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3알라딘지름 술이깰때까지자시오


피서를 어찌나 잘했는지 제주도에서 덜덜 떨다가 돌아왔습니다. 왔으니 책을 사야지요. 11,700마일리지어치 굿즈가 같이 왔습니다. 우주버전 스누피&우드스탁 배지 매우 귀엽습니다. 에코백에 냉큼 달았습니다. 황모과 작가 모멘트 아케이드도 아직 읽지 않았으면서 같은 작품이 포함된 단편집 밤의 얼굴들(수첩)을 내처 사버렸네요. 여행도 다녀왔으니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알라딘 티셔츠 디자인은 미안하지만 솔직히 유치합니다. 안 사려고 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주문에 들어 있었어요. 그나마 면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습니다. 리갈패드는 내지가 도트. 1984 양말 ‘빅브라더’와 ‘와칭 유’ 순서가 바뀌어 놓였네요. 아무튼, 웰컴했습니다.



0612알라딘지름 술이깰때까지자시오


(독후감도 안 쓴 주제에) 어디어디 놀러갑니다. 크레마마 님과 손소독제 지참하고 마스크 쓰고. 마스크 쓰면 이상형 미인이 됩니다. 아주 잘생겨져요. 여행길에 필요해서 커피를 드립백으로 처음 사봤네요. 잘 다녀오겠습니다. 미인이 아니어도 좋으니 마스크 안 써도 되는 때가 어서 오기를 바랍니다.




백자평과 밑줄: 빈티 파워 사라진 세계 갈라파고스 Smoking

빈티 
은네디 오코라포르 지음, 이지연 옮김, 구현성/알마

빈티는 네고시에이터. 전쟁을 근절하는 협상의 힘을 봅니다. 서문의 제미신은 반가웠어요.


이어서 족장이 소리 높여 말했다. “내 평생에 처음으로 나는 기존에 믿던 것을 완전히 벗어난 무언가를 배우고 있소.” 족장이 말했다. “인간들을 받아들여 감싸주는 곳에 이처럼 명예가 있고 식견이 있을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소.” (130)



파워 The Power 
나오미 앨더만 지음, 정지현 옮김/민음사


가벼운 미러링인가? 했다가 무거운 경고를 받고 나온다. 권력의 속성을 본 듯도 하다. ‘길 위에서 두려움을 느꼈다’고 일기에 적는 이가, 여자든 남자든, 있음에야.


툰데는 길에 모여서 하늘을 향해 포물선을 그리며 웃고 떠드는 여자들 곁을 지나칠 때면 속으로 되뇌었다. 난 여기 없는 거야, 난 아무 것도 아니다, 제발 날 보지 마라, 내가 안 보일 거야, 볼 것도 없어. (…) 툰데는 돌바닥만 쳐다보았다. 여자들이 외설스럽고 인종 차별적인 몇 마디 말을 외치기는 했지만 그냥 보내 주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 길 위에서 처음 두려움을 느꼈다.” 마른 잉크를 손으로 훑었다. 진실은 가까이에서 마주할수록 가혹한 법이다. (332)



사라진 세계 
톰 스웨터리치 지음, 장호연 옮김/허블


‘진짜 굳건한 대지는 언제일까? 여기는, ****년은 아니었다.’(526) 미래는 숱한 가능성 중 하나. 여느 때처럼 지구는 무사할 터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시간 여행이란 그저 이 굳건한 대지를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겠지.


모든 인간의 치명적인 결함은 우리 자신이 실재한다고 철석같이 믿는 거네. 자신이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확인할 때까지는 그렇게 믿지. 우리가 보는 모든 것,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고 말하지.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진짜라고 떠들어대는 거야. 하지만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야. 우리는 그저 환상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것뿐이야. (446)



갈라파고스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f(에프)


여전한 반전(反戰) 기조와 우려다. 이상하게 (실례) 유난히 귀엽다. (트라우트 선생은 반가워요.) 백만 년 간 인류를 보아온 화자의 말이라면 귀 기울여야 하는 거다. 인간의 지나치게 큰 뇌가 자초하는 패악질 경고를.


요즘은 아무도 절망감 속에서 적적하게 살아가지 않는다. 백만 년 전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망감 속에서 적적하게 살아갔던 이유는, 그들의 두개골 내의 악마 같은 컴퓨터가 자제하거나 쉴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실제 삶에서는 제기될 수 없는 더 도전적인 문제들을 요구해 댔기 때문이었다. (293)



백자평과 밑줄: 오늘의 SF 에스프리 비주류 한 줄 NoSmoking


오늘의 SF #1 - 8점
정소연 외 지음/arte(아르테)

편집과 만듦새 예쁘고. 각기 다른 맛 단편들 좋고. 사랑스러운 노력들 감동스럽고. 부디 계속해주시길 응원하고.


SF는 지금 이곳here and now 너머를 말하는 장르이지만, 한편으로 SF라는 장르는 지금 여기에 있다. 독자도 창작자도 비평가도 엄연히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현재성이 갖는 가능성을 깊이 고민하여, 《오늘의 SF》라는 제목 그대로 오늘날 한국 SF를 가능한 한 모든 방향에서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자 했고, 앞으로도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7, 인트로, 《오늘의 SF》창간에 부쳐, 정소연)




에스에프 에스프리 - 8점
셰릴 빈트 지음, 전행선 옮김, 정소연 해제/arte(아르테)

문장이 깔끔하지 않고 책 펼침도 힘들어 읽기가 수고스러웠지만 피와 살이 되는 도움말 들이다. 문명사회 비판에 사고실험까지 행한다는 점에서 SF의 순기능을 본다. 내가 왜 SF를 좋아하는지도 더 잘 알겠고.


SF를 신념의 문학으로 생각할 때, 이 장르는 사회 비판의 중요한 장소이자 우리의 사회적 상상력을 넓히고 평등한 세상을 구상하도록 돕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SF 장르는 가부장적 억압과 조직적인 인종차별주의를 가시적으로 만드는 강력한 도구로 입증되었으며, 이전에 비주류로 소외당하던 사람들이 상상한 미래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목소리를 포용하면서 좀 더 포괄적인 공동체가 되었다. (232)




비주류 선언 - 8점
텍스트릿 엮음/요다

한국 판타지, SF, 히어로, 무협, 로맨스 등 소위 서브컬처를 개괄한다. 웹소설이라는, 몰랐던 동네 구경도 했다. ‘장르는 주류로 들어가고 싶어서 피해 의식으로 가득한 집단이 아니라 독자적인 미학의 계보를 쌓아가는 대상이라는 의미의 비주류 선언’(262)


협(俠)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수다한 말들이 있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이 가장 깔끔하다고 생각한다. 협은 사적 정의다. (…) 무협소설은 그 적통을 이었다고 간주된다. 분명 합당한 말이다. 무협소설의 무림은 관(官)으로 대표되는 정부를 소설에 넣지 않거나, 관이 있다고 보더라도 무림과 관은 불가침이라 설정한다. (97, ‘사이다’로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 서원득)




한 줄도 좋다, SF 영화 - 6점
유재영 지음/테오리아


글이 공기 같다고 할지 물 같다고 할지. 분명히 읽었는데, 체에 하나도 걸리지 않고 그대로 통과해 흘러가버린 느낌이다. 곰곰 생각해보니 ‘나’체가 아닌, 무색무미무취한 ‘우리’체 때문인 것 같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 다시 잠들기까지 줄곧 화면을 들여다봅니다. (…)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현실 속에서 타인을 보는 일조차 모니터의 인물을 바라보듯이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자기가 틀어놓은 채널을 관람하듯 물끄러미 타인을 보는데요. 그 시선에는 책임과 염치가 결여되기도 합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타인의 시청을 종료시키는 일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마주 보면 그만입니다. 그래도 시선을 유지한다면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요.

“나는 당신을 봅니다.” (079-080, 제임스 캐머런 <아바타>)





불타는 피라미드 + 아서 매켄 단편선 1 Smoking

불타는 피라미드
아서 매켄 지음, 이한음 옮김, 이승수 해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바다출판사

아서 매켄 단편선 1 
아서 매켄 지음, 이미경 옮김, 정보라 해설/와이드마우스

『공포문학의 매혹』에서 하워드 러브크래프트 선생이 말씀하시길


코스믹 호러를 가장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올린 살아 있는 창작자들 중에서 다재다능한 아서 매켄에 비견할 수 있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그는 십 수 편의 장단편을 썼고, 감추어진 전율과 끔찍한 공포 요소를 다루면서 사실적 예리함과 비교할 데 없는 실체에 도달한다. (『공포문학의 매혹』 120)


‘살아 있는’은 물론 한 세기쯤 전 일이다. 아서 매켄은 1863년 태어나 1947년까지 살았고 특히 1890년에서 1900년 사이 활발하게 작품을 썼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오스카 와일드, 아서 코난 도일 등과 동시대 작가다. 『아서 매켄 단편선 1』의 주석과 연보에서 본 바, 와일드와는 친분이 꽤 두터웠던 모양이다. 매켄을 연달아 읽고 가만 생각해보니 매켄 속에서 저 작가 세 명이 조금씩 다 느껴지는 듯도 하다. 분위기가 퍽 다르긴 하지만 지킬 박사나 도리언 그레이, 또 셜록 홈즈까지 한 방울씩은 담긴 듯 하달까. 세기말 데카당스 개념으로 정보라 작가가 해설편에서 잘 설명해놓았다.


각각 단편 세 개씩 실렸다. 한 줄 요약을 써버리겠다.

「검은 인장 이야기」 그레그 교수의 초자연현상 탐구와 희생.

「하얀 가루」 헬렌 동생 프랜시스가 약을 잘못 먹고 괴물이 되는 이야기.

「불타는 피라미드」 다이슨이 다른 종족의 문자를 해독하고 의례를 목격함.

「위대한 신, 판」 헬렌의 불가사의한 괴물성(?)으로 여러 남자가 자살함.

「내면의 빛」 블랙이 비밀리에 보관하던 오팔과 수첩을 다이슨이 찾아내 진상을 밝힘.

「붉은 손」 다이슨이 암호를 풀어 살해사건 전말을 알아냄.


(쓸데없tmi. 반복되는 이름들로 저 밖에 필립스, 본도 있는데 소소한 재미다.) 고대 유물 및 초자연현상을 탐구하는 교수, 의사, 애호가가 주로 등장한다. 추리 형식을 한 작품은 다이슨 시리즈로 나와도 좋았겠다. 앞서 언급한 작가들과 데카당스 사조를 공유하면서도 분위기가 퍽 다르다고 한 것은 당연히 매켄만의, 그리고 러브크래프트가 이어받은 호러호러호러다. 어떤 식이냐 하면, 알 수 없는 연유로 꿈틀끈적징글검정악취부글드글스티븐킹저리가라괴물로 변신하거나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 죽음에 이른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장이 아마 ‘~을 보는 순간 강렬한 공포심을 느꼈다’로, 등장인물 설레발이 어김없다. ‘앗 깜짝이야’ 혹은 ‘아이 무서워!’ 하기에, 나는 너무 오염됐다. 공포를 느끼는 데에도 감정이입이 필요한 법. 이상하게, 무서움을 느끼려고 무척 애쓰게 되는 한 세기 전 호러다.


그곳을 쳐다본 나는 새하얗게 달구어진 쇠가 심장을 지지는 듯한 강렬한 공포심을 느꼈다. 악취를 내뿜는 검은 덩어리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끔찍하게 썩은 모습으로 부글거리는 그것은 액체도 고체도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눈앞에서 녹으면서 계속 모습을 바꾸고 있었고, 끓어오르는 역청처럼 기름기 있는 거품을 부글부글 내뿜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불타는 두 점이 눈처럼 빛나고 있었다. 팔다리 같은 것이 꿈틀거리며 옴죽거렸고, 전에 팔이었을지도 모를 무언가가 움직이면서 위로 추켜올려지는 모습이 보였다. (『불타는 피라미드』 107, 「하얀 가루」)



영국의 포스트 펑크 밴드인 더 폴The Fall과 네오포크 밴드인 커런트 93Current 93은 매켄의 신비하고 오컬트적인 작품의 특성과 소재를 음악에서 차용했다. 더 폴의 마크 E. 스미스는 인터뷰에서 필립 K. 딕 혹은 에드거 앨런 포와 같은 소설가들과 함께 아서 매켄을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 밝혔다. 더불어 커런트 93은 매켄의 작품에서 얻은 영감을 소재로 창작한 “내면의 빛”에서 매켄의 작품 제목을 노래의 제목으로 삼기도 했다. (『아서 매켄 단편선 1』 254-255, 해설, 정보라)




0520알라딘지름 술이깰때까지자시오

알라딘 직접 배송이 자꾸 하루씩 늦게 도착하네요. (같은 날 주문한 우주점이 오전에 먼저 왔고) 직배는 밤에 왔습니다. 지통이 하나 붙어 있어요. 짜잔.

<주기율표를 읽는 시간> 띠지를 펼쳐도 같은 게 나오긴 하지만 기념으로 포스터도 선택했지요. 책은 얼핏 보아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이번 달 우산은 받았고 티셔츠는 아무리 봐도 고를 것이 없어서 패스했습니다. 그나저나 양말은 왜 어김없이 받는 걸까요. 직접 신기도 하고 선물도 하고. 조카 많고 발은 더 많습니다. 하하.


0515알라딘지름 술이깰때까지자시오

묵직한 과테말라 커피 원래 좋아하는데 알라딘 버전 엘 소코로는 시고 가볍네요? 그러면 그런대로 마십니다. 작년 알라딘 우산은 약해 빠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 것도 큰 기대는 안했습니다만. 펼칠 때 마지막 ‘딸깍’이 매우 뻑뻑합니다. 손힘 없어 어디 살겠나.. 팔팔한 조카에게 넘겨야겠습니다. 양말과 족집게는 <완벽주의자들>에 따라 왔습니다. 사이먼 윈체스터 좋아해요. 


백자평과 밑줄: 미친 심리치료실에서 버려진 사랑에 빠지기 Smoking

미친 사랑의 서 - 8점
섀넌 매케나 슈미트.조니 렌던 지음, 허형은 옮김/문학동네

너무 많은 작가에, 너무 압축한 연애사가 거의 사전 수준이다. 그러므로 깊이나 길이보다는 겉핥기용으로 유용.


“우리의 사랑은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드링킹 스토리였다” 케이틀린 맥나마라는 웨일스의 시인 딜런 토머스와의 결혼생활을 이렇게 회고했다. (…) 둘의 알코올 중독, 그리고 토머스의 고삐 없는 바람기는 케이틀린을 자극해 번번이 드라마틱한 분노 폭발로 이어졌고, (73, 작가의 사랑과 전쟁)



심리치료실에서 만난 사랑의 환자들 - 8점
프랭크 탤리스 지음, 문희경 옮김/어크로스

사랑(병) 심리치료 사례 12개가 실렸다. 소설 12편을 읽은 느낌이다. 특히 이언 매큐언의 ‘이런 사랑’에서 보았던 클레랑보 증후군은 반가웠다(무서웠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밀실 안에서는 누구나 이상하다. 나는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의 명쾌한 통찰에 동의한다. “정상인 사람은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366, 의식의 흐름대로 말하는 부부)



버려진 사랑 - 8점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한길사

버려진 사랑? 쓰레기 남편 따위는 더러워서 내가 버리는 거다.


나는 찬찬히 그를 뜯어보았다. 그렇다. 나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제 내 과거의 파편조차 아니었다. 그는 얼룩일 뿐이었다. 수년 전 벽에 묻은 지문에 지나지 않았다. (365)



사랑에 빠지기 - 6점
하비에르 마리아스 지음, 송병선 옮김/문학과지성사

질투인가 우정인가. 집착 아니고 사랑인 건 맞나. 모호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싸구려 치정극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간 것 같은데. 작가가 즐겨 사용한 ‘우리 여자들은~’ ‘사랑에 빠진 여자들은~’에 공감 0%. (모르면 쓰지 마셔라. 겸손하게 그냥 ‘나는’이라고 하셔라.)


유감인지 다행인지는 몰라도, 죽은 사람들은 그림처럼 고정되어 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으며,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결코 대답도 하지 않는다. 돌아올 수 있다고 돌아오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데베르네는 그럴 수 없었고, 그게 바로 그가 가장 잘한 일이었다. (522-523)




더 월, 세상의 주인 Smoking

더 월 
존 란체스터 지음, 서현정 옮김/서울문화사

다짜고짜 벽을 지킨다. 무엇으로부터? ‘상대’로부터. 벽은 해안에 있다. 따라서 해변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이쪽이다. 이쪽은 대격변이라 부르고 저쪽은 종말이라 부르는 사건 이후, 바다가 없는 이쪽은 육지가 없는 저쪽을 ‘상대’한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저것은 벽’(도종환) 할 때 바로 그 벽이 상징 되겠다. 담쟁이라면 넘을 벽을 사람이라 못 넘는다. 이쪽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저쪽 사람은 배제하는 벽 이야기. 단순하고 명징한 소재 하나로 영리하게 이뤄낸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이 시대의 <1984>’라고 띠지에 적혔다. <세상의 주인>은 <1984>에 큰 영향을 준 숨겨진 걸작’이라는데.


“다 잘될 거야.”

(…) 나는 이게 바로 이야기라고, 모든 게 다 잘될 거라고 혼자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나서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큰 소리로 이야기의 운을 떼었다.

“벽 위는 춥지.” (310)



세상의 주인
로버트 휴 벤슨 지음, 유혜인 옮김/메이븐

‘숨겨진’ 작품인 건 옳다. 한국 최초 완역판이라니까. 1907년 작으로 <1984>에 40여 년 앞선다. 프란치스코 교황 얼굴이 띠지에 등장하는 만큼 종교가 전면에 나선 소설이다. 세계 통일을 이루는 과정을 보여준다. 종교가 아니라 세속 인본주의를 통해서다. 종교는, 그러니까 그리스도교는 어떤 역할인가. 전체주의에 의해 억압받는다. 세속과 종교 혹은 인본주의와 구원주의 또 혹은 자연과 초자연, 이분법적인 구도가 때로는 소련 시절 SF 같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에. 종교를 대체한 세속 인본주의가 딱 종교 같으니 이를 어쩌지. 패배/순교 혹은 승리/독재가 무슨 의미인가 싶은, 장황한 허무주의로 읽었다.


“메이블, 현실을 받아들이자. 이제 끝이야. 로마는 없어. 이제 우리가 그 위에 더 좋은 것을 지어야 해.” (302)




포이즌, 악마 Smoking

포이즌 아티스트 
조너선 무어 지음, 박영인 옮김/네버모어

케일럽은 독물 전문 박사다. 뛰어난 실력을 자랑한다. 엄청난 음주도 자랑한다(음주운전이 일상). 메디컬 센터에서 연구소를 운영하며 현재 새로운 지원금을 탈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부검의사 헨리를 친구로 두어 은밀히 시체 보관실을 드나든다. 전문 지식으로 헨리에게 힌트를 주기도 한다. 케일럽은 어린 시절 어떤 끔찍한 사건을 겪고 2주일 간 실종된 적이 있었으며 헨리는 그 사실을 아는 유일한 친구다. 제목에서 예상 가능하듯, 독물 관련 사망이 연달아 발생한다. 살인사건 수사가 진행되는 동시에 케일럽의 과거 사연이 조금씩 드러난다. 무섭고 몽환적이다. 두둥. 과거 사건을 처음에 낱낱이 밝히지 않고 암시만 툭툭 던져가며 독자를 꼼짝없이 붙들어 놓는 솜씨가 빼어나다. 한편 46쪽.



‘의학은 아니고 철학 쪽’ 박사라니 아마도 ‘메디신 닥터는 아니고 필로소피 닥터’라고 답했을 듯하다. 마구잡이 읽고 있던 책 중에 <여자의 뇌 남자의 뇌 따윈 없어>(송민령)에서 본 바가 이렇다. ‘과학을 통해 얻어지는 나와 내 주변에 대한 이해는, 마치 철학이 그렇듯이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인지 과학 분야의 박사 학위는 철학 박사(PhD; doctor in philosophy)라고 불린다.’(48) 그러니까 문맥이 좀 뜬금없다 싶은 번역 ‘의학은 아니고, 철학 쪽으로요’ 보다는 ‘의학 박사는 아니고 과학 분야 박사입니다’라고 옮기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 한 번, 브리짓이 욕조에 누워 있고 케일럽이 바닥에 앉아 촛불의 빛에 의지해 그녀를 그릴 때 그녀가 눈을 뜬 적이 있었다. 그녀는 욕조 가장자리에서 고개를 들고 어깨와 가슴께까지 젖은 머리를 늘어뜨린 채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왜 더 일찍 당신을 찾지 못했을까?”

그녀가 물었다.

“난 찾기 어렵거든.” (86)


찾기 어려운 케일럽이다. 귀여운 답이라고 생각해 밑줄 쳤다가 나중에야 놀란다. 의미심장하다. 25년 전 실종과 어떤 것을 포함하리라. 독약, 알코올(특히 압생트), 환각, 초상화, 추적추적 비, 안개…… 책 표지와는 이미지가 영 다르다. 제목만 보고 디자인한 모양이다. 더구나 스티븐 킹 옹의 추천사가 띠지도 아니고 날개도 아니고 뒤표지도 아니고 표지에 떡하니 박혔다. 유치한 디자인과는 별개로 19세기 말 풍 퇴폐와 죽음의 분위기가 왜인가 했더니 (압생트와) 화가 존 싱어 사전트가 관련어이기 때문이겠다. 독약 ‘철학자’가 아니고 독약 ‘예술가’인 점도 힌트다. 마구잡이 독서하던 중 흡인력은 단연 돋보이는 책이다. 데보라 데이비스의 <존 싱어 사전트와 마담 X의 추락>을 내처 읽으면 참 좋겠다만 내 책탑에 없다. 대신 마구잡이 책 중 또 하나의 빨간 표지 스릴러를 이어 놓는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도널드 레이 폴록 지음, 최필원 옮김/은행나무

윌러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1945년 전쟁에서 돌아온 윌러드는 고향을 떠나 그리 멀리 않은 곳에서 결혼하고 정착하여 아들을 낳고…… 광신자가 된다. 부인이 암에 걸리자 윌러드는 기도하고 제물을 바치며 더…… 광신자가 된다. 다음으로 샌디와 칼이 소개된다. 도로를 쏘다니며 히치하이커들을 사냥하는 커플이다. 샌디는 웨이트리스, 칼은 자칭 사진작가다. 한편 윌러드의 고향 마을에선 윌러드의 모친과 외삼촌이, 고아가 된 아이 하나를 키우며 살고 있다. 새로 온 전도사가…… 음(귀찮다는 뜻), 그러니까 오하이오주, 윌러드가 정착한 마을과 고향 마을 두 곳의 사람들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8년이 흐르는 동안 따로 흩어져 있던 이야기들이 도로에서, 끝에서 다 만난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단다. 광신자, 변호사, 전도사, 보안관, 심지어 피해자 모두 속에 존재한다는 건가. 자극적이고 죽음이 숱하다. 자극적인데 밍밍해. 미안하지만 솔직히,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고 말았다. 원제가 The Devil All the Time이다. 내겐 킬링 타임이고. 한 군데 밑줄 쳤다.


“웨스트버지니아 루이스버그의 톰프슨 보안관이 전화를 걸어왔어요. 들어오자마자 연락 달라더군요.” 그가 보데커에게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네주었다.

“윌리스, 이 숫자, 5야 6이야?”

경관이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9입니다.” (307)



빨간 맛이 같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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