 읽고 교훈을 얻었다면 혼자서 조용히 당장 해야 할 일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 좋다. (78-79, 서평의 종류와 기본 형식)


SF가 세계를 읽는 방법 | 김창규ㆍ박상준 | 에디토리얼


짤막한 소설과 해설 40편이 묶였다. 인공지능, 로봇, 유전자조작, 신체증강, 가상현실, 우주진출. 근미래 정말이지 궁금해서 장수하고 싶.. 책이나 읽자.


그 시절 사람들은 속도에 매달리고 요약에 매달렸다. 훗날 연구한 바에 따르면 SNS라는 서비스가 그런 경향을 부추겼다고 한다. 더 날카로운 의견과 표현이 더 많은 사람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할 단어와 문장을 갈고 갈아 무기를 만들었다. (…) 하지만 어느 흐름이든 올라타지 못하고 밀려나는 나뭇잎이 있게 마련이다. 나뭇잎들은 서서히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그 안에 나도 있었다. 우리는 스스로 ‘느린 물’이라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느리고,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 의사를 표현하고, 자극을 싫어했다. (146-147, ‘느린 물’ -김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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