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과 닭 + 별의 시간 Smoking

달걀과 닭 - 10점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배수아 옮김/봄날의책

작품 안과 밖으로 소문만 무성하던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를 드디어 만났다. 기억하기로는 『무인도의 이상적 도서관』에서 주마나 하다드가 무인도에 들고 갈 작가 셋 중 하나로 꼽았고(“무엇보다도 그녀는 내게 야만성을 되돌려준다.” 『무인도의 이상적 도서관』 중) 기억나지 않는 다른 데서도 종종 거론되어 기대와 아우라를 품게 했던 작가다. 책을 덮은 지 한참 지난 지금에도 아우라가 여전하다. 길거나 짧은 소설 26편이 실렸다. 이야기를 읽었다기보다 안개 속 목소리를 듣거나 추상화를 스치며 본 듯한 느낌이다. 허스키하고 낮은 톤에 돌연한 문장들이 산문시 같다. 옮긴이 배수아 작가가 좋아한다고 했을 때, 그럴법하다 싶은 분위기랄까. 독특한 가운데 둘이 닮은 듯도 하다. 『G. H.에 따른 수난』의 ‘기이한 목소리’(363, 옮긴이의 말)도 배수아 작가 버전으로 이어 보고 싶다. 리스펙트! 리스펙토르다.


장미가 그리웠다. 장미는 그녀 안에 환한 빈자리를 남기고 떠났다. 깨끗한 탁자 위에서 어떤 물건을 치워버리면, 그 뒤에 남은 더 깨끗한 자리 주변으로 먼지가 동그랗게 둘러싼 것을 보게 된다. 장미는 그녀 안에 먼지도 없고 잠도 없는 빈자리를 남기고 떠났다. 그녀의 심장에는, 이 세상의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는 일 없이, 오롯이 그녀 자신의 소유로 간직할 수도 있었던 장미의 빈자리가 남았다. 더욱 커다란 결핍이 되어. (62,「장미를 본받아」)


『달걀과 닭』379쪽 +『나에 관한 너의 이야기』14-15쪽. (빨간 펜은 내 소행)



나에 관한 너의 이야기 - 8점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추미옥 옮김, 이승덕 감수/자음과모음(이룸)

‘열세 개의 이름을 가졌다’는 『별의 시간』이다. 우리 번역 제목은 저 열세 개 중에 없다만 설득력 있기는 하다. ‘나’는 이야기를 쓰고 있는 작가, 호드리고이고 ‘너’는 마카베아다. 마카베아는 어수룩하고 가난하고 젊은, 브라질 북동부 출신 여인이다. 리우데자네이루 빈민가에 살며 타이피스트로 일한다. 가난과 아픔과 고통을 다 가졌으면서 ‘나는’ 이라고 자신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 대변자이자 묘사자로 작가가 온 셈이다. 작가가 말하듯, ‘그녀를 자기 자신의 존재와 맞닥뜨리게 하는 것이 나의 의무이다.’(22) 마카베아는 자기 자신의 존재와 맞닥뜨리게 될까. 그렇다. 별의 시간, 마카베아가 드디어 ‘나는, 나는, 나는’(157)이라고 말하는 순간이 온다. 비록 ‘전형적인 이야기’(20), ‘이야기가 너무 진부해서 꾹 참고 써내려가자니 힘겹다’(125)고 작가가 털어놓을 정도이지만. 전형적이고 진부한 이야기로, 또한 작가 호드리고의 펜을 빌려 리스펙토르는 자신을, 그리고 브라질 북동부를 구원한 걸로도 읽힌다. 리스펙토르의 마지막 작품이다.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그녀를 위해 기도해 주길 바란다.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생명을 불어 넣어 주길 바란다. 마카베아는 지금 멈추지 않는 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문처럼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어린 소녀를 죽임으로써 이야기를 쉽게 끝내고 빠져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그 이상을 원한다. 나는 생명을 원한다. 독자도 스스로 복부를 주먹으로 쳐 보고 기분이 어떤지 느껴 보길 바란다. 생명은 배를 주먹으로 맞는 기분이다. (156, 강조는 나)






덧글

  • 달을향한사다리 2020/02/03 14:34 # 답글

    지난 토요일에 <나에 관한 너의 이야기>를 도서관 신작 코너에서 집어들었다가 놓고 나왔는데, 3주 후에 갔을 때 빌려올 수 있었음 좋겠네요...
  • 에르고숨 2020/02/04 22:23 #

    신작 코너요? <나에 관한>은 구간이고 절판이기도 한 책인데용. 이상타... 근데 <나에 관한>은 좀 애걔, 하실 듯. 반면 <달걀과 닭>은 내가 뭘 읽은 거지, 하고 저는 신비롭게 좋았답니다.
  • 달을향한사다리 2020/03/03 16:14 #

    아 그게, 제가 잘못 썼네요ㅎㅎ 신작이 아니라 '신착' ㅎㅎㅎㅎㅎ출간된 시기 상관없이 도서관이 새로 구입했으면 따로 꽂아놓아요ㅋㅋ 근데 절판이에요? 어떻게 구했지? 분명히 저 표지 봤는데... 어쩄든 코로나 땜에 도서관도 휴관이고... 당분간 '안읽쌓' 목록이 줄어드는 건 좋긴 한데, 좀 갑갑한 기분도 들고 그러네요ㅋ 이웃님은 안녕하신가요?
  • 에르고숨 2020/03/04 13:19 #

    아항. <나에 관한> 부활해서 신착. 휴관하니 사다리 님 안읽쌓탑 줄어드는 효과가 있군요! (안 돼, 빨리 더 지르세요 우주적으로.ㅋ) 저는 안녕하고 제 탑은 자꾸 새로 생기고 있습니다. 이제 방구석을 넘어 거실까지 진출했답니다.ㅜㅜ
    이웃님도 건강 유의하세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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