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아 봅니다. 방구석 안읽쌓탑에 후보들은 즐비한데 미처 펴보지 못해 아쉽고 미안합니다. 시간은 빠르고 팬데믹은 우울하고 퍼즐은 재밌어서 그랬습니다. 어찌어찌 훅 지나간 2020년 출간+완독한 책 중 완소 10권을 추렸습니다.
1. 올해의 죽음
적대적 상황에서의 생존 메커니즘 | 올리비아 로젠탈 | 한국화 옮김 | 알마 | 2020년 1월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서바이벌 가이드 아닙니다. 소설입니다. 아 참, 소설 같지 않은 텍스트도 중간 중간에 끼어듭니다. 이게 뭐지? 하는 사이 리듬에 올라타고 있었습니다. 가끔 등장하는 긴 호흡의 문장이 무척 멋지거든요. 이야기 혹은 꿈, 또 혹은 기억 그도 아니면 분위기 다섯 개가 연작을 이룹니다. 올해 가장 독특한 작품으로 기억합니다. 올 여름 어떤 한 죽음 무렵 읽었던 책이라 더 각인됐지 싶습니다.
2. 올해의 테러
인형의 주인 | 조이스 캐롤 오츠 |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8월
재밌습니다. 무섭습니다. 오, 빅마마...
3. 올해의 모로코
탄제린 | 크리스틴 맹건 |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9월
위의 오츠 선생 추천사가 달린 책입니다. 믿고 봐도 좋겠다 싶었지요. 믿고 봐도 좋았습니다. 오츠 선생 문장에 덧붙여 써봅니다. 하이스미스의 씁쓸함, 길리언 플린의 의심스러운 화자, 가스등이펙트의 미묘한 권력 행사가 한 권에 다 들었습니다. ‘탕헤르의 나른한 공기와 태양’이라고 하면 이 또한 편견일까요. 조심스럽습니다(가보고 싶습니다). 아무튼 현기증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4. 올해의 여행
카뮈 | 최수철 | 아르테 | 2020년 1월
가보고 싶다고 쓴 김에 알제리와 프랑스를 이어 놓습니다. 작가과 장소와 작품이 균형감 있게 녹아든 카뮈 해설서입니다. 제 생각에 <결혼 여름>을 읽은 독자라면 향수와 더불어 더욱 와 닿을 듯합니다. 가보지도 못한 장소가 그리울 수 있는 건 정말이지, 문학이 하는 일일 겁니다. 고퀄 사진도 덤입니다.
5. 올해의 비행기
플레인 센스 | 김동현 | 웨일북 | 2020년 6월
비행 중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을 간단히 다뤘겠지 하는 기대로 열어 봤습니다만 큰 감동을 먹고 덮었습니다. 이렇게까지 많은 내용이 들었을지 몰랐습니다. 보관함에 있던 다른 비행기책들(네, 관심 분야였습니다)을 삭제했습니다. 이 한 권이 제게는 역할을 거의 다 했거든요. 하이재킹이나 테러, 밀항 에피소드 뿐 아니라 비행기 구조와 각 부분의 역할, 유명 제작사들의 기종 등을, 질 좋은 시각 자료 첨부해 잘 설명해줍니다. 특히 좋았던 건 보잉과 에어버스의 연혁 소개 부분이었습니다. ‘강인함과 섬세함의 경쟁’이라는 소제목 아래 보잉과 베테유의 철학을 각각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비행 중 내 위치를 알기 위한 노력, 경도 측정 관련 시계 발명 일화는 사이먼 윈체스터 <완벽주의자들>에서 본 내용이기도 해서 반가웠습니다. 저 유명한 존 해리슨 시계 말이죠. <완벽주의자들>은 롤스로이스 엔진과 관련해서도 함께 볼 수 있는 책 되겠습니다. 이 외에도 유명 비행사들, 위성항법, 콜사인, 웨이포인트, 시뮬레이터 등등, 두껍지도 않은 책에 정보가 빼곡하고 뛰어납니다. 기장이 썼습니다. 공학자나 역사가가 쓴 ‘비행서’라면 아마도 이렇게 꾸리지 못했을 겁니다. 항공 기술과 역사가 없지 않으면서도 실제 경험과 배움으로 엮은 내용이 다채롭습니다. 따로 독후감을 쓰지 못해 못내 아쉬울 정도로 고맙게 읽었습니다. 너무 좋아서 한 권 더 사고 싶었습니다. (응?)
6. 올해의 주기율표
주기율표를 읽는 시간 | 김병민 | 장홍제 감수 | 동아시아 | 2020년 4월
역시 독후감을 남기지 못했네요.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와 묶어 포스팅해야지, 하고 있다가 게으름에 지고 말았습니다. 빼곡하게 붙은 포스트잇 문장들을 어떻게 옮겨 놓아야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도 같습니다. 다만 이렇게 백자평을 쓰기는 했네요. ‘이제 주기율표가 그냥 네모 칸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웨스트민스터 궁전으로 보입니다?) 사물을 이룬 원소들의 개성표, 아름다운 예술작품 같습니다. 친절한 설명 덕분입니다. 책 만듦새도 으뜸입니다. 올해의 책으로 꼽습니다.’
7. 올해의 소설
엄마의 반란 | 메리 윌킨스 프리먼 | 이리나 옮김 | 책읽는고양이 |2020년 10월
작은 책에 단편 4개가 묶였습니다. ‘나이 든 여성들, 꼿꼿함, 배려, 부드러움’이라고 메모를 남겼네요. 참 좋았습니다. <세계 호러 걸작선 2>와 <고양이를 읽는 시간>에도 프리먼 선생 작품이 한 편씩 실렸으니 찾아봐도 되겠습니다. 책읽는고양이 출판사의 얼리퍼플오키드 시리즈 3권을 다 보았는데 하나같이 훌륭합니다. 모두 짧아 아쉬울 정도로 말이죠. 시리즈 순서대로 이렇습니다. 케이트 쇼팽, 이디스 워튼, 그리고 메리 윌킨스 프리먼. 지금까지는 프리먼 선생이 가장 큰 발견이었습니다.
8. 올해의 스릴러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 올가 토카르추크 |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가장 나중 나온 번역본 토카르추크를 가장 먼저 만나보았습니다. 듣기로는 토카르추크 작품군에서 ‘튀는’ 소설이라지만 뭐 어떻습니까. 무려 스릴러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더구나 이 책에서는 윌리엄 블레이크도 재발견하게 됩니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라는 제목 출처이기도 한, 영국 시인 화가 판화가 말이에요. <천국과 지옥의 결혼>이 보관함에 들어갔습니다. 걸출한 캐릭터 두셰이코 선생을 만나 첫 인상 좋게 (꽤 까다롭다는) 토카르추크 님께 다가갑니다.
9. 올해의 명왕성
뉴호라이즌스, 새로운 지평을 향한 여정 | 앨런 스턴, 데이비드 그린스푼 | 김승욱 옮김 | 황정아 해제 | 푸른숲 | 2020년 10월
행성 지위를 잃어 더욱 애틋해진 하트 소행성 플라이바이 기록입니다. 뉴호라이즌스호를 쏘아 올리기 위해 벌인 경쟁과 정치를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자와 공학자 들의 훌륭함을 봅니다. 논픽션이 전하는 감동이 큽니다. 사진 자료도 멋져서 계속 간직하고 싶은 책입니다. 물론 누군가 옆에서 침 흘리며 쳐다본다면 슥 뽑아 주고 말겠지만요.
10. 올해의 아룬다티 로이
지복의 성자 | 아룬다티 로이 |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그렇습니다. 제 완소 작가인 만큼 장르가 아룬다티 로이입니다. 소설가로서는 과작(寡作) 작가여서 더욱, <지복의 성자> 출간은 2020년의 큰 사건이었습니다. 여름에 읽었는데 미루다가 독후감을 쓰지 못했네요. ‘복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구자라트 학살, 이슬람 사원 파괴, 언론-관료 간 유착, 카슈미르 저항 운동, 숲 마오주의자들에 대한 폭력, 철 조각품 얘기(정부와 기업의 광물 착취)’ 등의 메모가 남아 있습니다. ‘아아, 멋져’로 시작하는 제 독후감 한글파일에는 사진만 있네요. (왜 이럴까요) 지금은 <자본주의: 유령 이야기>까지 획득하였습니다. 언젠가 아룬다티 로이를 모두 다시 일별할 때 <지복의 성자>도 한 번 더 읽어볼 예정입니다. 멋진 지식인 활동가 저자 로이 선생입니다.
알라딘 기록에 의하면 2020년에 308권을 샀습니다. 어제 마지막 주문을 했으니 312권 되겠네요. 작년보다 많이 줄어 뿌듯합니다만 읽은 책도 그만큼 줄었다는 함정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많이 읽고 쓸수록 사는 권수도 많아지는 모양입니다. 올해는 읽다 만 책도 꽤 있고 독서 기록도 게으르게 썼습니다. 첫 책 에드워드 불워 리튼 <폼페이 최후의 날>부터 마지막 책 루이스 세풀베다 <역사의 끝까지>까지 채 120권을 못 읽었습니다. 어처구니없어서 284권! 읽으신 이웃님 서재에서 그저 웃고 나왔네요. 200권 읽자고 작년 기록에서 말했는데. 망했지요? 2021년 독서 계획은 그래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아무려나, 곧 구랍이 될 오늘입니다. 해피 뉴 이어!
P. S.
2020년 마지막 지름이 도착했습니다. 한밤 칵테일 마시려고 디카페인 콜드브루를 샀습니다. 지금 마시고 있고요. 2년에 걸쳐 마실 요량입니다. <한순간에> 랜덤 장갑으로는 베이지색을 받고 싶었는데 브라운이 왔어요. 요것도 예쁘네요. 껴보니 톡톡하고 귀여운 촉감입니다. 손에 아주 밀착! (작은 건가?) 양말은 까만 스마일로 선택했습니다. 새해 첫 책으로 <새해>도 좋겠으나, 무계획이 계획이므로 아무 말 않겠... 아듀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