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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역학(Social Epidemiology)이란 역학의 한 분야로,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구조, 제도, 관계 등을 추적하는 학문이다. (…) 사회역학은 개인 보건적 요소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 역시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사회적 요인과 건강의 상호관계에 주목한다. (위키백과)
역학(力學) 아니고 역학(疫學)이겠으나, 질병의 원인으로 사회적 환경을 상정하다 보면 사회역학(力學)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건강에조차 존재하는 힘의 관계 말이다. 몸이 겪는 불평등이다. 권력에서 밀려나 있는 약자의 질병, 고려 대상이 되지도 못하는 비주류 고통을 돌아본다. 권력, 시선, 기록, 죽음과 질문, 상식으로 나뉜 장에서 ‘생산되지 않는 지식, 측정되지 않는 고통’(책소개)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숱한 논문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문장들이다. 저자는 자기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왜 고마운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다. 내 얘기를 해줘서다. 애써 보려 해야 보이는 사회의 을, 병, 정의 건강들. 순전히 운이 좋아 여태 살아온 게 아니라 사회가 내 건강을 염려한다면…… 더 잘 살겠다. 사회역학(疫學)이 사회역학(力學)으로 읽혀 고마운 <우리 몸이 세계라면>은 제멜바이스로 끝나고 <의학사의 이단자들>은 제멜바이스로 시작한다.
의과대학 학생 시절, 실습생으로 처음 수술실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소독약으로 손을 씻는 법이었습니다. 손에 묻어 있는 균을 환자에게 옮기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150년 전만 하더라도 의사들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손을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 변화의 시작에는 헝가리 출신의 의사 제멜바이스의 실험이 있었습니다.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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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멜바이스를 언급하는 머리말을 지나 5부 각 4장으로 이루어진 본문은 의학사 20장면을 그려준다. 또는 20명(이상)의 ‘이단자’들이 의학에 가져온 발전을 이야기한다고 할까. 길지 않은 분량에 20명(이상)이 각각 살아 있다. 평전이라기엔 짧고 에피소드라기엔 풍부하고. 크고 작은 이야기를 적절하게 구성해 어쩜 이렇게 경제적으로 잘 썼을까. 검토한 자료 목록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길다. 자료의 힘, 취사선택 편집과 구성의 힘인가 보다. 익숙하고 유명한 인물만 좇지 않고 의학사에서 혁명적인 사건 속 이름들을 거론한다. 대부분은 의사들이지만 때로는 역학자, 환자, 환자의 배우자, 동물권 옹호자이기도 하다. 예컨대 종두법 제너가 알려지기 전에 메리 워틀리 몬태규가 있었다는 사실이나 심장 박동기가 처음 시행되는 계기로 환자 배우자 엘세 마리에 라르손을 거론하는 식이다. 백과사전 형태 의학사와는 달라서 스토리가 살아 있다.

특히 마취제를 둘러싼 이전투구는 <마취의 과학>에서 얼핏 보았던 세 사람의 아프고 슬픈 이야기였다. 19세기 무지막지한 외과수술의 고통을 끝내게 해준 업적 이면의 블랙코미디다. 웰스, 모턴, 잭슨 각자의 형편이나 성격, 이후 행적을 건조하게 일러주는데 가치평가는 없다. 그냥 비극이다. ‘그는 정신이 돌아왔을 때 아내에게 편지를 쓴 뒤 다리의 대동맥을 끊어 자살했다. 이 마지막 순간에 그는 먼저 자신의 몸을 마취하는 걸 잊지 않았다.’(330/471) 같은 거. 짧은 저자 소개에 의하면 마취제 연구서를 쓰기도 했던 모양이다. 번역되어 나온 다른 작품이 없어 아쉽다. 전자책으로 읽었으나 종이책으로 갖고 싶은 책, 줄리 M. 펜스터다. <제1구역>으로 넘어가기 위해 천연두 편에서 발췌해보자.
1980년 5월 8일, 세계보건기구는 인류가 이제 천연두에서 해방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건 의학계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종두와 우두가 마침내 지구상에서 그 바이러스를 박멸했다. 하지만 그 바이러스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미국 정부가 애틀랜타에 있는 질병 감시 및 예방 센터에 천연두 바이러스를 배양해서 보유하고 있으며,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의 연구소도 이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다. 만일 이들 바이러스가 유출된다면 엄청난 재앙이 올 것이다. (21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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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가 폐기하지 않고 있던 바이러스가 유출됐는지는 모르겠다. 원인 모를 역병이다. 감염되면 공격성을 보이는 ‘해골,’ 또는 얌전하게 제 자리를 지키는 ‘붙박이 망령’이 된다. 마크 스피츠(별명이다)는 어찌어찌 살아남아 임시정부 소속 감염자 처리반에서 일하게 된다. ‘최후의 밤’ 이전에는 계층 때문이었든, 피부색 때문이었든, 뉴욕에 올 때면 주눅 들곤 했던 마크 스피츠다. 재난 때문에 덜 불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는 거, 희극인가 비극인가. 알 수 없고 혐오스러운 ‘적’을, 나머지가 똘똘 뭉쳐 시급하게 타자화하는 건 또 다른 편견인가 아닌가. 종말 문학이 대개 그렇듯 콜슨 화이트헤드도 현대 문명을 아프게 꼬집는다.
마크 스피츠라는 실제 인물을 미리 알고 있어도 나쁘지 않았겠다. 1950년생 미국 수영 선수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7종목을 석권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8관왕 마이클 펠프스 이전까지 한 대회에서 최다 금메달을 딴 사람이었단다. <제1구역> 주인공이 이 별명을 가졌다. 왜 그렇게 됐는지, 어떤 은유와 소용을 가질지 이야기에서 알게 된다. 소설 속 흐른 시간은 단 3일이나, 플래시백이 마구 끼어든다. 글 전체가 PASD(Post Apocalyptic Stress Disorder)를 보여주는 듯도 하다. 발음상 과거Past 혹은 종말 후 스트레스 장애PASD 둘 다 되겠다. ‘폭력적인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다정한 소설’이라는 뉴욕 타임스 북 리뷰를 오래 쳐다보았다. 저 이상한 다정함은 편견을 몸소 겪어본 작가여서 가능했던 게 아닐지. <더 로드>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분명, 지금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할, 잿빛으로 우아한 종말 문학.
게리라면 인종, 성별, 종교적 편견을 수두룩하게 알고 있을 것 같았다. (…) 지금은 흑인 백인 할 것 없이 한편이 되어 역병 환자인 ‘그들’을 욕하는 시대였다. 깨끗이 소탕된 안전구역이 점점 늘어나고, 사람들이 다시 숨이 막힐 만큼 복작복작 모여 살게 된다면, 과거의 편견들도 되살아날까? 아니면 이런 적의, 두려움, 시기심을 되살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만약 서류작업이 되살아날 수 있다면, 편견과 주차 티켓과 재방송도 분명히 되살아날 것이라고 마크 스피츠는 생각했다.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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