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 사람 + 식스웨이크 Smoking

그림자로부터의 탈출 - 8점
야누쉬 자이델 지음, 정보라 옮김/아작

 

“아빠! 하지만 진실은 하나라고 항상 말씀하셨잖아요.”
“현실에서는 두 개나 아니면 더 많이 필요할 때도 있어.”
“하지만 정말 진짜 진실은요? 하나뿐이죠, 그렇죠?”
“하나지.” (89-90)


‘프록스 외계인들이 소비에트의 은유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272)는 역자의 설명이다. 폴란드 작가 야누쉬(야누슈) 자이델의 작품에서 외계인에 점령당한 인간의 생활상은 그러므로 전체주의 색채를 띤다. ‘진실은 하나뿐’이지만 여러 개의 진실이 필요한 현실이라면, 내게도 낯설지가 않다. 대학교 들어가서야 진상을 알 수 있었던 제주4∙3사건, 3∙15부정선거,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쉬쉬하는 어른들은 어찌나 잘 쉬쉬했는지 나 자신 어른이 되고서야 머리에 뭔가를 넣는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아이들에게 쉬쉬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을 보면 그래도 약간은 나아졌나 싶기도 하다. 독재 향수를 그리워하는 어떤 무리가 다시 드리우려 하는 ‘그림자’가 없지 않다만, 중요한 것은 저들의 수준 낮은 짓거리들이 불러일으키는 정치혐오에 빠지지 않는 것일 게다. 궁금증, 호기심이 없어지는 순간 꼰대가 돼... 정치 무관심이 정알못보다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그림자로부터의 탈출>이 성장소설이자 정치소설이라 여겨지는 이유이기도 하고. “예전에는 세상이 이렇게 이상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걸 짐작조차 못 했어요.”(232) 호기심에서 비롯한 팀의 ‘개안’은 말 그대로, 성장이자 정치입문과 다르지 않으리라.


“그게 어른이 되어간다는 징후야.” 스타브착이 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속도로 어른이 되지는 않지.”
“어떤 사람들은 절대 성장하지 못하고.” 밀트가 덧붙였다. (232)


사람의 아이들 
P. D. 제임스 지음, 이주혜 옮김/아작

 

자식을 잃은 부모처럼 우리도 보편적인 애도의 분위기 속에서 상실감을 일깨우는 고통스러운 물건들을 모조리 치워버렸다. (…) 아스팔트를 깐 놀이터도 작은 공동묘지처럼 잔디로 덮거나 꽃을 심어버렸다. 장난감은 전부 불태웠다. (…) 이제는 오직 오디오테이프와 레코드를 통해서만 어린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영화나 TV프로그램에서만 밝게 뛰노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모습이 못 견디게 괴로워 못 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마약을 하듯이 어린아이들의 영상을 보면서 살아간다. (22)


또 하나의 세상 종말 모습이다. 출생이 없는 경우 되겠다. 대단치도 않은 이 세상을, 그나마 이어 조금이라도 대단하게 만들어 줄 후세가 없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아포칼립스일 거다. 아포칼립스라고 쓴 김에 덧붙이자. 주인공 이름이 ‘테오’인 것만 보아도 종교적인 느낌이 처음부터 들더니…… 종국에도 그렇다. 다만, 오메가에서 알파로. 종말에서 희망으로. 임박한 종말 속에서도 한 자락 희망을 위해선 (독재 아닌) 권력 쟁취가 중요함을 빼먹지 않은 점은 약간 고마울 정도로, 세례니, 기도니 하는 ‘교회누나’ 느낌이 넘친다. P. D. 제임스를 알폰소 쿠아론은 어떻게 해석했을지 영화가 보고 싶어지는 원작 <사람의 아이들Children of Men>이다.



식스웨이크 - 10점
무르 래퍼티 지음, 신해경 옮김/아작


클론들이 탄 우주선이 설정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영화 <더 문>이 있었고 <아일랜드>와  <나를 보내지 마>도 있었지만 그것들을 소화하고, 넘어선다. 집필 년도 뿐 아니라 배경 년도로도 훨씬 훗날인 만큼의 월등함일지도 모르겠다, 고 하면 무르 래퍼티 님께 미안하겠구나. 엄청나게 쌈박한 ‘클론물’이다. <SF는 인류 종말에 반대합니다>에서 본 바,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기반으로 하여 2017년 실제로도 유럽연합의회에서 인공지능을 법인격으로 인정한다고 선언했다던데, 무르 래퍼티의 2282년에는 클론 국제법이 제정되어 있는 형편이다.


‘클론의 존재 관리를 위한 보충 조항에 관한 국제법’에 따르면 ‘1. 개인의 클론을 동시에 두 개 이상 만드는 것은 불법이다. 각 클론은 하나의 개인이다. 클론 복제 기술은 개체의 증식이 아니라 생명 연장을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11) 이런 법 신나. 신나고 가뿐하고, 거기 있고 싶을 정도로 흥미진진하여 궁금해지는 미래다. 아울러 “하지만 우린 해결할 거야. 우리에게 시간은 많으니까.”(494)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의 레종데트르란 것도 생각해보게 되고……. 이상하게 좀 슬퍼지기도 한다만. (훌쩍) 밀실추리, 스릴러 요소를 다 가진 SF. 근래 아작 중 최고잼.


“여기서 죽는 게 두려워? (…)”
“약간 두려워.” 히로가 말했다. “하지만 그러니까, 때가 됐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 있지? 우린 모두 오랫동안 살아왔지만 사실 세상을 더 좋게 만들진 못했어.”
“그게 목표야?” 멀리서 들리는 듯한 미노루의 목소리에는 놀라움이 서려 있었다. “그게 네가 클론이 된 이유야?”
“아니.” 히로가 말했다. “내가 처음에 클론이 되고 싶었을 때는 고상한 목적 같은 건 없었어. 하지만 갑자기 수백 년의 시간이 있었는데도 그다지 많은 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지.”
“하지만 넌 저 모든 생명들, 저 인간들과 저 클론 백업들을 책임지고 있어.” 미노루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그건 고상해.” (471-472)





SF 크로스 + 인류 종말에 반대합니다 NoSmoking

SF 크로스 미래과학 - 8점
김보영 외 지음, 허정은 그림/우리학교


서지분류 교양과학이라 SF작가들이 쓴 에세이일 줄 알았다. 웬걸. 아주 짧은 소설들이 한 가득으로, 예상치 못했던 보물 상자다. 감각확장이나 인공신체, 인공지능, 로봇, 빅데이터, 우주 등등 주제별로 묶인 작품들이 무척 사랑스럽다. 해설 하리하라 님에 지은이는 김보영, 김창규, 곽재식, 박성환 님. 이 작가들이 동시대에 있어 뭐랄까, 참 행복하다. 널리 많이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발췌문은 김보영 작가의 「또 하나의 가족」에서 가져온다. 인간 아기를 돌봐주고, 인간 장애를 보완해주며 평생 친구, 가족이 되는 로봇 얘기다.


“어른들은 주노처럼 착하지 않아요. 어른들은 아이들을 야단치고, 때리고, 괴롭혀요. 주노는 그러지 않아요. 주노는 한결같아요. 어른들은 한결같지 않아요. 어른들은 아이들을 귀찮아해요. 주노는 날 귀찮아하지 않아요. 주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받아 주지만 어른들은 그렇지 않아요. 주노가 로봇이든 인간이든 무슨 상관이에요? 나는 늘 누군가에게 지지받고 보호받는다고 느껴요. 그게 나를 강하게 해요.” (154-155, 김보영,「또 하나의 가족」)

 
SF는 인류 종말에 반대합니다 - 8점
김보영.박상준 지음, 이지용 감수/지상의책


<SF 크로스 미래과학>이 주제별 단편들 모음이라면 <SF는 인류 종말에 반대합니다>는 장편 ‘형식’을 빌린 SF+과학 설명서다. 등장인물만 보아도 SF작가 지망생, SF덕후, 천재 공대생, 미래에서 온 로봇, 문화부 기자, 영화제 스태프다. ‘밤샘 고전 SF 단편 영화제’에서 만나 벌이는 하룻밤 토론이다. 토론 주제로, (종종 그렇듯 나는 몰랐지만) 책 기획 과정에서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수집했단다.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어떤 질문을 던졌을까. 곰곰…… 과학이 더 발전하면 인간성, 이 보잘것없는 인간다움이 만들어온 나쁜 것들 예컨대 차별, 불평등이 사라지게 될까요, 정도? 음. (종종 그렇듯 나는 몰랐지만) 좋은 기획. 귀여운 구성. 보아야 할 SF 작품 목록이 느는 점도 미덕(?주의!)인 교양과학서, SF는 인류 종말에 반대합니다다.


<흉폭한 입> 고마쓰 사쿄, 1969
《토탈 호러 1》에 수록된 이 소설은 자기 자신을 먹어 치우는 사람의 이야기야. 그 사람은 자신의 다리, 팔, 내장을 기계로 바꾸며 하나씩 먹어 치우다가 결국 뇌까지 먹어 치우지. 마지막에 그 사람은 기계 부품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그럼 그 사람은 어느 시점까지 사람이었을까?
《바이센테니얼 맨》아이작 아시모프, 1976
《바이센테니얼 맨》에서 주인공 앤드류는 인공두뇌에 충격을 받고 창조성을 갖게 된 로봇이야. 이 로봇은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자신이 왜 인간으로 대우받을 수 없는지 고민하다가 자신의 부품을 하나씩 유기 물질로 교체하기 시작해. 그러다 결국 200세 생일에 자신이 인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며 죽음을 맞이하지.
자, 그럼 앤드류는 어느 시점까지 로봇이었고, 어느 시점부터 인간이었을까? (36-37, ‘상덕의 SF Talk!’)





바닷마을 다이어리 1+2 Smoking

 

 

얼마 전에 9권 완결판이 나왔기에 <바닷마을> 시리즈 비로소 보기 시작한다. 제목만으로는 마냥 풋풋하고 귀여울 줄 알았는데, 무척 멋지잖아. 일본판 ‘작은 아씨들’이라 해도 되겠는 이야기다. 그것도 내가 늘 부러워하는, 오래된 동네 크고 낡은 옛집에 사는 네 자매. 그러니까 이십대 세 명과 새로 합류한 십대 한 명이 주인공이다. 각자 현명하거나 생활력 있거나 엉뚱하거나 조숙한 애늙은이. ‘오래된 동네’라고 하면, 이웃이 서로 다 알고 거의 학교 선후배로 엮여 있어서 누구누구 언니, 누나, 형, 이모, 할머니 등으로 부르는 관계를 말함이다. 때로는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겠으나 (나처럼) 때로는 편하고 느긋하고 부러운 관계다. 가져보지 못해서. 무엇보다, ‘바닷마을’이라잖아. 맛만 보고 말까 했는데 3~9권 모두 보관함에 들어갔다. 주인공 비롯하여 동네 사람들 각각 개성과 취향을 알게 된 이상 이들의 성장과 변화가 궁금해졌어. 근데 이상하지. 다 보기도 전에 벌써 아련해.

1권 136쪽 매실주 컷



2권 30쪽 아가씨 탈을 쓴 아저씨 컷

 


창백한 불꽃 Smoking

창백한 불꽃 - 10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문학동네


(‘임시 저장 글’ 방출3. 알라딘 리뷰와 동일) 0. 이런 시치미 뚝 작가 같으니. 머리말 읽고 나서 재미 삼아 위키백과에서 ‘젬블라’ 검색해봤다. ‘머나먼 북쪽의 나라. 예전 왕정국가. 1915년에 태어난 카를 친애왕의 마지막 통치 기간 1936~1958년을 끝으로 젬블라공화국이 됨. 외국으로 도피한 친애왕은 1959년 암살자 그라두스에 의해 살해될 뻔 했다가 가까스로 모면함. 이후 행적은 묘연하나 소문은 무성하여 러시아 망명 작가가 됐다는 설, 영화를 제작한다는 설, 연극연출가로 활동한다는 설, 젬블라로 귀환했다는 설, 정신병원에 수감됐다는 설 등이 있다’고 되어 있다. (거짓말이다. 젬블라를 치면 ‘젬피라 람자노바’로 바로 잡아 찾아준다. 젬피라 람자노바는 ‘러시아 록그룹 젬피라의 리더’다. 그러니까 젬블라는 나보코프의 ‘몰바니아’다. 실로로 님, 보고 계신가.)


시인 존 셰이드가 있고 주석자 찰스 킨보트가 있다. 시인은 죽었고 주석자는 살았다. 살아남은 이가 유고시(詩)에 머리말, 주석, 색인을 달아 출판했는데 그게 소설이다. 시는 아름답고 주석은 장황하다. 평론가인양 온갖 무게는 다 잡아놓고, 이런 거짓말쟁이 사기꾼 미치광이 과대망상 전직 왕 주석자 찰스 킨보트를 보셔라. 아아, 그에 비하면 나의 실로로 님은 얼마나 소박한지! 소설도 아니고 무려 여행에세이로 분류되어, 지금은 그나마 품절인 명작 저자 (중 한 명) 이시다.


돌아와서, 1. 거짓말쟁이 사기꾼 주석자 킨보트에 대해. 믿을 수 없는 화자가 펼쳐놓는 이야기를 읽을 때 어떠신지. 화자의 장황설에 비해 화자가 무심히 지나치는 주변인들의 작은 행동이나 대사가 오히려 힘을 갖는다. 실상은 이렇다는 힌트 같은 것. 화자에 완전히 의존하지 말고 상황을, 전체 그림을 보라는 식의 안전한 거리감을 선사 받는 느낌이다. 목소리는 하나이나 다성곡(多聲曲)이 되는 셈이다. 주성(主聲)이 알고 보면 끊임없이 다른 곳을 가리키려 하는 장치로 등장, 끝내는 어리둥절해하는 독자를 보고 말겠다는 작가의 의지랄까. 자신이 셰이드 유작 주석자로서 유일하게 적합한 절친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시인의 정서본을 획득하는 공교로운 사건까지, 존재유무를 알 길 없는 이문(異文)과 젬블라어 번역을 덕지덕지. 독자를 희롱하거나, 평론가를 풍자하거나 하여튼 성공한 어리둥절함이다. 진짜인 척 쌓아올린 시종 허구, 그야말로 성공한 ‘소설,’ 그것도 끝내주게 재미있는 추리물이 되어 버린 주석서다.


2. 미치광이 과대망상 이웃 킨보트에 대해. 무섭다. 그러면서 조금은 안쓰럽고 우습다. 노시인에 대한 존경은 순수하나 정도가 집착 수준이어서, ‘작업 중인 그가 보고 싶어 달뜬 욕망은 말도 못하게 괴롭고 통제할 수도 없어서, 자존심은 생각지 않고 몰래 엿보는 데 온 정신을’(112) 쏟는다. 건물 동서남북으로, 그리고 창문을 통해서 시인을 관찰하는 모양새가 어찌나 집요한지 잠시 동안은 알랭 로브그리예가 온 줄 알았다.


그 집의 남쪽 면을 보고 싶으면, 우리 집 차고 뒤쪽으로 내려가 튤립나무 뒤에 서서 활 모양으로 휜 내리막길 도로 너머로 환히 불 밝힌 소중한 창문들을 바라보면 되었다. 그는 그 창문들에 블라인드를 치는 법이 없었다(그녀는 항상 가렸다). 반대편을 보고 싶으면, 나의 경호원인 검은 노간주나무들이 별과 불길한 전조, 아래쪽 도로의 외로운 가로등이 드리운 창백한 불빛 한 조각을 감시하며 서 있는 우리 집 정원의 제일 높은 곳까지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면 되었다. (113, 강조는 나)


아니나 다를까 ‘블라인드’는 로브그리예 <질투>의 원제 ‘La jalousie’ 단어가 갖는 세 번째 뜻이다. 블라인드 틈을 통해 부인을 집요하게 관찰하는 남편의 시선이 따갑던 작품 말이다. ‘(그녀는 항상 가렸다)’까지 넣은 걸로 보아, <창백한 불꽃>(1962)보다 몇 년 앞선 <질투>(1957)를 오마주한 게 아닐까 한다, 는 말은 나의 주석이다. (세상에는 믿을 수 없는 화자만 있는 게 아니라 미덥지 못한 독자도 있는 법.) 또한 셰이드가 쓰는 시에 자신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망상이 곳곳에 드러난다. ‘6월 중순경 마침내 나는 내 머릿속에서 타오르는 찬란한 젬블라를 그가 시를 통해 재창조하리라고 확신했다.’(104) 결과물을 보고나서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된 후에도 응, 아니야, 응, 하지만 여전히 그래. 자위하고 자족한다. 어디에서? 어김없이 ‘시 속 여기저기에서, 무엇보다 특히 가치를 따지기 어려운 소중한 이문들에서.’(366) 누구도 확증할 수 없는 그 이문들 말이다. (-->1. 거짓말쟁이 사기꾼 주석자 킨보트 참조)


3. 전직 왕 킨보트에 대해. 젬블라의 혁명을 피해 국외 도피했다. 문학애호가. 옷장에서 비밀 통로를 발견한 걸로 보아 판타지물 꽤 읽었을 듯한데 고전에 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자랑한다. 자신이 젬블라어로 번역하던 미국 시인을 곁에 두게 된다. 전직 왕답게, 모든 게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한다. (-->2. 미치광이 과대망상 이웃 킨보트 참조) 또한 전직 왕답게, 줄곧 암살의 표적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암살자 그라두스를 너무나 외롭게 내버려 둔 듯하나, 미덥지 못한 독자가 아직 읽지 않은 독자의 재미를 빼앗아 버릴 수는 없겠다.


미덥지 못한 독자가 재미 삼아 검색해본 젬블라가 러시아를 은유하는가. 글쎄. 위키백과의 친절한 수정으로 젬피라를 알게 된 건 기쁘다. (더불어 다시 한 번 몰바니아 안내서도 추천하는 바다.) 노시인 셰이드는 나보코프 자신이기도 한가. 글쎄. 프로콜 하럼의 ‘A Whiter Shade of Pale (Fire)’은 창백한 불꽃Pale Fire의 시인 셰이드Shade를 오마주한 노래다. (거짓말이다. 미덥지 못한 독자가 좋아하는 노래일 뿐. 제목의 Shade와 Pale이 <창백한 불꽃>과 연관된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각 잡고 독자를 놀려보리라는 나보코프에 반하기는 했다. 어때, 이래도 재미없어? 곳곳에 숨겨놓은 수수께끼는 다 찾았나? 하듯, 사랑하는 시인을 만들고 아름다운 시를 만들고 저물어가는 왕정국가와 혁명을 만들고 마지막 왕을 만들어 꼼짝없이 놀려먹으려는 현란한 글 솜씨에는 그래, 놀아나야 하는 거다. 두 번, 세 번, 놀아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듭 새로 놀아나기 위해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번역이 얼마나 까다로웠을지 상상도 못하겠다. 비록 미덥지 못한 독자이지만 일개 독자의 처지여서 이렇게 행복할 수도 없다. (스파시바.) 해설에서 옮긴이가 거론해준 베라 나보코프의 번호 붙인 편지글이 나는 참 좋던데. 젬블라에 대한 부연 설명을 요구하는 출판사에 보낸 거절 답변, 그 중에서도 7번이 이렇다.


그리고 아마도 이 제안은, 책의 가장 마지막 줄이자 가장 결정적인 줄, 중단된 미완성의 삶을 암시하며 녹아서 사라져가는 지평선, “젬블라, 머나먼 북쪽의 나라”, 시행이나 주석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는 이 마지막 줄에 가장 참담한 영향을 줄 것입니다. (429)


하여, 미덥지 못한 독자 주제에 장난기까지 발동하여 몰바니아 안내서 못지않은 젬블라 안내서를 써보려다 그만둔다. 문화면에는 이런 게 자리할 뻔. ‘젬블라의 국민가수는 젬피라 람자노바다. 머나먼 북쪽의 나라 젬블라를 검색하면 늘 등장하는 대표 얼굴로, 잊힌 마지막 왕 카를의 행적에 대해서는 관련어 나보코프로 안내한다.’ (-->0. 이런 시치미 뚝 작가 같으니 참조)


너는 여기에 없었다 Smoking

너는 여기에 없었다 - 8점
조너선 에임즈 지음, 고유경 옮김/프시케의숲


('임시 저장 글' 방출2) 단도직입 망치 맛 박력이다. 구구절절 없이도 조의 과거와 이력이 꿰어지고 아동 강간범 ‘해결사’인 현재 모습이 납득된다. 곁다리 없는 진행에, 후속편이 나오기도 좋을 결말까지. 경제적인 140여 쪽이다. 와중에 조가 올버니로 가는 기차를 타는 장면은 무척 반가웠는데. ‘선로 왼쪽으로 보이는 허드슨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하늘보다 더 선명한 푸른 물결과 저 멀리까지 길게 뻗은 강둑, 빽빽하게 우거진 숲이 황폐한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옛 정취를 풍겼다. 이 강이 수천 년 동안 어땠었는지 감히 상상할 수 없으리라.’(108) 월터 앨버레즈가 ‘수천 년’ 아니라 수억 년 지질역사를 들려주며 짚었던 허드슨강과 팰리세이즈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우연으로, <이 모든 것을 만든 기막힌 우연들> 165쪽을 첨부한다.


하지만 조에게는 이 모든 게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만 바라보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는 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복수를 해본 적 없는, 분노로 가득 찬 소년이었다. 조와 같은 아이에게 꼭 필요했던 복수. 물론 필요한 게 늘 복수였던 건 아니다. 때때로 그건 정의였다. (108-109)


 

작가의 책상 NoSmoking


작가의 책상 - 8점
질 크레멘츠 지음, 박현찬 옮김/위즈덤하우스


('임시 저장 글' 방출) 질 크레멘츠 사진+존 업다이크 서문이다. 작가가 찍힌 사진들은 늘 보기 좋다. 신비한 아우라, 이상하게 포토제닉한 존재들. 사진과 함께하는 텍스트에는 글쓰기 버릇이나 의식이 짧게 담겼다. 자기 공간 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아름답고 편안해 보이는 작가들이다.



인물의 배경과 자세는 제각각이지만, 질 크레멘츠의 사진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평화로워 보인다. 결국 글쓰기란 속 깊은 위로이자 생각의 정리이며 동시에 영혼을 정화하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책상 구석구석, 그 모든 작업 공간에 행복이 스며있다. 책상은 개념을 낳는 순결한 침대다. 그곳은 늘 흐트러져 있으며 따뜻하다. (12, 서문, 존 업다이크)


 

P. S.
며칠 전 미장원에서 염색하는 동안 책을 꺼내 읽었더니 실장님이 말했다. “책 읽는 사람 처음 봐요. 혹시 작가세요?”
“아니오.” (‘작가’ 아니고 ‘독자’라고 덧붙이지는 않았다.)
어제 누전 검사로 불려와 순식간에 11만원을 벌어간 전기 기사님이 말했다. “웬 책이 이렇게 많아요? 작가세요?”
“아니오.” (이 기사님은 내게 심지어 의사냐고도 물었다. 왜지?ㅋㅋㅋㅋ ‘독자의 책상’은 찍지 않았다.)

 


달나라에 사는 여인 Smoking

달나라에 사는 여인 - 8점
밀레나 아구스 지음, 김현주 옮김/잔(도서출판)


개정판이 나왔고, 구판으로 본다. 원제 Mal di pietre. 돌pietre은 몸 안에 생기는 결석(結石)을 말함이렷다. 몸 안에 돌 대신 아기를 갖고자 했던 사람, 화자의 할머니다. 예전에는 결석 치료를 위해 온천요법을 취하기도 했을 터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온천 요양 중 사랑에 빠지기도 했겠고. 전설 같은 그 연가가 ‘나’에게까지 전해지기도 하는 법. 글재주와 상상력이 뛰어났던 할머니의 재능은 ‘달나라에 사는 여인’ 즉 미친 사람이 되게 했다. 할머니의 사랑 혹은 상상력. 또는 그 둘 사이 차이 없음…… 이라고 써도 되는 걸까.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질문을 하는 듯도 한, 상상과 실재 사이의 옅은 막이다. ‘식스 센스 급 반전’이라고 누군가 썼던데, 음. 그러하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사랑을 했고, 브루스 윌리스는 귀신인 거다.


할머니는 사랑은 참 이상하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사랑은 스스로 찾아올 마음이 생기지 않는 한 아무리 침대에서 뒹굴거나 착하고 친절하게 굴어도 다가오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랑을 어떤 방법으로도 오게 할 도리가 없다는 게 참 이상했다. (31)


구판은 이렇게 생겼음+소주콜드브루

 


다섯 번째 계절 Smoking

다섯 번째 계절 - 8점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황금가지

 

“오로진이 펄크럼을 세웠다. (…) 날 때부터 갖고 있는 이 재능을 갈고 닦을 수만 있다면 우리 종족이 얼마나 대단하고 엄청날 수 있는지 알아낸 사람들이다.”
“그건 저주지 재능이 아니에요.” (653/728)


조산(造山), 즉 땅을 움직이는 능력이 ‘저주’이기도 하고 ‘재능’이기도 한 이야기. 멸시 받던 이들이 ‘다른 이들과 마땅히 동등한 존중을 받기 위해 투쟁하는’(5/728) 이야기. 탄탄한 세계를 (대지는 불안정하지만) 만나고 보니 후속 두 편도 기대하게 되는 시리즈 <부서진 대지> 1편이다. 크레마마 님 분량으로 728쪽이라는 길이가 주는 효과가 분명히 있어서, 나쁜 놈인지 착한 놈인지 막론하고 오랜만에 누군가를 다시 만나는 장면들에서는 울컥울컥 한다. 또한 줄곧 ‘너’라고 하다가 처음 ‘나’가 등장했을 때의 놀라움은 몹시 크다. 마침 TTS로 듣고 있던 순간에 그 일을 당해서 더했을 수도 있겠다. 여기였지 싶은데,


모든 죽음이 끝을 맺고 오벨리스크가 잠잠해졌을 무렵, 저 바다 위에 살아남은 이들은 한줌도 되지 않는다. 그중 한 명, 한 여자가 난파선의 잔해 속에서 의식을 잃고 떠다니고 있다. (…)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그녀를 발견했으니까. (…)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들을지어다. 배울지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변해 가는 방식이다. (693-694/728)


한 세계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 저주 혹은 재능, 권력 혹은 관계를 보기 위해 새로운 용어와 호칭을 받아들인다. 오로진, 로가, 보님, 스톤이터…… 제미신 월드다. 작가를 포함해서 독자까지도 이 관계나 권력 구조, 존중과 멸시를 잠깐씩은 이승,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 대입해볼 터. 다른 말로 ‘정치적’이라는 말을 가져오자면, 피부색과 성별에 따른 그것이겠다. 2015년 <삼체>(대단한 작품이긴 했다) 사건* 이후 휴고 상이 잠시 앗 뜨거워, 하고 있는 중인지는 몰라도 분명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갈 수밖에는 없을 거다. 쓰는 사람이, 읽는 사람이 모두 밝은 색 피부 남자는 아니기에. ‘이것이 바로 세상이 변해 가는 방식이다.’




*중국 작가 류츠신의 『삼체』가 휴고 장편상을 수상했던 2015년 이야기를 해볼까요? 중국 SF의 저력을 보여준 결과였지만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류츠신 자신도 “올해는 휴고상의 60년 역사상 가장 유감스러운 한 해”라고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휴고상이 제대로 작동되었다면 이 상은 류츠신이 아닌 사라 모넷의 『고블린 엠퍼러』가 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한마디로 말해 사보타주당한 것입니다. 복스 데이Vox Day라는 극우주의자가 이끄는 새드 퍼피즈라는 팬덤이, 여성 작가들이 휴고상을 오염시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면서 표를 조직화했던 거죠. 『삼체』와 『고블린 앰퍼러』의 표 차이는 200표, 새드 퍼피즈가 조직화한 표는 500표.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이들은 여자 작가에게  휴고상을 넘겨주느니 차라리 동양인 남자가 상을 타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겁니다.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124-125)


로켓 컴퍼니 Smoking

 


http://aladin.kr/p/71erG

 

재사용 로켓 제작 과정이 담겼다. 자금 확보부터 이사, 엔지니어 등 구성원 조직, 사업 계획, 프리젠테이션, 장비 개발, 시험 발사…… 소설이라지만 거의 엔지니어 용 실용서 수준이다. 전문가의 번역이 미안하고 고마워서 띄엄띄엄 팔랑팔랑 넘겨보며 까만 건 글씨요, 하얀 건 종이이겠거니, 했다. 이 책으로 인해 독서 의욕이 뚝 떨어진 나와는 달리 재미있게 읽으실 독자께는 존경을 표한다. 흰 종이 까만 글씨를 대신해 유튜브로 도망가면 스페이스X의 팔콘 헤비 로켓 발사+착륙 장면이 있다. 착륙지점으로 돌아와 안착하는 게 어찌나 ‘가뿐’하던지! 눈물이 절로+책 덮고 <스타 퀘스트> 보스토크호 칠했다.


발사체는 225톤이 넘는 추력을 사용해서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상승했다. 엔진의 굉음이 발사대로부터 2.4킬로미터 떨어져 있던 우리에게 도달하는 데 7초가 걸렸다. 이 7초 동안 발사체는 이미 105미터를 올라갔다. 탄소 성분을 품은 과산화수소와 프로판의 연소 가스는 밝은 노란색을 띠었으며, 주엔진이 고도 30킬로미터 근처나 이륙 후 84초 만에 정지될 때까지 두꺼운 비행운이 발사체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519-520/652)





푸른 알약 NoSmoking

푸른 알약 
프레데릭 페테르스 글.그림, 유영 옮김/세미콜론

 

“무엇보다 제가 두 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건, HIV는 감기처럼 마구 전염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이 빌어먹을 것이 꽤 까다롭게 굴거든요.” (118)


<감염된 독서>를 읽다가 감염되어 사 두었던 <푸른 알약>이다. 푸른 알약은 에이즈 치료제다. 에이즈 보균자와의 커플 생활이 담겼다. 작가의 솔직한 심정이 그려진다. 두려움도 있었겠지만 가장 힘든 건 세상의 편견이었겠다. 바로 그래서 해당 책을 그린 것이겠고. 약이 점점 좋아지고 있는 만큼 에이즈는 이제 ‘다스릴’ 수 있는 병으로 여겨도 좋을 듯하다. 증보판으로 보길 잘했지 싶다. 본문 이야기 이후 사연이 부록으로 달렸다. 선물처럼 기쁜 후기 열네 쪽이다. 세 살 꼬마가 열여섯 살이 됐고, 깜짝, 예쁜 녀석이 하나 등장한다. 이후를 알려줘 고맙다.


우선, 이 바이러스는 피와 정액 속에 집중적으로 들어 있어요. 이 점이라면, 두 분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겠네요. (…) 그 외에도 많은 조건들이 맞아야 하고, 또 두 분이 아주 불운한 경우라야 하니까요. 하지만 보다시피 부인의 건강 상태도 좋고, 혈액 속에 바이러스 농도도 약하고 또 선생의 성기도 양호한 걸로 보아 페테르스 씨가 에이즈에 걸릴 가능성은, 이 방을 나갔을 때 흰 코뿔소와 마주칠 가능성쯤으로 보시면 되겠네요. (1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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