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 펀 홈 Smoking

벌새 - 10점
김보라 쓰고 엮음, 김원영, 남다은, 정희진, 최은영, 앨리슨 벡델 지음/arte(아르테)


1994년에 십대로 살지는 않았다. 이십대였다. 성수대교 붕괴가 주요 모티브로 등장하나 은희의 중학교 시절 공기 때문인지 내 십대가 많이 떠올랐다. 내 얘기를 내가 했어도 이보다 잘 전할 수는 없겠다 싶은 장면들이다. 다음은 내 얘기다. 다른 반 아이와 주고받았던 연애편지, 점심을 늘 같이 먹던 단짝 친구, 누가 누구와 사귄다든지 또 누구는 밤에 놀러 다니는 ‘날라리’라든지 하는 소문, 그 날라리들이 친구가 되었을 때 보니 세상 순진하고 착한 이들이었다만. 또 폭력도 있다. 자기 오빠나 아빠한테 맞았다는 친구, 매질이나 성추행을 일삼는 선생. 또 한편 은희가 다니는 한문 학원 영지 선생님 같은 이도 있어서, 잠시 와 있던 교생 선생님이었다. 생물 수업 시간에 <작은 연못>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선생님 집에 놀러 간 적도 있다…….


그러니까 은희를 읽으면서 동시에 나는 내 십대 시절을 환기했다. 십여 년 사이 세상은 많이 바뀌기도 했고 여전하기도 한 모양이다, 는 하나마나 한 말이다. 요는, 스토리텔링을 구성한 작가/감독의 힘이다. ‘너’를 읽으러 온 사람에게 ‘나’를 읽는 경험을 하게 하는 예술. 무해한 듯 매우 정치적이고 싱거운 듯 밀도 높다. 아프고 그립다. (또르르) 벅차다. 영화는 못 보겠다. 시나리오가 워낙 아름답다. 희곡/시나리오가 작품 전(前) 단계, 그러니까 상연/상영을 위한 도구라는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테네시 윌리엄스 희곡을 읽으면서 배운 점이다. 희곡/시나리오 자체가 작품이라는 사실을 <벌새>도 보여준다. 물론 영화 관람을 마친 이라도 읽어 좋으리라. 부록으로 실린 글들도 좋거든. 영화에서 어떤 장면을 잘라 냈는지 모르겠지만 무심히 툭툭 던지는 일상 신이 모두 멋지다.


(은희, 불빛에 잠에서 깨니 언니와 언니 남자친구 준태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준태는 은희의 큰 반창고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준태는 은희에게 친근하게 군다.)
준태: 아프지 않았어?
은희: 아니요.
준태: 속에 봐도 돼?
(은희, 고개를 끄덕이며 반창고를 떼어 보여 준다.)
준태: 헉, 진짜 아팠겠다.
은희: 그냥… 그랬어요. (160-161, 시나리오)


부록 중 김보라+앨리슨 벡델 편에서도 감동했다. 주거니 받거니, 자고로 대화란 이런 것, 이랄까. 누가 누구를 인터뷰하는 게 아니라 서로 궁금해 못살겠다는 듯 물어보고 답하고, 답하고 물어보고. 두 예술가가 이럴 수 있었던 이유, <펀 홈>으로 가 본다.



펀 홈 : 가족 희비극 (페이퍼백) - 10점
앨리슨 벡델 지음, 이현 옮김/움직씨


 

벡델테스트: 영화에서 양성평등을 가늠하는 지수다. 미국의 여성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고안한 것으로서 해당 영화에 여성이 얼마나 자주, 주도적인 캐릭터로 등장하는지를 평가한다. (다음백과 중)


저 ‘벡델’ 맞다. 앨리슨 벡델이 회상하는 아버지와 ‘나’다. 만화 주제에(!) 읽을 게 무지 많다. 문학 작품을 좋아한다면 (나다) 더 와 닿을 가족사이겠다.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아 작품을 만든다는 점에서 김보라 감독과 나눌 얘기가 많았겠다. ‘나’와 공유한 아버지의 비밀이 주요 모티브다. 꽃과 우아한 가구와 옷, 옛것,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아버지 취향 덕분에 독자 눈이 호강한다. 고풍스러운 집과,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속 마을과 꼭 닮았다는 마을하며 벡델의 유년 시절이 멋진 그림들에 담겼다. 특히 앨리슨을 포함한 아이들이 너무 귀엽다. 아버지는 엄하고 무뚝뚝하다가 때로는 다정하고…… 슬프다.


딸이 커서 드디어 <율리시스> 얘기를 함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 딸이 은근히 권한 책을 자기가 읽고 감상을 나누는 건 또 얼마나 기뻤을까. 서재에서 추천할 책을 골라 뽑으며 신나하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무엇보다 놀랍고 부러운 건 이 대목이다. ‘아버지는 갖고 있는 책을 다 읽었다. 겉표지가 해지고 뿌옇게 먼지 앉은 양장본에서부터 책등이 쭈글쭈글한 문고본에 이르기까지.’(90) 부럽다고 했지만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크다. 아버지는 정말 피츠제럴드의 44년 생애를 오마주한 걸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는 앨리슨도 마찬가지다. 앨리슨은 애도를 해냈을 뿐이다. 아주 아름다운 방식으로.

<벌새> 모서리 + <펀 홈> 238쪽

 


핑백

  • 술집에서 문득 본 진실 : 2019년의 책 2019-12-31 12:11:17 #

    ... 2019년 &lt;창백한 불꽃&gt;을 읽고 뿌듯했습니다. 지적, 혹은 문학적 허영심을 채운 느낌이랄까요. 축하합니다.6. 올해의 시나리오는 김보라 감독의 &lt;벌새&gt;입니다. 영화제 숱한 상을 탔다는데, 정작 영화를 보지 않은 에르고숨은 시나리오 상을 드립니다. 빈틈이 슝슝슝 엄연한데도 이상하게 꽉 찬 느낌입니다. ... more

덧글

  • 최세희 2019/09/23 14:42 # 삭제 답글

    벌새 모서리 컷과 펀 홈 238 페이지를 사진 한 장에 담은 이유가 뭘까? 궁금해요. 펀 홈 238페이지의 장면과 벌새 서사의 한 귀퉁이가 연관되는 지점이 있다는 암시인가요? 힝 ㅠㅠ
  • 에르고숨 2019/09/23 15:03 #

    펀 홈 238쪽이 뭉클해서 사진 찍고 싶었는데 위에 쓴 독후감은 벌새여서 소심하게 같이 넣었어요.ㅋㅋㅋㅋ +자기 얘기를 풀어냈다는 점에서 두 저자가, 두 서사가 만나는 지점도 없지 않아요. 젊은 아빠에 대한 애도도. 두 권 다 짱이에요, 매 눈 최세희 님.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