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책+바다 한가운데서+모든 것은 빛 NoSmoking

사악한 책, 모비 딕 - 10점
너새니얼 필브릭 지음, 홍한별 옮김/저녁의책

 

사악한 책을 한 권 썼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린양처럼 순진무구하다고 느낍니다.” (1851년 11월 멜빌이 호손에게 쓴 편지. <모든 것은 빛난다> 257, 강조는 나)


멜빌, 포경업, 그리고 19세기 초반 세계 고래잡이 산업 중심지였던 낸터킷 섬 전문가 너새니얼 (호손 아니고) 필브릭이 썼다. 어떤 소재를 취하는 자격 같은 게 있다고 할 수야 없지만 필브릭 만큼 마침맞은 저자가 없겠다 싶은 ‘모비 딕 읽기’다. 작고 빼곡한데다 존경과 애정이 넘친다. <모비 딕> 안과 밖을 넘나들며 전해주는 이야기가 유익하고도 흥미롭다.


소설 밖 얘기로는 멜빌과 호손 사이 친분 및 편지왕래 사연이 특히나 좋은데, 저자 필브릭 역시 ‘나는 독자들에게 『모비 딕』만 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을 만들어낸 개인적 예술적 힘을 이해하려면 이 편지들을 꼭 읽어야 한다.’(111)고 쓴다. 두 작가 사이 성격과 태도 차이가 얼핏 보아도 삐그덕. 이런 표현 어떨지 모르겠는데, 멜빌은 개 같고 호손은 고양이 같다. 개가 귀찮게 하면 고양이는 놀아 주기는 하나 개가 귀찮게 굴지 않으면 더 만족하는 격이라고 할까. 아무튼 이상하게 호손에 대한 관심이 더 인다. 내가 고양이파라서 그런 모양이다.


미국 포경산업의 흥망성쇠와 멜빌의 선상 경험, <모비 딕> 모티브가 된 에식스호 난파 등이 소설 밖 얘기라면 소설 속 등장인물들 설명도 충실하다. 원작 장면과 발췌문장 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훌륭한 서평을 이룬다.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을, 신이 나서 소개하고 자랑하는 느낌. 원작을 읽지 않은 이가 보기에(도) 전혀 무리 없을 뿐 아니라 초대 받은 기분이 들게 한다. 소설 하나로 서평 ‘한 권’을 써내는 능력이 부럽고 좋다. 벽돌 같은 <모비 딕>을 <사악한 책, 모비 딕>으로 퉁 치려고 했다면 (나인가?) 오산이다. 오히려 입맛이 돌게 하는 아페리티프로 작용한다. 식전주 마셨으니 이제 정식을 들 때가 된 건가. 아니 아니 그 전에 전채요리.


이슈메일은 이렇게 전한다. “아름답고 온화한 푸르른 날이었다. 반짝이가 박힌 듯한 바다는 잔잔하고 서늘했고 금박 세공사가 최대한 얇게 두드려 편 박편처럼 사방으로 평평하게 수평선까지 뻗어 있었다. (…) 3분도 채 되지 않아 핍과 스터브 사이에 망망대해가 가로놓였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가엾은 핍은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를 해 쪽으로 들었다. 해도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나지만 핍과 다를 바 없이 쓸쓸하게 버려진 존재였으니.” (90, 강조는 나)


바다 한가운데서 - 10점
너새니얼 필브릭 지음, 한영탁 옮김/다른


앞에서 부연하지 않은 저자 소개. 호손과 같은 이름을 가졌고 낸터킷에 이사 가서 현재 거주하고 있는 너새니얼 필브릭이다. 에식스호 난파 사건을 다룬 논픽션이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모비 딕> 결말 이후 실제로 벌어진 지난한 과정이 담겼다. 읽어내기가 무척 괴롭다. 흥미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선원들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서다. 괜히 물을 벌컥벌컥 마시게도 된다. 대충은 알려진 이야기임에도, 해도와 포경선 도면, 삽화까지 실린데다 이름을 가진 실제 희생자와 생존자들을 대하니 느낌이 많이 다르다. 아프다.


생존자들의 이후 행적, 사망까지의 이야기가 담겼다. 극한 갈증과 굶주림, 고래, 바다, 포경산업과 낸터킷 섬의 역사에 관해서도 많은 자료 연구를 거친 듯 빼곡하다. 또한 1820년 에식스호뿐 아니라 유명한 난파 사건들이 군데군데 언급된다. 메두사호(1816년), 바운티호(1789년), 인듀어런스호(1914년) 등이다. 이상하다. 스포 염려가 더 되는 논픽션이다. 그러니까 두루뭉수리, 누구는 살았고 누구는 죽었다. 삶의 마지막이 망망대해 표류라는 것만큼은 가장 상상하기 싫다는 말을 끝으로, 갈증이 심한 가운데 전채요리 먹었으니 이제 정식을 들 때가 된 건가. 아니 아니 그 전에 앙트레.



모든 것은 빛난다 
휴버트 드레이퍼스 외 지음, 김동규 옮김/사월의책


<모든 것은 빛난다> 6장에서는 <모비 딕>을 빛낸다. 포스팅 맨 앞에서 인용한 멜빌의 편지글 ‘사악한 책’을 화두로 삼는다. <모비 딕>이 사악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둠을 깊이 꿰뚫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교도와 식인주의를 배척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밀턴의 <실낙원> 사탄과 꼭 닮은 에이해브에 독자가 공감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단 한 가지에 미쳐있는 에이해브의 일신론적 광신이 자칫 허무주의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나


우주의 궁극적 스토리는 우주가 우리에게 무관심하다는 데 있지 않다. 비록 핍과 에이해브의 신처럼 우리에게 무관심한 신도 있지만 말이다. (…) 하지만 핍의 신과는 달리 세상에는 또 다른 신들, 즉 즐겁고 성스러운 신들과 사악하고 복수심에 차 있는 신들도 있다. 우주는 번갈아가며 이런 신들의 모습을 띤다. 우주가 그 신들 가운데 궁극적으로 어떤 신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하나의 신도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신들의 만신전일 것이다. (320-321)


<사악한 책, 모비 딕>보다 어렵게 읽힌다. 예컨대, ‘책이 거의 4분의 1 정도 진행되어서 28장에 다다를 때까지 에이해브는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조스Jaws>의 상어처럼, 에이해브의 등장은 지연되었기 때문에 더욱 강력하다.’(<사악한 책, 모비 딕>, 39) 같은 대중적인 문장이 없다. 대충 읽을 책이 아닌데 대충 읽었더니 후과가 크다. <모비 딕>으로 초대한다기보다 왠지 코앞에서 문을 닫는 느낌이랄까, 앙트레라기보다는 무척 고급스러운 디저트 격. 아무려나, 이제 정식을 들 때가 된 건가. 아니 아니 그 전에…….



무인도+머나먼 섬들+다윈의 섬 NoSmoking

무인도의 이상적 도서관 - 8점
프랑수아 아르마네 지음, 김희진 옮김/문학수첩


작가들이 가져온 책 세 권씩으로 꾸린 도서관이니, ‘무인도의 이상적 도서관’이다. 예상은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서지분류 문학, 고전이 많고 실용서가 가끔 보인다. 전화번호부는 실용서인가 아니면,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염려가 크지 않았던 시절 유물이니 고문서인가. 뒤표지에까지 실린 움베르토 에코의 선택이 그것인데, 전화번호부를 고른 작가가 한 명 더 있었다. 카를로스 푸엔테스. 곰곰 생각해보니 2000년대 초반 프랑스 전화번호부에는 내 이름도 게재됐다. 리스트에 넣지 말라고 특별히 요금을 내지 않는 이상 예외 없이 다 실리던 관행이었다. 해당 시절 고문서라면 꼼꼼하게 읽어보는 재미가 없지도 않겠다. 당시 짝사랑했던 사람 이름도 찾아보고 작가 예술가 유명인 이름도 찾아보고 명기된 주소로 그 시절 우리 사이 거리도 짐작해보고. 구조선이 오는지 바다를 틈틈이 살펴보기에도 그만이겠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고른 경우에 밑줄 쳤고, (내가) 모르거나 관심 없던 작가라도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골라 들고 온 경우 밑줄 쳤다. 전자는 마이클 커닝햄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대로>, 그리고 ‘백지로 이루어진 책’을 갖고 참여했다. ‘거기에 글을 쓰지 않고, 백지로 간직하겠다. 이따금 그것을 바라보며 내가 가져올 수 없었던 모든 책과, 앞으로 쓰일 모든 책을 생각하는 것으로 만족하리라.’(063) 역시 멋지다. 또한 커닝햄은 ‘프루스트를 프랑스어로 읽을 줄 알았으면 좋겠다’고도 썼는데, 나, 읽을 줄 안다…… 아나? 음. 프한사전이 소중한 세 권 중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하겠구나. 감수할까? 버지니아 울프가 남은 한 자리를 맡을 것이고. 오, 맙소사. 유르스나르는 어떡해.


다름 아니라 내가 밑줄 친 후자 경우로 카멜 다우드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을 언급했다. 카멜 다우드는 <이방인>을 아랍인의 시선으로 재해석해 다시 쓴 작가다. <뫼르소, 살인 사건>을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을 세 권 중에 넣는 작가라면! 하는 믿음으로 다우드를 보관함에 넣었다. 무인도 도서관에 꽂힐 작가 성별 비율을 고려해 울프와 유르스나르는 내가 꼭 가지고 가고 싶은데. 이런, 베케트는 또 어쩌지. 굉장히 매력적인 책 <바틀비와 바틀비들>을 쓴 엔리케 빌라-마타스가 <몰로이>를 들고 나와 더 좋아져버렸으니. 프루스트(프)+프한사전+울프냐, 프루스트(한)+울프+유르스나르냐, 울프+유르스나르+베케트냐, 혹은 그냥 한 권, 크레마마 님을 들고 가면 안 될까, 라고까지 써보며 혼자 끙끙대다가 앗.


응우옌 후이 티엡 : 책이라고? 무인도에서? 뭐 하러? (172)


(고맙습니다.)


무인도 도서관을 위한, 가뿐하고 우아한 백조 세 권을 추리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인가. 내 알라딘 보관함의 땀나는 발짓이다. 존 스타인벡 <생쥐와 인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번역본이 하나밖에 없다), 조지 엘리엇 <미들마치>(축약본밖에 없다), <라마야나>, 앞에서 얘기한 <뫼르소, 살인 사건>이 더 들어갔다.


요른 릴 : 1950년대 초, 나는 그린란드 북동쪽의 무인도에서 홀로 18개월을 지냈다. 탐험 기지에서 보유한 책은 세 권뿐이었다. 무선 방송 기술 실습 교본, 1,200쪽짜리 원거리 통신 규약집, 그리고 그린란드의 젊은 주부들을 위한 요리책. 섬에 다른 읽을거리는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나는 그 책들을 속속들이 읽었고, (…) (197-198, 강조는 나)


요른 릴은 <북극 허풍담>의 작가다. 그이가 머물렀다는 무인도가 혹시 아래 책에 등장하는지? 후보는 북극해 비에른섬으로 좁혀졌으나…… 중요하지 않다. 지구에 섬이 얼마나 많으며 또 얼마나 숱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지 50개 섬만으로도 매혹당한 <머나먼 섬들의 지도>다.



머나먼 섬들의 지도 - 10점
유디트 샬란스키 지음, 권상희 옮김/눌와


띠지에 이렇게 쓰였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당신은 바깥세상을 잊게 될 것이다.’ 옳지. 옳다. 어찌나 조용하고 특별하고 딴 세상 같은지 막 바다에서 빠져나와 발에서 모래를 털고 이 자리에 돌아와 앉은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역사서도 지리서도 아닌, 이야기책일 터인데 역사와 지리를 포괄한다. 작가의 성향을 잘 알겠고 매력 만점이다. 구구절절 설명은 내 몫이 아니라는 식의 서술. 한 말보다 없앤 말이 더 많을 것 같은 과묵함. 나머지 정보는 당신이 알아서 취하라, 나는 아름다움을 담당하였다, 라고 할까. 아름답다, 아름답다.


이와 비교해 자연을 국가 단위로 나누지 않는, 인간이 만든 국경에 얽매이지 않는 지도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지형학의 눈으로 보면 육지는 저지대의 짙은 녹색, 고산지대의 적갈색, 또는 극지방의 빙하의 흰색으로 빛나고 바다는 다양한 음영의 푸른색으로 어슴푸레 빛난다. 이런 지도는 역사의 흐름에 구속받지 않는다. (9, 머리말)


책 속에 지도가 충분히 등장하는데도 굳이 구글지도를 또 띄워놓고 보는 건 나만이 아니겠지. 우리 모두 지도맹(?)이라고, 샬란스키 지도가 알려주는지도 모르겠다. 형형색색 각기 다른 면적과 선명한 국경이 없으니 매우 ‘불편한’ 지도임이 맞다. 맞는 만큼 우리는 여태 지도가 아니라 정치나 특정 해석을 보아왔던 것이라고, 민트색 바다와 회색 음영이 말하는 듯하다. 같은 맥락에서, 기존 신화나 설명에서 심심찮게 보았던 ‘세상의 배꼽’이라는 표현을 손쉽게 처리한다. 지구는 둥그니 당신이 있는 곳에서 '여기'라고 하면 곧 ‘세상의 배꼽’ 아닌가. 샬란스키가 지구본에서 표시하여 보여주는 섬 위치가 그림마다 배꼽이다. 지금 당신이 거기에서 사랑을 외치면 세상의 중심에서 외치는 거 되겠다.


각 지도에는 ‘현지어’(소속 국가) 표기가 쓰였고 부록에 ‘용어’편이 따로 있다. 그러니까 만, 곶, 갑, 강, 호수, 항구, 섬, 분화구, 해변, 절벽, 암초 등의 멋진 단어들을 러시아어, 노르웨이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 일본어로 볼 수가 있다. 다만, 섬지도 속에 등장하는 숫자는 도시나 마을인 것 같은데, 따로 색인이 없다. (뭔가요? 혹은 왜인가요?)


소개된 섬들 중 아마 가장 간결한 지도가 아닐까 싶은데, 하울랜드섬을 펼쳤을 때 77쪽 지도에서 ‘Earhart Light’가 유일한 활자다. 용어 편에 등장하지 않기에 사전을 찾았다. ‘Earhart: 1.Amelia, 에어하트(1898-1937) 2.1928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 3.세계 일주 비행 중 남태평양 상에서 소식이 끊겼음’(다음 어학사전) 아니나 다를까 이 사연이 소개된다. 안타깝고 뭉클해. ‘어밀리아 에어하트는 ‘오늘’이 ‘어제’로 바뀌는 날짜변경선 바로 너머에서 사라져버린다. 바다는 아무 말이 없다.’(76, 태평양, 하울랜드섬, 피닉스제도(미국))


그리고 다음 책으로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로, 쥘 베른(달 뒷면의 분화구에뿐 아니라 프랑스령 크로제제도 포세시옹섬 험준한 산에 이름이 붙었다.)이나 갈라파고스를 고를 수 있을 텐데, 우선 후자로 선택한다. 따끈따끈한 신간으로 구해놓은 책이 있어서 그렇다. ‘1793년, 북쪽 만에 우체국이 세워졌다’는 낭만적인 설명에 이어 살벌한 일화가 소개된다. 1930년대 갈라파고스 제도 플로레아나 섬에서 발생한 의문스런 실종사건.


희극은 이내 범죄극으로 바뀐다. 1934년에 여남작과 필립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얼마 후 로렌츠의 유골이 이웃 섬 해변에서 발견된다. 리터 박사는 고기를 먹고 식중독에 걸려 사망하고, 오직 도레만이 살아서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전 세계 신문은 갈라파고스 사건에 대한 추측성 기사를 쏟아낸다. “범인은 누구일까?” (92, 태평양, 플로레아나, 갈라파고스제도(에콰도르))


다윈의 섬 갈라파고스 - 10점
조홍섭 지음/지오북



같은 섬. 다른 느낌. 다른데 각각 좋다. 기대 이상으로 성실하고 빼곡하며 담백한 책이다. 다윈의 섬 갈라파고스의 역사, 동식물, 지질, 해류, 기상, 여행가이드 역할에 최신 정보까지 아우르는데, 장황하지 않고 간결하게 핵심을 들려준다. 적당한 사진 자료와 도표도 보기 좋다. 버킷 리스트에 종종 등장하는 갈라파고스, 우리나라에서는 버킷 리스트도 대의제인지 최근 국회의원들 출장(이라 쓰고 외유라 읽는) 방문이 잦았던 곳이다. 줄줄 새는 세금 포함 내 돈으로 사서 읽었다.


가마우지는 물속을 잠수해 물고기나 문어 등을 잡아먹는 비교적 큰 물새이다. (…) 만일 먹이나 번식지를 찾아 멀리 이동할 필요가 없고 천적도 없다면 가마우지는 어떻게 진화할까. 세계의 가마우지 40종 가운데 유일하게 날개가 없는 갈라파고스가마우지(Phalacrocorax harrisi)가 그 답을 제공한다. 이동과 도피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지 않다면 비행은 가장 먼저 포기할 대상이다. (174)


대륙에서 1,000km쯤 떨어진 (적절한) 거리와 격리가 갈라파고스의 독특한 생태계를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소위 ‘갈라파고스화’라는 표현은 잘못 쓰이고 있는 시사용어라고 저자는 덧붙인다. 옳구나. 이런 은유적 표현은 주로 정치인들이 자주 쓰던데, 대의제 버킷 리스트 실현했으면 시사용어라도 제대로 써 주셔라. 하여튼, 적절한 거리 조건으로 대륙에서 이동해온 생물들의 조상이 이 대양섬에서 토착종으로 진화한 결과가 현재 모습이다. 자연사로 보자면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의 변화여서 관찰, 가정, 결론이 퍽 용이한, 자연실험실 같은 느낌. 물론 부침이 많았다. 갈라파고스땅거북과 갈라파고스물개 등의 남획과 외래종 유입이 그것이었다. ‘보전’이라는 말이 ‘생태계 여행’과 어떻게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지가 관건이겠다.


외래종 유입으로 인한 생태계 교란, 환경 파괴가 매우 걱정되는 곳에 굳이 몸소 가는 것보다는 책으로 여행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휴가철 책으로 최고다. 내 책에는 더구나 얼굴 박고 낮잠 잔 흔적이 구불구불한 책장으로 남았다. (침 아니다, 땀이다.) <다윈의 섬 갈라파고스>가 더 좋아진 이유는, 다음 책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역할도 톡톡히 하기 때문. <무인도의 이상적인 도서관>에서도 꽤 많은 작가들이 들고 왔으나 내가 애써 외면했던 멜빌 되시겠다. 이제 영접할 때가 된 건가. 아니 아니 그 전에…….


아마도 갈라파고스를 방문한 미국 포경선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1819~1891)일 것이다. (…) 멜빌은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해 20살 때 원양 선박의 선원이 되어 대양을 떠돌았다. 그는 포경선 애쿠시넷호를 타고 남아메리카와 태평양을 항해하곤 했는데 1841년과 1842년 갈라파고스 제도에 들른 적이 있다. 멜빌은 이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1854년 갈라파고스에 관한 10가지 단상을 모은 소설 『엔칸타다스』를 발간한다. (29-30)



살인을 예고합니다 Smoking

살인을 예고합니다 (리커버 특별판. 페이퍼백) - 8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리커버 컬렉션. 표지가 유치한 듯 보이나 나름대로 기막히다. ‘누군가 거기 없었어!’의 순간. <화요일 클럽의 살인> 속 단편 ‘친구’ 모티브를 취했다. (<열세 가지 수수께끼>에서는 해당 단편 제목이 ‘동행’인 모양이다.) 오타인가 했던 글자가 오타 아니고 힌트, 라고까지는 써도 되겠지? 매력적이고 호기심 많고 빈틈도 많은 이웃들 대거 출동한다. 등장인물 소개하는 식의 도입부가 멋지다. 지역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드러내는 태도들이 가지각색 사랑스럽다. 푸아로 아니고 마플 여사가 와 주시니 ‘회색 뇌세포’ 대신 ‘회색 솜뭉치’로 변주된 점도 재미있고. 무엇보다 (고백) 사은품 찻잔이 귀엽다.


마플 양은 의자에 몸을 묻고 들릴락 말락 하게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다들 비슷하단다. 어디나 마찬가지야.” (223)


오늘 커피 네 잔 마심.

흰옷을 입은 여인 Smoking

흰옷을 입은 여인 - 8점
윌리엄 월키 콜린스 지음, 박노출 옮김/브리즈(토네이도)


뚱뚱한 책. 찰스 디킨스 절친 윌리엄 윌키 콜린스가 쓴 추리소설이다. 추리물계 수작이라고 명성이 자자하나, 빅토리아 시대 작품임은 감안해야 하겠다. 다른 말로, 예스러움 뿜뿜. 법학을 전공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던 작가의 이력이 고스란히 주인공 화자에 스민 듯하다. 사건 위주로 서술자가 번갈아 가며 등장한다. 그러니까 일인칭 서술 트릭 같은 건 없을 예정이니 그냥 성실히 읽으면 끝. 번역문에서도 느껴지는 각 화자 어조와 문체 차이하며 탄탄한 캐릭터 설정이 과연 수작답다.


찰스 디킨스의 절친이라고 한 김에 생각해보니, <도 두시 이야기>와 비슷한 시기 작품이다. 닮은 꼴 얼굴 소재도 같고. 짐작건대 두 작가 친구가 관련 대화를 나누었을 것도 같다. 바로 두 해 전에 함께 여행을 하기도 했던 터. <게으른 작가들의 유유자적 여행기>가 보관함에 들어 있다. 디킨스(1812~1870)에 비해 덜 알려진 콜린스(1824~1889)이긴 하나 <흰옷을 입은 여인>은 당대 디킨스 작품 판매량을 넘어서기도 했단다. 그럴 법도 했겠다 싶다. <두 도시 이야기>가 더 짧고 강렬하다는 장점은 있다만 줄줄줄줄 치밀하고 친절하고 장황한 콜린스 맛도 묘미였을 듯.


줄줄줄줄 치밀하고 친절하고 장황한 와중 기대하지 않았던 유머까지 발견하였는데, 해당 캐릭터는 ‘사람 모양을 하고 있는 신경다발에 불과’(340)한 프레더릭 숙부이다. 다른 화자가 언급하여 얼핏 그려지는 숙부는 그저 예민하게 심술부리는 부자싱글건강염려증노인네에 불과하나 그이 자신이 화자일 때 투덜이 매력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다시 말하지만 예스러움 감안하고.


내 생각에 사회의 전 계급을 막론하고 결혼한 사람들로부터 미혼인 사람들이 받는 대우만큼 인간의 사악한 이기심을 눈이 아플 정도로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 당신이 이미 차고 넘치는 인구를 감안하여 따로 가족을 만들지 않을 만큼 사려 깊고 자기희생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면, 동일한 배려와 희생정신이 없는 기혼자들은 당신을 자기 결혼문제의 상담자나 자기 아이들의 더할 나위 없는 친구로 생각하기 일쑤다. 남편들과 아내들이 결혼생활의 걱정거리에 대해 말하면 총각과 처녀들은 참고 들어줘야 한다. (…) 왜 내게 떠넘기는가? 왜냐하면 내가 미혼으로 남을 만큼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결혼한 친지들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주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가련한 미혼자들이여! 가련한 인간성이여! (421-422)



라우라 화이트가 사라진 밤 Smoking

라우라 화이트가 사라진 밤 - 6점
파시 일마리 야스켈라이넨 지음, 김미란 옮김/북로그컴퍼니


라우라 화이트는 래빗백 문학회를 조직하여 후배 작가들을 양성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주인공 엘라가 화이트에 의해 열 번째 작가로 지목되어 문학회에 입성하는 날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화이트가 사라진다. (눈보라와 함께. 피서 된다.) 엘라는 문학회 역사를 조사하여 비밀을 들추어내려 한다. 밝혀지는 비밀은 나름대로 반전 효과가 있다. 밝혀지지 않는 비밀은 그대로 환상 요소인가보다 하게 된다. 이야기 자체는 무척 흥미롭다……만,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비호감이다. 문학회 작가들 사이 ‘게임’이라는 것도 억지스럽고 유치해 재채기를 열 번은 했지 싶다. 게다가 로맨스는 왜 또 오는 거냐. 입술과 유두에 페티시가 있어 보이는 작가 야스켈라이넨, ‘핀란드의 무라카미 하루키’라 불린다는데 글쎄.


엘라는 새삼 말을 너무 많이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글로는 세상을 하나 세울 수 있지만, 과도한 말은 그 세상을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었다. (194/462)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Smoking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 8점
박연선 지음/놀(다산북스)


여름 바캉스에 맞춤한 제목과 장르다. 차진 구어체가 쭉쭉 끌어가는 이야기에다, 시골 풍경과 일상이 깨알같이 핍진하다. 약간 유치한 면도 없진 않으나 갓 20대가 된 주인공 화자를 감안한다. 능청맞고 직설적이며 현실적이고 현명한 행동파 80세 어르신이 다른 쪽에서 무게를 잡아주니 균형이 잘 맞는다. 무엇보다 영리한 장치는 각 장 끝에 짧게 등장하는 가해자의 기록 격인 ‘주마등’ 편들로, 끝까지 지켜보게 하는 힘을 부여한다. 과도한 유머와 가벼운 어투가 내 취향과 맞지는 않지만, 결국 ‘아무 것도 아닌 헛소동’ 식으로 흐르지 않는 결말은 제법 묵직하다. 단 한 군데 밑줄 그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건 어마어마한 기적이다. 지구상에 단백질이 처음 생겨나고, 생명체가 등장하고, 물속 생물이 육지생활을 시작하고, 원숭이를 거쳐 인류가 등장해 강무순에게 전달될 때까지 나의 DNA는 수억 년을 무사고 배달된 셈이다. 그 숱한 죽을 뻔한 고비를 숱한 행운과 숱한 구남이들의 도움으로 이겨낸 위대한 기적. 생존하는 모든 생물은 기적의 결과물이다! 말해놓고 보니 무슨 사이비 종교 지도자 같구먼. (148-149/341)




살아 있는 도서관+시의 문장들 Smoking

살아 있는 도서관 - 8점
김이경 지음/서해문집


비블리오마니아 이야기 12편. 번역 소설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국적’이다. 동서고금 종횡무진 다채롭다. <애서 잔혹 이야기><고서 수집가의 기이한 책 이야기>와 나란히 꽂아둬도 좋겠다. 12편 중 프롤로그, 에필로그 격으로 앞뒤에 붙은 한 편씩은 개정판에서만 볼 수 있단다. 구판 제목은 <순례자의 책>. 프롤로그는 싫고 에필로그는 좋다. 동화 형식을 취해 책 이야기로 초대하는 점은 나쁘지 않으나 세상에서 하나뿐인 책을 가져오는 자에게 공주를 주겠다는 왕이라니, 구태의연해서 살짝 재채기하고 말았다. 반면 이국과 과거를 넘나들다가 지금, 여기, 우리 이야기로 끝맺는 에필로그 편은 따뜻하다.


매우 친절하게도 끝에는 ‘소설 속 책 이야기’까지 붙였다. 제본과 인피 장정, 소설에 빠진 조선 사람들, 분서의 역사, 걸어 다니는 책 대여점 가시혼야, 책 도둑 등의 설명이다. 발췌는 (프롤로그를 빼면) 첫 작품에서. 저승에 가면 자서전을 써야 하는데, 참고문헌은 모두 나보다 앞서 죽은 자들의 글이다. 주인공은 어머니를 (재)발견한다. 나는, 지금쯤이면 노동운동 과정과 국회의원 경험에 더해 평소 자주 켜지 못한 첼로 이야기를 쓰고 있을 누군가를 생각한다. 무(無) 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으리라 믿지 않지만, 쾌적한 도서관에서 자기 인생을 글로 쓰고 있으리라는 상상은…… 그래, 덜 아프니까.


무엇보다 어머니가 쓴 책에는 나에 관한 이야기도,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 나도 아버지도 없는 어머니의 인생이란 건 상상해본 적도 없었건만! 당연히 나는 모욕감을 느꼈다. 하지만 모욕감보다 더한 건 부러움이었다. 책 속의 어머니는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둥근 원처럼 완전했다. 어머니 특유의 더듬거리는 글씨체에도 불구하고 거기 담긴 내용은 한없이 완벽해서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게 했다. (23,「저승은 커다란 도서관」)


 
시의 문장들 - 8점
김이경 지음/유유


보관함에 시집이 늘게 하는 책. 뚝 떼어놓은 시 문장에 저자 감상이 덧붙었다. <소설의 첫 문장>도 좋았던 바, 유유출판사 기획 참 좋다. 더위 식힐 요량으로 스릴러를 한 무더기 쌓아놓았으나 의외. 이 책도 시원하게 읽힌다. 더위에 시, 처음 알았다. 내처 한 편 지어본다.


풍덩
문준이 (또) 오고 있다
복숭아는 사놓지 못했다
포도주는 있다 (카톡인 건가)


나이 먹어서 배운 게 딱 하나 있다. 너의 행복은 나의 행복이고 당신의 불행은 돌고 돌아 내 불행이 된다는 것.
물론 가끔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저놈의 인간이 불행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싶은 때도 있다. 그러나 복수가 복수를 낳아 세상이 눈물 속에 잠기는 끝을 상상하면 결국 기도하게 된다.
나도 나를 용서할 수 없으니 너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너도 부디 무사히 살라.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는 그날까지. (141/284, 문장 60)





2018여름 위도 술이깰때까지자시오


고딕 소녀 Smoking

고딕 소녀 - 8점
카슨 매컬러스 지음, 엄용희 옮김/열림원

 

그녀 안에 쌓이는 이 죄어드는 느낌을 깨뜨리지 못해서 그녀는 자꾸만 뭔가를 하려고 서둘렀다. 그녀는 집에 가서 석탄통을 머리에 이고 마치 미친년 모자 쓴 모양으로 부엌 식탁 주위를 돌기도 했다. 갑자기 생각난 일이면 뭐든지 했는데 그러나 그녀가 하는 일은 매번 잘못된 것이었고 전혀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이런 잘못되고 바보 같은 일들을 한 뒤 그녀는 진절머리 나고 공허한 상태로 부엌 문간에 서서 말하곤 했다.
“온 시내를 몽땅 부숴버렸으면.” (53)


원제 The Member of the Wedding. 군인인 오빠는 결혼한다고 하고 하루가 다르게 몸은 커가고 세상은 알 수 없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모르겠어서 시내를 돌아다니거나 부엌에서 수다를 떠는 일 밖에 못하는 열두 살 프랭키다. 수다 멤버는 베러니스 아줌마와 사촌동생 존 헨리. 작품 분위기가 연극 같다 싶었는데 카슨 매컬러스가 극화한 희곡이 있기도 하다. 무대에 올랐을 뿐 아니라 TV드라마와 영화로도 몇 차례 만들어졌던 모양이다.



어느 장면인지 잘 알겠는 표지사진. 프랭키(왼쪽)와 베러니스 아줌마(가운데)가 심각한 얘기를 하다가 부둥켜안고 울게 되는데 오른쪽 꼬마 존 헨리도 아줌마 의자 뒤 가로대에 올라 아줌마 머리를 껴안고 같이 운다. 정확하게는 베러니스 아줌마 귀를 잡는 셈. 질투 때문인지 벽 뒤의 쥐 때문인지 함께 우는 존 헨리가 소설에서도 너무 귀여웠다. ‘깃털 달린 분홍 모자를 쓰고 굽 높은 구두를 신고서, 늙고 조그만 난쟁이 여자처럼’(233) 서있는 작은 존 헨리를 상상하자면…… 슬퍼진다.


더위 중에 읽어서 그런지, 작품이 딱 여름 같다. 열두 살 한여름. 쑥쑥 길어지는 팔다리에 스스로 적응하기도 힘든 한 시절. 권태 같기도 한 불안감과 조바심을 나도 기억한다. 세상을 배우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던 온갖 뻘짓들도. 그러고 보니 뭔가 몹시 그리운데. 카슨 매컬러스가 이 그리운 한때를 절묘하게 잡아낸 듯하다. 매컬러스만의 매력, 이제 더 없어 어찌나 아쉬운지 모르겠다. ‘전작(全作)해서’ 좋고 슬프다. 끝으로 내게 최고 매컬러스는 역시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이라고 써 놓는다.


몰아 쓰는 100자평과 발췌문 Smoking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 8점
아흐메드 사다위 지음, 조영학 옮김/더봄


사람들은 나를 범죄자나 괴물로 치부한다. 내가 복수해야 할 상대와 똑같은 놈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심각한 불의가 아닐 수 없다. 내게는 도덕적이고도 인본주의적인 의무가 있다. 이 땅에 정의를 회복할 것. 이 땅은 이미 탐욕, 야망, 과대망상, 무참한 폭력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함께 싸우자거나 대신 복수해달라고 애원할 생각은 없다. 그러니, 부디 나를 보더라도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 (153-154)

명작의 영리하고 묵직한 변주다. 은유, 우화라는 말을 쓰기도 조심스럽다. 전쟁과 테러에 찢긴 수많은 몸들을 생각하면 프랑켄슈타인의 크리처가 이토록 그럼직할 수도 없어서.


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 - 10점
케이트 쇼팽 지음, 이리나 옮김/책읽는고양이


이제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는 누군가를 위해 살지 않아도 된다. 오직 자신을 위해 살 것이다. 같은 인간이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해도 된다고 믿는 이의 아집으로 인해 감정이 상처받지 않아도 되었다. 의도가 좋은지 나쁜지에 따라 덜 범죄처럼 보이기는 했으나, 하나같이 폭력이었다는 것을 부인은 그 짧은 시간에 깨달았다. (…)
“자유! 몸과 영혼의 자유!” (10,「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

독서 속도가 빠른 사람이라면 ‘한 시간 사이에’ 읽을 책.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단편의 맛과 멋이 제대로다. <각성> 혹은 <이브가 깨어날 때> 전후가 궁금했던 케이트 쇼팽이라 무척 반갑고 고마운 기획.



호랑이 남자 - 8점
에카 쿠르니아완 지음, 박소현 옮김/오월의봄


“내가 아니에요.” 마르지오는 아무런 죄책감 없는 표정으로 담담히 말했다. “내 몸 안에 호랑이가 있어요.” (59)

마르지오 안의 호랑이는 힘, 분노, 정의랄까. 살인사건 하나가 툭 제시되더니 가족사가 좌르르 펼쳐진다. 흡인력이 대단하다. 많이 낯설지가 않아 더 그렇다. 치솟는 내 안의 호랑이 혹은 살의만큼.



밤, 호랑이가 온다 - 8점
피오나 맥팔레인 지음, 하윤숙 옮김/시공사
 

호랑이인가, 아니면 중요한 일에 대한 느낌인가? (…) 루스는 뭔가가 그녀를 만나러 오고 있다는 걸 느꼈다-커다란 것, 물론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루스가 그 정도까지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떤 형체가 있었고 그게 아니라도 어쨌든 어떤 열기는 있었다. (11)

무언가의 상징으로 쓰이기 좋은 호랑이인가보다. ‘중요한 일에 대한 느낌’이라고까지는 적을 수 있겠다. 노년 스릴러. 노련하다. 마냥 안타깝거나 슬프지만은 않게, 위선과 선의가 구분 가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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