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파 + 우리가 빛의 속도 Smoking

기파 
박해울 지음/허블


소행성에 부딪쳐 파손되고 궤도를 이탈한 호화 우주 크루즈선 오르카호. 재난 와중 마지막까지 승객들을 도운(도왔다고 알려진) 의사(義士), 선상 의사(醫師) 기파를 구해 오라. 충담이 운 좋게 오르카호를 발견한다. 상금은 딸의 심장이식 수술이다. 흔한 설정이긴 하다만 그래서인가, 스토리 진행이 탄탄하다. 2071년 배경에 그림자 노동이나 대기업의 권력 같은 현재 사회 계층 문제가 고스란하다. 거기에 더해 인공지능 윤리 문제까지 아우른다. 오랫동안 다듬어 왔다는 작품답게 서툰 구석 하나 없이 능수능란, 기성 작가 작품 같다. 믿고 보는 한국과학문학상 제3회 장편 대상이다. 한국과학문학상은 수상작도 좋지만 심사평들이 주옥이다. 글을 쓰거나 읽는 사람이라면 피와 살이 될 충고까지 덤으로 얻는다.


예를 들어 ‘나름’은 부사가 아니라 의존명사이므로 ‘나름 유명하다’ ‘나름 잘 했다’ 등의 표현은 한국어의 문법에 어긋난다. ‘그 나름대로’ 혹은 ‘자기 나름대로’ 등 앞에 누구의 나름인지를 밝혀주어야 한다. (…) 전반적으로 과학소설을 쓸 때 인권 감수성과 젠더 감수성을 키우고 음모와 반전에 대한 집착을 버렸으면 한다. 문학 작품이 아닌 ‘SF를 쓴다’ 또는 ‘SF는 이래야 한다’라는 편견을 버리고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216-217, 심사평, 정보라)



한 해 전 단편 대상 수상자 김초엽 작가 작품 일곱 편이 묶였다. 차분하고 담담하고 성숙하고 우아하다. 어떤 주제라도, 누구라도, 말을 걸면 당황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조곤조곤 다 답해줄 듯한 사람 느낌이랄까. 정세랑 작가가 ‘마음을 다 맡기며 좋아할 수 있는 새로운 작가’라고 한 게 완전히 이해된다. ‘내 나름대로’ 감히 말하건대, 거장의 출발을 목격하여 행복하다. 아무 요구 없이 팬이 될 준비 완료했다. 일곱 편이 모두 각양각색으로 좋지만 <공생 가설>을 적어두자.

인중 말이다. 꼬물이 아기들은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가, 말을 시작할 무렵 ‘쉿!’ 신(?)이 비밀누출금지령을 내리며 입술 위에 손가락으로 찍어 자국을 남긴다는 설을 어디선가 본 적 있다. <메리 포핀스>에서도 전지(全知)했던 아기들이 자라면서 능력을 다 잊어버리는 어린이가 되는 거 나오지 않던가? 소위 유년기 기억 상실증. <공생 가설>에서 상정하는 발화 전 전지 존재는 외계에서 왔다. 우리가 모두 커서 바보 지구인이 되기 전에는 뇌 속에 류드밀라 행성 기억이 있었다는 사실... 왠지, 뭔지 모르게 그립더라니.


류드밀라의 행성을 보며 사람들이 그리워한 것은 행성 그 자체가 아니라 유년기에 우리를 떠난 그들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141,「공생 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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