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품 Smoking

하품 (특별판) - 8점
정영문 지음/작가정신


잠시 우리는 아무 말도 않고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점점 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지만 그것을 견디고 있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딜 수 있다는 게 견딜 수가 없군, 나는 중얼거렸다. (55)


내 이럴 줄 알았다. 하지만 어떻게 줄기차게 이럴까. 문장에 이름표를 달고 있는 사람 있다면 내게는 정영문이다. 당연히 명시적으로는 아니고 투명하게. 쉼표에, 자간에, 행간에, 엉뚱한 유머에, 이상한 슬픔에, 그리고 무엇보다 권태와 소멸감에. 하품, 하지는 않았고 <오리무중에 이르다>를 아직 사지 않았구나, 생각했다. 동물원 벤치에서 주고받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언급된 ‘나’의 오리궁둥이 때문에 떠올린 오리무중은 아니다. 감상문보다 더 긴 발췌문이라니 속상하군, 중얼거린다.


나의 삶은 어느 한순간, 작은 충격에도, 아니, 아무런 충격이 없이도 완전히 무너져내릴 수도 있는 허술한 구조를 갖고 있는 것처럼 여겨져. 내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그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 다시 말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 옳을, 이 삶, 그것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인지도 모르겠어. 그 시작에서부터 무산된 이 삶은 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지도 모르지. 내게 있어 삶이 의미 있었던 것은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한에서였을 뿐이야, 그가 말했다. (60-61)





리틀 브라더 Smoking

리틀 브라더 (특별판) - 8점
코리 닥터로우 지음, 최세진 옮김/아작


SF인가, 다큐인가, 싶은 청소년 소설. <1984년>의 통쾌한 버전. 우리에게는 작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와 함께 떠오른 작품. 그에 따라, 다시 생각나 위키백과 ‘테러방지법’을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소설의 큰 줄거리가 고스란하다.


테러방지법에서 테러단체나, 테러주체를 가리키는 기준이 매우 주관적이고 애매하기 때문에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법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으며, 또한 비슷한 법률인 애국자법을 예로 들어, 미국에서 개인의 자유 침해로 폐지되었다는 논거를 펴기도 하였다. 또한, 국가적인 안보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위키백과,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중)


‘돈은 없지만 시간은 남아도는 아이들의 능력’(121)이 존경스럽고 사랑스럽기도 해서 그저 넋 놓고 봤다. 유머와 갈등과 감동이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끌어가는 가운데, ‘청소년 소설답게’ 가끔씩 설명충 문장이 튀어나오는 점은 감안해야겠다. 그 와중에도 미국 고등학교 좋네? 사회 문제로 진지한 토론을 하는 게 수업이네? 정학 중에 받는 과제도 너무 좋은데? 하면 논점을 흐리는 짓이겠지만, 이미 해버렸군. 게임에 서툰 꼰대 기자들 마냥.


어느 캐릭터가 기자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기자들은 완전 초짜라서 캐릭터 조종법을 파악하느라 이것저것 누르다보니 캐릭터가 주정뱅이처럼 비틀거리거나 사방으로 흔들거렸고, 가끔 잘못된 자판을 눌러 낯선 캐릭터에게 그나마 몇 안 되는 아이템을 줘버리거나, 실수로 상대 캐릭터를 끌어안거나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 (312)


깔깔거리며 읽은 부분인데 이미 게임과는 담을 쌓은 꼰대-나이기에, 내가 나를 보고 웃은 것도 같다. 유연한 뇌와 상상력의 소유자들, ‘기존의 가정을 완전히 뒤집어 전혀 다른 세 번째 해결책을 생각해’(159)내는 존재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다. 희망이 있고 변화가 있을 것인데, 그 방향은 자유와 존엄이겠다. 길을 막는 꼰대는 되지 말아야지.




https://www.youtube.com/watch?v=lM9BMVFpk80


영어 과제로는 비트 세대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시티라이트 서점 위층에 있는 방은 훌륭한 정보의 도서관이었다. 거기서 앨런 긴즈버그와 그의 동료들이 급진적이고 약에 취한 시들을 창조했다. <울부짖음Howl>을 영어 시간에 배웠는데 첫 부분을 읽었을 때 척추를 따라 온몸이 짜르르하게 전율하던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292)


 


3박4일 인천 술이깰때까지자시오



차이나타운에 있었고 월미도에 있었고 송도에 있었다. ‘쇠락’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쓴 것 같다. 월미도에서는 쥐를 봤다. 기겁하고 도망치다가, 음악분수에서 간혹 밖으로 뿜어대던 물줄기를 정통으로 맞았다. 나만. 물에 젖은 생쥐 꼴로 인천 에세 아이스를 사 피웠다. 쥐가 웃었겠다. (정선생도 좀 웃었다.) 정 떼기 좋은 월미도다. 찹쌀탕수육과 유니짜장을 먹었고 인천 목살과 상추를 먹었고 인천 만두를 먹었고 송도 애슐리의 잡다한 것들을 먹었다. 고량주와 인천(칠레) 포도주와 인천(프랑스) 포도주와 인천(호주) 포도주를 마셨다. 알라딘 인천구월점에서 중고책 네 권을 사고 배다리 헌책방에서 <김영태 시전집>을 샀다. <랍스터>와 <싱글맨>을 정선생 노트북으로 봤다. (정선생은 <싱글맨>을 종종 <킹스맨>이라고 했다.) 인천별장은 정선생의 독립공간인데 내가 더 좋아했다. 선물로 사 간 내 스파트필름은 해체당해 일부는 카뮈+사르트르 잔에도 담겼다. 정선생은 카뮈+사르트르 잔 세트를 좋아했다. 포도주에는 질렸다고, 마지막 날 말했다. 정선생 한동안은 소주만 마시겠군, 나는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1200번 버스는 인천별장에서 합정까지 바로 온다. 이상하게도 까마득한 게, 어디 외국에라도 다녀온 느낌이다. 주인 기다렸던 술집 손님 계시다면, 안녕?


<킹스맨>, 아니 <싱글맨> 조지도 La Wally를 듣더라. 나는 <디바> OST 버전으로 갖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LrgaYtDJXI


완벽한 호모 사피엔스가 되는 법 NoSmoking

완벽한 호모 사피엔스가 되는 법 
닉 켈먼 지음, 김소정 옮김/푸른지식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살인은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행동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만약 사람을 살해하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사람이라고 믿을 것이다. (204)


안드로이드 화자가 후배 안드로이드에게 남기는 지침서. 어떻게 하면 더욱 인간스러운 모습을 취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바탕체로 된 22일간 일지는 소설 같고, 고딕체로 된 ‘인간 관찰 보고서’는 말 그대로 인간을 관찰하며 남긴 기록으로 '미래 로봇이 알아야 할 인간의 모든 것'이란다. 50여 년 전 피에르 불의 <혹성 탈출>에서 유인원으로부터 관찰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로봇으로부터 관찰 당하는 설정, 시기상 매우 그럴싸하다. 다만 일지-소설은 좀 후졌고 관찰 보고서는 참신한 맛이 없다.


참신한 맛이 없다? 우리를 우리에게 설명해주니까 당연하기도 하겠다. 극히 제한적인 감각 수용과 데이터 처리 능력을 가진 주제에, 하는 짓이라곤 고작 비효율적인 노동. 돈의 노예인데다 짝짓기나 신경 쓰며 이기적이고 경쟁을 일삼으며, 중독에, 폭력에, 반칙에, 위선에, 자기 파괴욕망…… 인간, 너 자신을 좀 돌아보아라. 겨우 이 따위 존재임을, 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면 그래, 참신할 수가 없을 터다.


안드로이드가 쓴 긴 한 편의 블랙 유머. 심각하게 읽으면 지는 거다. 지는 거다? 이겨서는 뭐하게? 그냥 ‘이런, 이게 바로 나야.’ 라고는 하지만, 그리고 통계상 인간을 그려보이고는 있겠지만, 보수적인 인간관이 불편한 점 없지 않다. 다만, ‘한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 전부는 고사하고 단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상태도 무한하기 때문에(카오스), 한 사람만 연구해도 끝이 없는 거야(프랙탈).’(26)라고 말해주는 장면은 고맙기까지 했다고만 쓰자. 아름다운 문장이 없었던 건 아니어서, 마지막 긴 발췌.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우리가 인간성을 경험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사람들이 석양을 바라보면서 경험하는 감정과 비슷하지 않을까?’였어. 매일 찾아오는 석양은 본질적으로는 프랙탈이지만 그 순간순간은 예측이 불가능한 카오스니까. 사람들이 석양을 볼 때마다 황홀해지는 건 그 모습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일 거야.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인생이, 자기가 속한 사회가 사실은 자신만의 석양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야. 우리 안드로이드에게는 사람을 바라본다는 건 매일매일 저무는 석양을 보는 것과 같은데 말이야. (26-27)




https://www.youtube.com/watch?v=Llf6t6KgQqY



좀비 연대기 Smoking

좀비 연대기 - 8점
로버트 E.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책세상
 

엮인 작가들의 연식을 본다면 작품집의 분위기를 미리 조금은 알 수 있을 듯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중반의 생몰 기간. 시기가 시기인 만큼 피부색에 따른 신분차이가 있다는 점 감안하고. 책세상의 ‘클래식 호러’라는 시리즈 이름이 걸맞은 중후함이다. 그러니까, 진화 또는 변용, 변질되기 전의 (클래식) 좀비를 구경할 수 있다. 몇 년 전 읽은 좀비 르포르타주 <나는 좀비를 만났다>(웨이드 데이비스, 메디치, 2013) 옆에 꽂아둬도 될 성싶다.


아이티와 주변 섬들, 그들의 먼 고향 아프리카 등이 배경이다. 오컬트적 요소, 주술과 초현실적인 주문(呪文)뿐 아니라 H. G. 웰스의 모로 박사 같은 이가 등장해 과학 실험도 전격 시행…… 호러다. 주술사보다 (미친) 과학자를 더 무서워하는 내게는 마침맞은 안배다. 물리면 전염(?)되는 요즘의 좀비는 좀 이상하잖아, 그건 드라큘라잖아, 싶었던 이라면 읽어보시길. 뱀파이어, 늑대인간, 전염 바이러스까지 혼융된 요즘의 그것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의 좀비물이다. 괴물이나 좀비 자체가 대책 없이 무섭다기보다<프랑켄슈타인>처럼 우울하고 슬픈 뒷맛이 묵직하다.


아이티의 원주민들은 요즘에도 외딴 농가 근처의 사탕수수밭에서 좀비들이 일을 한다고 믿고 있다. (…) 그래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좀비로 의심되는 자에게 짠 음식을 줘보면 된다. 좀비는 소금을 먹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좀비에게는 소금 맛을 보고 나면 자신이 죽었음을 깨닫고 무덤이 어디에 있든 기필코 자신이 묻힌 곳을 찾아가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220,「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이네즈 월리스)


갑자기 소금이 당겨……. 순대라도 사러 가야겠다. 좀비아님인증하려는 건 아니다.



0807: 제목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술이깰때까지자시오

최근 제가 가장 많이 본 동영상. 그냥 모셔오기로. 카피레프트이겠지요?



www.youtube.com/watch?v=tXp7eL_83CI



다음 사람을 죽여라 Smoking

다음 사람을 죽여라 - 8점
페데리코 아사트 지음, 한정아 옮김/비채

 

“마음은 마술 상자야. 속임수가 가득하지. 우리에게 경고할 방법을 항상 찾아내. 우리에게 탈출구를 제시할 방법, 문을 제시할 방법을…….” (199)


탈출구. 원제도 그것이다. <마지막 탈출구>. 알라딘에 ‘구매’ 표식꼬리 없이 좋다는 평이 너무 많아서 반인반신, 아니 반신반의하면서 펼쳐본 책. 허나 과연 두툼한 쪽수가 허투루 쓰이지 않은 내용이다. 진행도 어찌나 짜임새 있는지 홀딱 반했다. 영화화를 탐낼 만도 하다 싶다. 편집증을 소재로 한 범죄물이 새로울 건 없는데, 새롭다. 진행순서를 달리 했다면 진부해졌을지도 모를 일. 영화로 나온다고 해도 원작을 따라올까 싶은 걸출함이다.


이야기를 박진감 넘치게 전달하는 방식을 아는 사람이 작가인가 보다. 520여 페이지가 짧게 느껴지는 정도의 흡입력. 이것 또한 큰 음모의 일부일 거야, 하게 되는 매 과정. 무엇보다, 독자로 하여금 캐릭터에 대해 관심과 연민을 갖게 하는 점이 작가의 역량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캐릭터에 대한 관심, 그렇다. 곰곰 생각해보니 그것만큼 소설을 계속 읽게 하는 힘이 있겠나 싶다. 누군가 얘기했듯, 주인공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헤어지는 일이 몹시 아쉬웠다.

 

“야.” 테드가 말했다. “침대에 노트 펼쳐놓고 나갔더라…….”
저스틴이 그 말의 의미를 즉시 알아차리고 깜짝 놀랐다.
“진짜 좋더라, 저스틴.” 테드가 그를 안심시켰다.
“오, 하느님, 부끄러워 죽겠다. 그냥 연습 삼아 끼적여보는 거야.”
“아주 잘 썼던데.”
저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테드.”
“진짜야.”
“진짜 그렇게 좋다면 주인공에게 네 이름을 붙일게.”
저스틴이 테드에게 윙크했다. (383-384)




8월 첫 알라딘 술이깰때까지자시오


이렇게 엉망으로 도착한 박스는 처음. 터지기까지 했던 모양으로, 덕지덕지 테입질 아고 불쌍해. 참, 저 안에 잔이 세 개나 들었는데;;


책 모서리들은 좀 구겨졌지만 중요한 잔들(응?)은 무사하다. 깔끔한 디자인의 카뮈+사르트르 잔은 정선생 이사한 집에 선물로 줄 거야…… 싫어하면 어쩌지.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NoSmoking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오생근.조연정 엮음/문학과지성사


46 빈손

당신을 원하지 않기로 한 바로 그 순간 나는 떠돌이가 돼 그것을 놓았는데 다른 무얼 원할까 그 무엇도 가지기가 싫은 나는 빈손, 잊자 잊자 혀를 깨물며 눈을 감고 돌아눕기를 밥 먹듯, 벌집처럼 조밀하던 기억의 격자는 끝내 허물어져 뜬구름, 이것이 내가 원하던 바로 그것이긴 한데 다시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렇게 잊혀지고 말 수가 있을까 바로 그 때문에 슬픔은 해구보다 더 깊어져 나는 내 빈손을 바라보다 지문처럼 휘도는 소용돌이 따라 망각의 우물로 더 깊이 잠수하며 중얼거려 잊자 잊자

(221, 성기완,『유리 이야기』(2003))


 

요즘 3호선 버터플라이엔 성기완 시인이 없다.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어 더 슬픈데. 문지시인선 500호. 독자들이 직접 뽑은 시 12편이 실린 필사노트 <그대가 있다>가 같이 왔다. 예쁘다. 12편 주인공은 누구인가. 기형도, 김소연, 심보선, 오규원, 이병률, 이성복, 이장욱, 최승자, 한강, 허수경, 허연, 황동규. 없는 진은영을 하나 더 발췌.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240-241, 진은영,『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


 

내 책꽂이 문지시인선은 이렇다. 출간 순서대로 놓긴 했는데, 가장 좋아하는 시집이 제일 위에 있기는 하다. 내처, 500호 기념시도 지어, 아니 조합해보고.


오늘은 잘 모르겠어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잘 모르는 사이
새벽에 생각하다
빈 배처럼 텅 비어
슬프다 할 뻔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
내 생의 중력
가능세계
뜻밖의 바닐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사랑이라는 재촉들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취한배, 「열여섯 개의 시집제목으로 된 시」) 500호 축하합니다. 등장순서대로 땡스투. 심보선, 임솔아, 박성준, 천양희, 최승자, 구광렬, 이제니, 황인숙, 서정학, 신영배, 400호, 백은선, 이혜미, 이장욱, 유종인, 500호.



퀴르발 남작의 성 Smoking

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문학과지성사


오싹 시원해지고 싶어서 펼친 최제훈. <드라큘라> 분위기일줄 알고. 오싹 시원해지기보다는 시끄럽고 난리법석이다. 어찌 보면 유명 원작들 이어 쓰기 혹은 개성적인 리뷰 같은 느낌도 든다. 퀴르발 남작 전설(?), 셜록 홈즈, 마녀, 프랑켄슈타인 등. 등장인물 뿐 아니라 원저자를 이야기 속에 함께 집어넣어 빈틈을 공략하거나 메우는 솜씨와 상상력. 거기에 웃음 요소까지 갖추었으니,


저…… 오빠가 한번 만나보실래요? 내가? 화들짝 놀라 하품을 했다. 놀라면 하품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210,「마리아, 그런데 말이야」)


이런 농담 좋아. 정영문 작가의 <하품>이 보고 싶어 좀 전에 주문한 건 딴 얘기. 농담 스타일이 통하지 않음은 거의 정치색이 다른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던데. 최제훈 작가의 가벼운 농담부터 유명작품 헤집어 놓거나 돋보이게 하는 농담까지 빼곡한 여덟 편이다. 마지막 단편에는 이전 일곱 작품 캐릭터들이 모두 다시 등장하는 난리법석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가 기다리고 있다. 연작으로 읽힐 법한 이런 장치까지도 앞서 작가가 원작 안과 밖을 넘나들던 기조여서 일관성 있다고나 할까. 해설에서 남발하곤 하는 장식적 수사 끝판왕 문장을 보고 마지막으로 오싹 웃음을 터뜨리며 끝.


형식적으로는 이질 혼성적 편집의 미학이 돋보이고, 수사학적으로는 은유의 적층 속에서 환유의 미끄러짐을 통해 문화사적 의미망을 재해석하려 한 점이 눈에 띈다. (288, 해설)


퀴르발 남작의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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