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다 NoSmoking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봄날의책


그것은 30센티미터쯤 되어 보였다. 아빠가 보지 못하는 본인 몸의 수술 자국을 내가 봤다. 긴 줄 위에는 약 1센티미터 간격으로 바느질이 되어 있었는데 마치 스테이플러로 찍은 듯했다. 지네 다리 같았다. 지네는 예상과 달리 아주 깨끗했다. 소독할 때 따가워보였다. 따가워 몸을 비틀면서도 아빠는 상처를 차마 쳐다보지 못했다. 내가 봤고 나중에 이쯤 되더라고, 오른손 한 뼘을 펼치며 얘기해주었다. 거짓말이었다. 상처가 그렇게 클 줄, 그렇게 깨끗할 줄 몰랐다. 그 속에서 한쪽 콩팥과 요관을 꺼냈을 것이다. 암 덩어리.


아빠가 77년 만에 배에 얻은 30센티미터 지네는 삶 같았다. 의지 혹은 희망 같았다. 아서 프랭크의 말을 빌리면 변화와 상실과, 아직은 알 수 없는 어떤 것의 획득일 수도 있겠다. 질병이나 돌봄의 경험은 삶을 조망하게도 하고 충실한 일상을 살게도 한다고, <아픈 몸을 살다>가 얘기한다. 우리말 제목 참 잘 옮겼다. 모든 필멸의 존재가 겪을 변화와 상실과 획득의 주체, 아픈 몸이다. 지금은 내 아빠이고, 다음은 어김없이 나일 것이다.


한 사람이 살아온 역사는 몸에 기록된다. 몸에 남은 나의 역사에는 물론 후회되는 부분도 있지만, 조금 있으면 사라질 역사이기에 애도했다. 수술과 화학요법 치료가 몸을 뒤바꾸고 나면 나는 다르게 살게 될 것이었다. 달라지면서 많이 잃을 것이고 또 그만큼 많이 얻겠지만, 무엇을 얻을지는 아직 알지 못했던 반면 상실할 것은 거울 속 바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65-66)


 

액스 Smoking

액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최필원 옮김/오픈하우스


서쪽 호수Westlake라는 잔잔한 이름을 가진 작가가 세상에, 화끈해라. 정리해고 당한 주인공이 새 직장을 얻기 위해 잠재적인 경쟁자들을 찾아 죽인다. 끝. 이보다 노골적일 수 있을까. 정리해고와 실직상태가 촉발한 경쟁을, 말 그대로 살인으로써 보여준다.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이기심의 극치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외침 이면, ‘내가 살기 위해 네가 죽어줘야겠어’가 돼 버린 현대 사회 풍자이겠다. 살인자가 되기 전의 나만큼 선량하고 무해한 이웃이 내 ‘적’이라는 사실도 가슴 아프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정리(해고)에, 피도 눈물도 없는 정리(살해)로 응하는 우리의 주인공. 제목을 환기하자면 <The Ax>다. 모종의 이유로 더 이상 자기 총을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왜 도끼ax를 사지 않고 망치를 사지? 했던 사람, 나 혼자인 건 아니지? 적어도 한 번은 <죄와 벌>을 언급하리라 헛되이 예상했던 사람? 부끄럽도다.


ax : 1. 도끼  2. 재즈 악기 (기타, 색소폰 등)  3. 참수, 처형; 면직, 감원, 대삭감 (주로 공무원·공공 경비 등의) (네이버 사전)


“인원 축소 바람에 휩쓸리신 거군요.”
“그렇습니다.”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더군요.”
그가 말한다.
“그래도 당신은 끄떡없지 않습니까.”
나는 말한다.
그가 수줍은 듯 피식 웃는다.
“오, 범죄는 성장 산업이거든요.” (213, ‘그’는 경찰임.)

 

버드 박스 Smoking

버드 박스 
조시 맬러먼 지음, 이경아 옮김/검은숲


무섭고 영리한 아포칼립스물. 메두사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설명이다. 보는 행위로 광기에 감염된다. 남을 죽이기도 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는 광기다. 메두사는 페르세우스가 방패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처리할 수 있었던 반면, 조시 맬러먼의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존재는 비디오로 녹화해 모니터로 보아도 보는 사람이 감염되어 죽는다. 첫 출현 장소가 러시아인 점으로 보아 거기 떨어졌다는 우주 운석쯤이 원인이 아닌가 싶다만 중요하지 않다.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 주인공이 있고 미지의 존재에 잔뜩 겁을 먹어야 하는 독자가 있을 뿐이다.


살아남은 이들 중 아무도 못 봤고, 따라서 독자 또한 아무것 못 봤음에도 무섭다. 러브크래프트가 말한 미지에 대한 공포를 잘 이용한 셈이다. 그런 면에서 스티븐 킹의 <그것>보다 훨씬 우아하다. 넷플릭스 영화로 만들어진 모양인데, 텍스트가 주는 공포를 어떻게 화면에 옮겼을까. 시각 능력이 감염의 원인이 되는 이야기를 시각 예술로 표현한다? 부디 ‘그것’을 구체화하지는 않았으면 싶다. <그것>의 거미는 너무 초라하고 우스웠거든. 글로 만나 충분히 무섭고 삭막하면서도 강한 이야기, 조시 맬러먼의 <버드 박스>다.


“네, 엄마. 이제 우리뿐이에요.”
“어디로 갔어?”
“멀리요.”
“어느 방향으로?”
말이 없다. 바로 그때였다.
“우리 뒤에 있어요, 엄마.” (370)



카라바조의 메두사

 


호텔, 섬, 챈스, 여름 + 스포! Smoking

호텔 사일런스 
외이뒤르 아바 올라프스도티르 지음, 양영란 옮김/한길사


요나스는 죽으려고 여행을 떠난다. 단출한 여행 짐에는 드릴이 들었다. 드릴이라니 엉뚱하지. 여행지는 전쟁을 겪은 어떤 이국이다. 호텔 이름이 사일런스다. 무너지거나 폐허가 된 도시에서 호텔이라고 번듯할 리 없어서 장롱문도 수돗물도 시원찮다. 고쳐 쓴다. 요나스의 드릴과 고쳐 씀이 소용이 된다. 황폐한 도시에서 어쩌면 일차적인 쓸모다. 죽으려고 떠났던 길이 삶으로, 의욕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배경 음악은 콜드플레이의 <Fix You>가 좋겠다. 말 그대로, 내가 고쳐볼게요. 요나스가 고치게 되는 건 문짝과 수도, 도시와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이겠다. 도톰한 종이에 큰 글씨 책이다. 고장 난 내 눈이 반가워한다.


어린 아들과 동생을 데리고 어떻게든 비 오듯 쏟아지는 폭탄 아래에서 (…)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온 이 젊은 여자에게 나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 창문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먼지와 폐허뿐인 상황에서, 나의 불행은 아무리 후하게 봐주어도 하찮기만 하다. (177)


섬에 있는 서점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루페


한적한 섬에 서점이 있고, 서점 주인은 자기 취향만 고집하고, 부부이다가 부인을 사고로 잃어 홀아비가 되고, 외로움으로 성격은 더 괴팍해지고, 서점에 아이가 버려지고, 아이는 책에 둘러싸여 자라고, 아이가 크면서 서점 주인도 부드럽게 바뀌고, 아이는 알고 보니 사연이 있고…… 온통 클리셰. 섬, 서점, 사랑을 키워드로 넣어 AI가 썼을 법한 이야기다. 이미 읽은 책이 아닌가 싶어 지난 독서목록을 뒤지기까지 했다. 전형을 넘어 원형 타이틀을 달아주고 싶은 정답 책이랄까. 두 번 다시 만날까 겁이 난다만. 일 년에 책 한 권 읽는 사람에게라면 추천하겠다. 달리 말해 ‘인생책’이 되기 어렵지 않을 진부함본좌.


새벽 다섯 시, 에이제이는 책을 덮고 책표지를 가볍게 토닥였다.
마야가 잠에서 깼고, 좀 나아졌다. “왜 울어요?”
“책을 읽고 있었어.” 에이제이가 말했다. (117)


정원사 챈스의 외출 
저지 코진스키 지음, 이재경 옮김/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챈스는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정원사였다. 주인집 저택 방 한 칸에 살았고, TV와 정원만이 챈스의 세계였다. 주인 노인이 사망하면서 저택을 나오게 된다. 문을 나서자마자 자동차 사고를 당한다. 정·재계 유력인사의 차다. TV와 정원에서 배운 대로 처신한다. 정원사(가드너) 챈스가 우연히 ‘가디너 씨’가 된다. 신분증명서 즉 과거가 없는 사람으로서, 보는 사람들이 보고 싶은 대로, 지적이고 소탈하고 겸손하고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 된다. 짧은 문장과 단순한 이야기 속에 대중 현실 풍자가 날카롭게 담겼다. 페이지터너……라고 할 것도 없는 190쪽의 소품이다. 원제는 <Being There>. 거기에 있기. 거기에 있는 것은 나인데 존재증명은 타인들이 한다. 내 존재는 어쩌면 나와는 상관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없고, 당신들이 보고 말하는 나만 있다... 어우, 어쩌지.


“출생증명서라도?” 헤이스 양이 상냥하게 물었다.
“증명서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저희는 선생님이 여기 살았다는 증명이 필요합니다.” 프랭클린 씨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증거잖아요. 내가 여기 있잖아요.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한가요?” (34)

 
두 해 여름 
에릭 오르세나 지음, 이세욱 옮김/열린책들


섬으로 들어간 번역가 질Gilles을 둘러싼 이야기다. 질은 게으르고 늑장 부리기 좋아하며 번역 일에 관한 한 고인이 된 작가 작품을 선호한다. 제 발로 조용한 장소를 찾아 고립되어 살 줄 알았더니, 웬걸. 번역 작업에 온 섬이 동참한다. 옮기는 책은 나보코프가 말년에 쓴 『에이다』다. ‘나비의 교태’(62)가 밴 작품이라고. 옮긴이에 따르면 실화를 소재로 삼았다고 한다. 프랑스 브레아 섬에서 작가가 만나기도 했다는 영문 번역가 질 샤인Gilles Chahine. 어디선가 본 이름인 듯도 하다.


우리글 옮긴이를 퍼뜩 알아보겠는 게, 독서 중 한글사전을 몇 차례 찾았다는 점이다. ‘씨억씨억하다’(굳세고 활발하다), ‘무유撫柔’(어루만져 부드럽고 온순하게 함), ‘뚱기치다’(세차게 움직이다), ‘사계斯界’(해당되는 분야), ‘건각健脚’(튼튼하여 잘 걷거나 잘 뛰는 다리), ‘뻘때추니’(제멋대로 짤짤거리며 요리조리 싸다니는 여자아이), ‘잡도리’(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등의 단어가 꼭 필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섬 정경과 이웃들 얘기가, 한가로움과 퍽 멀게도 떠들썩하다. 조용한 섬을 느끼고 싶었다가 한 바탕 소란을 보고 나왔다. 번역 마감의 ‘두 해 여름’이다. 나보코프가 자기 작품에 품었던 자긍심과 그 번역에 대해 아주 까다로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의외의 소득이다.


그 유별난 나보코프와 번역가로 인연을 맺은 불행한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서배스천 나이트』와 『롤리타』, 『희미한 불꽃』, 『해군 본부의 작은 종루』(…) 등을 놓고 애면글면했다. 그들은 원작의 투명성과 날갯짓 소리와도 같은 미묘한 음향과 덧없이 스러지는 음악을 옮겨 보겠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금세기의 문학 언어 중에서 바람기가 가장 많고, 떠돌이 기질이 가장 강한 언어를 충실하게 옮기는 일이 어찌 쉬울 수 있겠는가? (52)



배드 블러드 NoSmoking

배드 블러드 
존 캐리루 지음, 박아린 옮김/와이즈베리

부제가 ‘테라노스의 비밀과 거짓말’이다. 테라노스는 실리콘밸리에서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작년에 사라진 바이오 기업이다. 피 한 방울로 200여 가지 검사를 할 수 있다는 신기술로 한때 기업 가치가 90억 달러에 달했다. 제2의 스티브 잡스가 되고자 했던 엘리자베스 홈즈의 민낯과 테라노스의 몰락 과정이 담겼다. 슐츠, 매티스, 머독 등 이사회 명단에 이름을 올린 유수의 인물들뿐 아니라 그 똑똑하다는 실리콘밸리의 박사들까지 희대의 사기극에 놀아났던 게 놀랍다. 이 책을 읽고 빌 게이츠가 했다는 말이 이렇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미쳤다.’(책 소개 글 중)


가짜 유니콘의 이면을 보는 게 씁쓸하면서도 어처구니없다. ‘현실 왜곡의 장’(419)을 일으킨다는 홈즈의 개인기, 즉 사람을 휘어잡는 목소리와 연설 능력, 그에 따른 정치적 인맥은 그렇겠거니 했다만 홈즈와 짝꿍 서니가 회사 내에서 조장하는 분위기가 끔찍하다. 비밀주의, 불통, 거짓말, 무조건적인 복종 강요, 공포, 협박, 따돌림, 내침. 숨기는 게 많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터다. 대대적으로 장담해 놓은 건 있고, 회사가 이룬 실제 기술은 초보적이고. 그러니 그럴 듯한 포장에 거짓에 사기에 불법까지……. 한 관계자가 내놓은 비유가 마침맞다.


“테라노스가 운영되는 방식은 버스를 운전하면서 동시에 버스를 만들고 있는 것과 같아요. 도중에 누군가는 죽고 말 거예요.” (333)


그 똑똑하다는 실리콘밸리의 박사들까지 놀아났다고 앞에 썼지만, 테라노스의 비밀과 거짓말을 알아챈 이들도 실은 그 박사들이었다.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과대망상홈즈에 홀린 이사회 영감들?) 이의를 제기했다가 잘리거나, 거짓말을 계속할 수 없어 스스로 그만두거나. 공히 기밀 유지 서약서에 강압적으로 서명해야 했다. 테라노스의 어마어마한 변호인단의 위협과 위험을 무릅쓴 제보가 있었고, 홈즈를 다룬 기사에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 솔직한 리뷰를 쓴 병리학 전문 블로거가 있었고, 끝내 탐사전문보도기자로까지 연결된다. 바로 저자 ‘나’의 출현이 323쪽에서야 이루어지는데 무척 극적이다. 물론 엉터리 검사결과로 피해를 본 사람도 존재한다. 테라노스 바보상자 아니, ‘미니랩’이 이 정도에서 멈춰 천만다행이다. 양심과 탐사보도의 힘이겠다.


실제 개발 상황을 은폐하면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제품을 과대선전하며, 결국 개발이 현실을 따라 잡기를 바라는 전략은 기술 업계에서 계속 용인되고 있다. 하지만 테라노스는 전통적인 의미의 기술회사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테라노스는 의료 기업이었다. (…) 의사들은 환자 치료의 70%를 실험실 혈액 검사 결과에 기반해 진행한다. 그들은 당연히 의료 기기가 광고된 대로 작동하기를 기대한다. 그렇지 않으면 환자의 건강이 위협받게 되기 때문이다. (429, 에필로그)





제로 K Smoking

제로 K 
돈 드릴로 지음, 황가한 옮김/은행나무


초연해라. 죽음 앞에서 울지도 못하고 위로 받지도 못했다. 돈 드릴로는 문학적으로 이미 ‘냉동된’ 이름이겠으나 생물학적 죽음을 생각해 보라기에 그렇게 한다. 죽음이라고 얘기해버렸군. 소설 속 장치는 재생, 죽음 유예, 혹은 영생이건만. 소위 냉동보존이란 거. 세계 몇몇 부자들은 벌써 가입했다는 거.


“미래에 대한 생각도 하세요? 다시 깨어난다는 건 어떤 걸까요? 똑같은 몸일 수도 있고, 개선된 몸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정신은요? 의식은 변하지 않을까요? 과연 똑같은 사람일까요? 죽을 때는 특정한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죽겠죠. 그 사람으로서. 그 이름으로 축적한 모든 역사와 기억과 수수께끼를 지닌 채로요. 하지만 깨어날 때도 그 모든 것이 그대로 있을까요? 단지 긴 밤잠을 잔 것과 같을까요?” (54)


다시 깨어날 기대를 하고 드는 깊은 잠. 안락사와 다르게 읽히지 않는데. 다를 날이 머잖아 오겠지. 제프의 아버지는 냉동인간이 되려한다. 부인을 뒤따라가는 길이다. 깊숙이 숨은 냉동보존센터는 온갖 예술형태의 비밀 전시장 같기도 하다. 냉동보존도 하나의 행위예술이라는 의미일까. 수수께끼 직원들이 등장해 연극 같은 분위기 속에서 질문들을 던진다. 그중 하나, “사람들이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내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 주는 고통 때문이 아닐까요?”(77)


내 아빠가 갑자기 소중해진 건 아니나 이번 여름 암 환자 타이틀을 달았다. 급작스런 유한성. 마음은 초조한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다보니 겉으로는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하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 이런 게 고통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냉동되겠다는 아빠였다면 어땠을까. ‘잘 주무세요.’라는 인사는 고통이 아니었을까. 단지 퍼포먼스라고 여긴다면 그저 한 줄 감상, ‘아름다운 처치였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글쎄,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해서 아직은.

 


몰아 쓰는 한줄평과 발췌문 Smoking

천국보다 성스러운 
김보영 지음, 변영근 그래픽/알마


아주 그냥 직진. 통쾌.

어쩌면 사람이 이토록 초라한가. 초월자로서의 능력도 지혜도 교양도 후광도 초능력도 거대함도 위엄도 없는 사람이, 신과 고작 단 하나의 닮은 점밖에 찾지 못한 하찮은 피조물이, 고작 그것 하나를 두고 신이 자신과 동류라는 확신에 젖어 말한다.
제 옆에 있는 가족더러 너는 그렇기에 나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겠느냐고, 너는 나보다 열등하지 않느냐고, 받아들이고 나를 경애해달라고 애처롭게 눈을 빛내며.
“역시, 신은 남자로구나.” (56-57)


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난다


판타지 로맨스잖아? 손발이 오그라드는 와중 밤새 봄.

다이옥신 같은 새끼, 미세먼지 같은, 아니, 미세 플라스틱 같은 새끼, 낙진 같은 새끼, 옥티벤존, 옥시녹세이트 같은 새끼, 음식물 쓰레기 같은 새끼, 더러운, 정말 더러운 새끼, 밑바닥까지 더러운 새끼, 우주의 가장 끔찍한 곳에서 객사나 해라…… (94-95)



더 클럽 
타키스 뷔르거 지음, 유영미 옮김/황소자리


이노무셰키들... 욕하는 사이 또 하룻밤 시간 도둑맞음.

“권력은…, 어떤 애들은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를 못해. 강해진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의미야. 알지?” (270)



검은 개 
이언 매큐언 지음, 권상미 옮김/문학동네


남편 매큐언보다 백만 배 사랑스러운 사위 매큐언.

이 못난 광기는 삼십대 중반 제니 트리메인과 결혼하면서 끝났다. 나는 존재하기 시작했다. 실비아 플라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랑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 내 안의 버려진 아이를 구조하기 위해서는 사랑할 내 자식을 갖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는 걸 배웠어야 했다. 그리고 이제 더는 부모가 필요 없어졌을 때 나는 준과 버나드 트리메인을 혼인으로 맺어진 새 부모로 맞게 되었다. (25-26)


 
피터의 기묘한 몽상 
이언 매큐언 지음, 앤서니 브라운 그림, 서애경 옮김/아이세움
 

동화에서 가장 거리가 먼 작가라고 생각했다가, 아니지, 무의식 차원에서라면 어른-아이 지름길 매큐언이지, 했다. 뭉클.

피터는 그 8월 저녁에 두 무리 사이에서 맨발로 바닷물이 찰랑이는 곳에 서서 불현듯 명백하고 무서운 비밀을 알아 버렸다. 언젠가는 자기도 바닷가를 거침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 무리에서 떠나, 앉아서 수다나 떠는 무리와 어울리게 될 것이라는. 믿고 싶지 않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피터는 다른 것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일, 돈, 세금, 수표첩, 열쇠, 커피, 그리고 앉아서 수다 떠는 일, 끝없이 자리에 앉아만 있는 일에나. (177,「어른」)



8알라딘4 술이깰때까지자시오


오리아나 팔라치 NoSmoking

나의 분노 나의 자긍심 
오리아나 팔라치 지음, 박범수 옮김/명상


유명한 이름에 비해 정작 그이가 쓴 기사나 소설 자체는 읽어본 적 없는 오리아나 팔라치(1929~2006)다. 예전에 소설 『한 남자』를 추천 받고, 절판에, 중고거래가가 너무 높아 좌절했던 기억은 있다. 작품보다 작가가 더 유명한 격이었다고 할까. 거침없고 가차 없는 기자로 명성이 높았다. 생전 글을 많이 쓴 사람임에도 우리 번역본은 너무 없는 게 조금 답답했는데,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번역되지 않아도, 번역되어도 찾아 읽을 성 싶지 않다.


처음 만난 글이 『나의 분노 나의 자긍심』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9·11을 경험하고 쓴 논평이다. 당시는 저자가 뉴욕에 살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아랍에 대한 엄청난 ‘나의 분노’ 서구인인 ‘나의 자긍심’이 대단하다. 한 마디로, 꼰대성이 놀라울 정도다. 이슬람을 테러리스트와 구분하지 않고 싸잡아 적대시하는데 내가 다 아플 지경이다. 이 사람이 글을 썼으니 망정이지 정치를 했다면 딱 독재, 본인이 희생자이기도 했던 파시스트와 그리 다르지 않았을 듯하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 다윈, 파스퇴르,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들이 예언자 마호메트의 사도들은 아니지 않은가. 그들이 무슬림들이었나? 모터, 전보, 전구 즉, 전기를 이용하는 장치들, 사진술,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것들이 이슬람 율법학자나 아야톨라 들이 발명해낸 것은 아니다. 과연 그런 자들이 그런 발명을 해낼 수 있었을까? 기차, 자동차, 비행기, 헬리콥터, 인간이 달과 화성에 가볼 수 있게 해줬고 곧 그보다 더 먼 곳으로 갈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우주선 등도 마찬가지로 이슬람 율법학자들이나 아야톨라 들이 발명해낸 것은 아니다. 틀렸는가? (124)


맞긴 하다. 하지만 당신이 한 건 아니잖은가. 왜 코페르니쿠스 등등이 ‘당신’의 자긍심이 되는지? 훌륭한 개개인들을 읊으며 그게 바로 나, 서방이라는 식의 논리는 몹시 불편하다. (그러므로 위대한 역사는 남자가 이뤘다, 와 같은 논리 아닌가.) 어떤 얼빠진 인간의 영어문장 ‘두 유 노 싸이?’가 부끄러웠던 것과 같다. 금메달은 김연아 선수가 땄고 너님이 딴 게 아니며, 김연아 선수는 그러고 보니 한국인이네, 밖에 없다. 개인과 전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상하게 이용하는 환유법인지 제유법인지의 혼란이다.


9·11에서는, 냉전시기 소련에 대항하려고 이슬람 무력집단을 키운 미국 자체를 되돌아볼 필요가 분명히 있다. 단지 ‘싸다, 싸. 미국인들은 그렇게 당해도 싸지.’(73)가 아니라, 가슴 깊이 함께 울면서도 강대국 미국이 반성의 계기로 삼았으면 싶은. 격정 혹은 분노가 가득한 글에 리듬감까지 갖춘 팔라치의 글이 통쾌하긴 하다만. 그러니까, 글재주가 뛰어나고 박력이 넘치다만. 저 박력이 말인데…… 내 생각에는 단순한 이분법 같아 보여서 유치하다. 또 내 생각이지만 이 사람이 더 살아서 더 경험하고 더 썼더라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팔라치 특성 상 이슬람=테러리스트 공식을 깰 단 한 사람을 만나보았더라면.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 
오리아나 팔라치 지음, 김희정 옮김/행성B(행성비)


팔라치가 직접 쓴 자서전이 아니고 편집자가 고른 팔라치의 문장들이다. 이게 자서전이 된다. 이러기가 어렵지 않은 게, 팔라치는 기사들에서 자기 이야기를 아끼지 않았다. 평소 입버릇은 ‘사생활 존중!’이었으나 자기가 쓴 거의 모든 기사에서 ‘나’가 주어였다. 말 그대로 편집의 힘이 고스란한 사후 팔라치다. 내가 보기엔 팔라치가 그리도 신경 썼던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그리 멀지 않을 듯하다. 그러니까, 겉핥기이자 ‘팔라치 신화’를 드높일 편집물. 책은 예쁘다만 오해하기 십상인 팔라치가 됐지 싶다. 오해라니, 음…… 글쎄 ‘이해’라는 게 있다면 말이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성공과 명성이 아니라 고독이다. 고독은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그 자신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혼자 있을 수 없다. (159)


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 
산토 아리코 지음, 김승욱 옮김/아테네

비로소 팔라치를 본 듯하다. 평전이 필요한 이유다. 자기 스스로가 취할 수 없는 앵글이 평전에는 분명히 있어서, 팔라치가 만족할 지점은 물론 불편해할 지점도 공존한다. 거두절미하고 팔라치는 이런 사람이다, 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썼더니 팔라치는 저렇게 방어하더라, 식이다. 그런 덕에 균형 잡혔다는 느낌이 든다. 저자가 인터뷰를 하면서 만났던 팔라치와, 다른 이가 팔라치와 인터뷰한 에피소드, 팔라치 자신이 쓴 인터뷰 기사와 소설작품들까지 망라한다. 책이 두툼한 만큼 충실하다. 특히 로버트 쉬어라는 인터뷰어가 팔라치의 평소 인터뷰 스타일을 그이에게 고스란히 돌려주는 일화가 인상적이다. ‘그는 상대를 몰아붙이는 그녀의 인터뷰 스타일을 완벽하게 이용했다.’(246)


쉬어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팔라치는 동성애자들을 여러 번 더 공격했지만, 대화가 끝날 무렵에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면서 그 말들을 지워달라고 요청했다.
(…) “잠깐만요. 지위 높고 힘 있는 사람들이 취소하고 싶어나는 말을 그대로 발표해온 오리아나 팔라치가 우리더러 자기 말을 지워달라고 요청하다니…. 당신이 자유주의자처럼 보이게 하려고 우리 질문이나 당신 답변을 손질할 수는 없습니다.”
“굳이 그 말을 발표하겠다고 고집하는 건 전제적이고 파시스트적인 행동이에요.”
“전제적이라니요. 그 말을 발표하지 않는 게 기자로서 한심한 일이 되겠죠. 당신이라면 그런 짓을 절대 하지 않겠죠?” (238-239)


글쟁이, 연극성 인격, 나르시시스트. 팔라치에 대한 내 생각이 그리 흘러갔다. 나, 나, 나, 오직 나. 항상 내가 주연. 자아표출이, 넘치는 문학성과 만나 기사와 소설을 낳았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엄밀한 객관을 장담할 수 없다면, ‘이른바 객관성이라는 것이 위선이거나 주제넘은 가정이라고 생각’(125)한다면, ‘나’를 내세우는 게 유일한 답일지도 모르겠다. 팔라치가 이룩한 ‘문학적 저널리즘’이다. 유명 배우와 정치인 인터뷰를 거쳐 지구 곳곳의 전장(戰場)과 미국 우주비행사들 기사에 이르기까지, 알레코스와의 사랑과 소설작품에 이르기까지 ‘나’가 빠지지 않았던 뼛속 글쟁이 팔라치다. 많은 유명인들이 두려워하고 이용하기도 했던 언론인. 이미 써놓은 ‘나’가 너무 많아 따로 자서전이 필요 없었을 이라서 ‘그녀’로 지칭되는 이 평전이 소중해 보인다.


생각하는 여자는 위험하다 
슈테판 볼만 지음, 김세나 옮김/이봄

첫 꼭지가 1960~80년대 '전 세계에서 가장 센 인터뷰 기자'(22) 팔라치다. 이란의 팔레비 왕과 혁명 이후 아야톨라 호메이니, 그리고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와의 인터뷰 일화가 짧게 실렸다. 15쪽 남짓에 담긴 인생. 겉핥다 생긴 갈증은 위 평전으로 갈음하시길 바란다. 이 책은 고퀄 사진 보는 맛으로만 긴요하게.


“(…) 이슬람주의는 새로운 파시즘이다.”
이에 대해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오리아나 팔라치의 거친 용기와 다른 사람들이 침묵한 것에 대해 입을 여는 단호한 결단력은 결코 폄하할 수 없을 것이다. (33)




0804 술이깰때까지자시오

 

며칠 서울이 텅 빈 느낌이라면, 제가 없어서입니다. (? 더위 먹+튀) 놀러갑니다. 멀리도 안 가면서 오래도 안 가면서 돌돌이를 끌고 가기로 합니다. 휴가 기분 나고 좋잖아요. 인천공항을 거치는데 뱅기는 타지 않습니다. 녹색 광선 볼지도 몰라요. 아이스박스에는 고기를 사 넣을 겁니다. 코르크 따개와 허브소금도 챙겼어요. 본 바캉스.


1 2 3 4 5 6 7 8 9 10 다음


moon

CURRENT MOON

뉴스타파

알라딘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