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가 노래하는 곳, 아일린 Smoking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살림

 

석양이 하늘에 줄무늬를 그릴 때면 카야는 가끔 혼자 바닷가로 걸어가 파도가 심장을 두드리는 느낌에 젖었다. 허리를 굽히고 손으로 모래를 만지다 구름을 향해 두 팔을 쭉 뻗었다, 유대를 만끽하며. (…) 고립된 세월로 행동이 변해 이제는 보통 사람들과 달라졌다는 걸 알았지만, 혼자 지낸 건 그녀 잘못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는 것은 거의 다 야생에서 배웠다.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자연이 그녀를 기르고 가르치고 보호해주었다. 그 결과 그녀의 행동이 달라졌다면, 그 역시 삶의 근본적인 핵심이 기능한 탓이리라. (448)


여섯 살 카야부터 예순여섯 살 카야까지, 습지 소녀에서 습지 과학자로의 변모를 본다. 인간관계와 자연이 어찌나 가혹하고 가끔은 또 어찌나 아름다운지. 과연 자연 에세이를 써온 노련한 저자답다. 거칠고도 다정한 배경에 살인 사건을 하나 툭 던져놓고 독자를 끌고 가는 힘이 대단하다. 멋진 표현들이 수두룩하다. ‘라디오에서는 술통 바닥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는 사람 같은 소리가 났다.’(20) ‘그러던 어느 날 오후, 거짓말처럼 봄이 팔꿈치로 쑥 밀치고 들어와서는 아예 눌러앉았다.’(167) 등등. 이야기를 놓은 순서도 영리하고 멋져서, 과거와 현재 일화가 번갈아 나오다가 어느 순간 만나 손잡고 같이 간다. 외롭고 강한 카야와 함께 욕하다가 응원하다가 울기는 나 혼자 운다. 카야가 울며 주저앉아 버리지 않아서 고맙다. 델리아 오언스의 멋진 첫 소설이다. 최근 읽은 장편 데뷔작이 또 있어서 이어 놓는다.



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문학동네

 

그 오래된 격언, 뭐더라? 친구란 당신이 시체를 감추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것이 이 새로운 관계의 요체였다. 나는 즉시 그것을 감지했다. 내 인생이 바뀌려 하고 있었다. 이 묘한 인간 속에서 나는 내 짝, 동종의 영혼, 동지를 만났다. 벌써 혈맹의 악수를 위해 칼로 벤 손을 내밀고 싶었던 나는, 그 정도로 쉽게 휘둘리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143)


셜리 잭슨 같기도 하고, 하이스미스 같기도 하다. 젊은 작가의 장편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능청맞도록 성숙하다. 70대 아일린이 20대 아일린을 회상한다. 외롭고 상처받고 강한 주인공, 휘몰아치는 결말이 <가재>와 통하는 듯도 하다. 그러나 카야와는 아주 다르게, 아일린은 고향 마을 X빌을 떠나려 기회만 엿본다. 차근차근 캐릭터와 배경을 탄탄하게 만들어놓은 후에 터뜨리는 한 방이 화끈하다. 옮긴이의 말에서 본 바, 삐딱하고도 호기로운 작가 ‘캐릭터’까지도 수긍하게 된다. Ad Astra라는 영화도 나왔기에 사족으로는 펠멜 담배 신이 좋겠다.


그녀는 케이스를 열고 내게 담배 한 대를 권했다. 필터 없고 굵은 그 펠멜 담배는 내가 그제껏 피워본 가장 독한 담배였다. 그 후 그 담배를 몇 년쯤 피우기도 했는데, 상표의 로고-사자 두 마리 사이에 있는 방패-를 가로질러 쓰인 표어의 예기치 못한 아름다움에 조금 감동했다. Per aspera ad astra. 가시밭을 뚫고 별까지. 내 역경을 정확히 표현하는 말이라고,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176, 강조는 나)


5별 가재 + 5별 아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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