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의 책 술이깰때까지자시오

 

에르고숨 배(杯) 올해의 책 시상식입니다. 2018년 말부터 2019년 말까지 나온 책 대상입니다. 10권을 추렸습니다. 상금은 없습니다. 명예는 미미합니다. 재미는 에르고숨 몫입니다.


1. 올해의 SF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입니다. 비주류 장르 덕후로 머물고 싶었던 에르고숨입니다만, 글쎄 김초엽 작가 덕분에 SF가 주류가 되려하네요? 손석희 사장이 앵커브리핑에서 언급하였을 때에는 엇, 놀랐습니다. 혼자 조용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지만 좋은 건 나눠야지요. 반갑고 기쁜 일을 한국과학문학상과 김초엽 작가가 이룬 것 같습니다. 면면히 이어온 한국 SF에서 아름답고 성숙한 꽃을 피운 듯한 느낌입니다. SF는 이래야 해, 가 아니라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는데 SF야, 입니다. 부디 이야기 계속해주시기를. 축하합니다.


2. 올해의 교양과학은 매러디스 브루서드의 <페미니즘 인공지능>입니다. 코딩 예시를 보고 주눅들 필요 없습니다. 두어 군데 분홍색 코딩 빼고 나머지는 쉽게 읽힙니다. 과학기술은 SF와 다릅니다. SF를 좋아하는 만큼 꿈 깨셔라, 하는 논픽션도 함께 장착해야지요. 인공지능은 사람이 만듭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환경에서 갈아 넣은 노동력이 좋은 출력물을 내놓을 리 없습니다. 저자 경험이 녹아든 글발이 뜬구름 잡지 않고 인공지능 기술의 현재를 잘 들려줍니다. STS책들이 요즘 많이 보여 기쁜 와중에도 인공지능 부문의 발군입니다. 축하합니다.


3. 올해의 생명과학은 단연 <종의 기원>입니다. 초판 새 번역으로 다시 왔습니다. 꼼꼼하고 철저한 우리 다윈 선생, 판을 갈수록 덧붙인 설명이 많다고 하지요. 6판으로 가면서, 심하게 말하면, 지저분해진다고. 쨍한 초판을 권하는 전문가들이 많은 이유랍니다. 축하합... 아직 읽지는 않았습니다. 사 놓고 흐뭇해서 그만. 흡.


4. 올해의 사회과학은 위근우 선생의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입니다. 단숨에 읽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보고 있습니다만 읽을 때마다 놀랍니다. 인물 실명을 거론하며 비평하는데 제 간이 다 쪼그라듭니다. 구구절절 어찌나 옳은 말인지 감탄+감동+올해의 책에 들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글 정말 잘 쓰십니다. 이전 책도 찾아보렵니다. 축하합니다.


5. 올해의 소설은 <창백한 불꽃>입니다. 사랑하는 시인을 만들고 아름다운 시를 만들고 저물어가는 왕정국가와 혁명을 만들고 마지막 왕을 만들어 독자를 꼼짝없이 놀려먹는 나보코프의 현란한 글 솜씨를 보십시오. 진짜인 척 쌓아올린 시종 허구, 그야말로 성공한 소설, 그것도 끝내주게 재미있는 추리물이 되어 버린 주석서입니다. 독자를 희롱하거나, 평론가를 풍자하거나 하여튼 성공한 어리둥절함입니다. 2019년 <창백한 불꽃>을 읽고 뿌듯했습니다. 지적, 혹은 문학적 허영심을 채운 느낌이랄까요. 축하합니다.


6. 올해의 시나리오는 김보라 감독의 <벌새>입니다. 영화제 숱한 상을 탔다는데, 정작 영화를 보지 않은 에르고숨은 시나리오 상을 드립니다. 빈틈이 슝슝슝 엄연한데도 이상하게 꽉 찬 느낌입니다. 에르고숨 백자평을 옮겨놓습니다. ‘싱거운 듯 밀도 높고 무해한 듯 정치적이다.’ 축하합니다.


7. 올해의 스릴러는 <아일린>입니다. 알라딘 서지분류로는 소위 ‘순수’문학입니다만 저는 추리/미스터리로 읽었습니다. 답답하고 꽉 막힌 초반부는 배경과 캐릭터를 탄탄하게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에 보답하듯 터뜨리는 후반부의 한 방. 에르고숨은 이런 걸 정말 좋아합니다. 루스 렌들이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도 조금 연상했는데, 무엇보다 오테사 모시페그 자신의 삐딱한 호기로움이 굉장히 멋졌습니다. 작가 첫 장편이랍니다. 이 호기로움이 첫 장편에만 머무르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축하합니다.


8. 올해의 콩고민주공화국은 에마뉘엘 제라르와 브루스 쿠클릭의 <누가 루뭄바를 죽였는가>입니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이름, 36년도 못 살고 간 루뭄바 초대 총리를 다시 각인하게 한 저작입니다. 벨기에를 비롯한 강대국들의 패악질을 봅니다. 콩고민주공화국을 읽는데 대한민국이 보입니다. 올해의 콩고민주공화국은 다른 말로 올해의 역사서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축하합니다.


9. 올해의 일러스트는 시몬 스톨렌하그의 <일렉트릭 스테이트>입니다. 저자는 ‘시각 스토리텔러’라고 불리는 모양입니다. 전자책으로 보았는데 화면을 넘길 때마다 눈이 호강했습니다. 그림들이 환상적입니다. ‘황량함 속 갑툭 초현대문명이 마치, 허무와 생경함이 명징하게 직조해낸(ⓒ이동진) 현대문명비판우화 같다’는 에르고숨의 백자평입니다. 축하합니다.


10. 올해의 뭥미상은 <워터십 다운>입니다. 초베스트셀러를 넘어 영상물로도 제작된 작품이라기에 동화 접종하려고 읽었습니다만, 벡델테스트 ‘ㅂ’도 통과하지 못할 문제작입니다. 신나는 탐험과 모험, 위기와 우정의 순간에는 수컷만 존재하다가 생식에 필요한 존재로서 암컷을 상정합니다. 낙제점 우화이지요. 우화가 이렇게 위험합니다! 중년 시간 아까웠습니다, 워터십 다운 토끼들이여. (올해 나온 책은 아니지만 에르고숨이 올해 읽은 책 중 <다윈 영의 악의 기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들은 존재감이 거의 없고 오직 아빠, 할배로만 전해지는 유전자라니요? 생식 대상으로 여주를 겨우 등장시킨 것도 <워터십 다운>과 판박이. 토할 뻔했습니다.) 온갖 칭찬 허명에 뭥미상 드립니다. 축하(안)합니다.


         

2019년에 고작 180권 읽었네요. 구매한 책은 420권이라는데요. 흙. 2020년에는 200권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해피 뉴 이어! (올해 마지막 지름 하러 갑니다, 총총:)

  
 


덧글

  • 달을향한사다리 2019/12/31 17:40 # 답글

    와~ 이렇게 정리하시다니, 멋지세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는데 SF' 이런 거 진짜 좋아요. <워터십 다운>은 편안하게 위시리스트에서 삭제할 수 있게 되어서 기뻐요ㅋㅋㅋ 다른 카테고리가 늘어났지만...

    새해에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 에르고숨 2019/12/31 23:21 #

    이히히 고맙습니다. 워터십 다운이 사다리 님 보관함에 있었군요! 길이도 길어서 더욱 짜증났던 책... 끙.
    사다리 님도 새해 건강 (더욱) 잘 챙기고 책 (계속) 많이 읽으시길 바랍니다 :)
  • 解明 2019/12/31 19:17 # 답글

    180권이 고작이라니 너무하십니다. ^-^;
  • 에르고숨 2019/12/31 23:22 #

    (272권 읽은 이웃님↑이 계셔서요.ㅎㅎ;) 구매 권수 대비 완독 권수가 반도 안 되니 그렇습니다. 역시, 저로선 더 많이 읽기를 노리기보다 덜 사기를 지향하는 게 바람직하겠지요? 힝.
  • 다락방 2020/01/05 11:14 # 삭제 답글

    창백한 불꽃이 그렇다고요?????
    아일린든 알라딘에서 믿고 보는 리뷰어도 극찬한 책인데 에르고숨님까지! 아아, 아일린을 봐야겠어요.
    이런 정리 너무 재미있어요!
  • 에르고숨 2020/01/06 15:15 #

    넹. 저는 좋았어요. 창백한 불꽃도 아일린도.
    이 정리 재밌었어요? 저도요.ㅎㅎㅎㅎ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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