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 NoSmoking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 
델핀 미누이 지음, 임영신 옮김/더숲


최근 들어 훅 가깝게 느껴진 나라가 있었을 텐데, 시리아다. 반군과 정부군과 이슬람국가(IS)와 열강들이 얽혀 복잡한 형국이라는 느낌만 어렴풋할 뿐 어디서부터 알아봐야 할지도 난감한 게 사실이다. 역사는 길고 주변국들은 많으며 종교, 종파 문제도 있다. 그럴 때 가장 손쉬운 접근은 어느 한쪽의 목소리를 듣는 거다. 나한텐 그렇다. 어느 한쪽이라니. 권력을 가지지 않은 시민을 말함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핍박 받는 쪽 말이다.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이 마침맞게 그런 책이다. 커다란 판세나 정치구도를 큰 그림으로 그려주지는 않지만, 아사드 정권에 의해 포위된 도시를 지켰던 이들 목소리를 들려준다. 논픽션이다. 사람들, 즉 목소리와 얼굴, 개성과 꿈을 가진 몇몇 사람을 마음에 그리게 되면 더 이상 나와 상관없는 먼 나라 구름 잡는 얘기로만 머물지 않게 된다. 앞으로 접할 시리아 뉴스도 더는 뜻 모를 아랍어처럼만 들리지는 않으리라. 아흐마드, 샤디, 아부, 후삼, 무함마드, 오마르 등이 그들이다. SNS에서 다라야 지하 도서관 영상을 본 저자가 수소문하여 찾아낸 주인공들이다.


포위된 도시에 스스로 남기를 선택하여 정부군에 대항했던 일반인들이다. 그저 대학생이었거나 가장이었거나 약혼자와의 결혼을 꿈꾸던 이들. 2011년 혁명을 환영했던 이들. 그에 따른 보복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가던 마을에서 그들이 한 일은 다라야의 책을 지키고 읽는 것이었다. 4년을 그렇게 보냈다. 독재 권력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지만 그들 자신을 지키고 성숙시키기 위한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독재자 아사드가 눈을 감고 있다고 고발하는 자신들은 눈을 떠야겠기에. “책은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수단이자 영원히 무지를 몰아내는 방법입니다.”(035) 책쟁이 동지로서 궁금할 수밖에 없는 점. 어떤 책들일까. 대표적으로 이븐 할둔의 <역사 서설>(으흥;), 코엘료의 <연금술사>(흠.),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이렇게 다라야에서 삶은 이어지고 있었다. 소위 ‘신에 미친 사람’으로 왜곡된 이들은, 다마스쿠스의 정권이 선동하는 고리타분한 사상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인 ‘자아’를 계발하고 있었다. 살육에 목마른 무법자나 정권이 선전하고자 하는 이슬람의 도구 같은 이미지와 모순되는 개인적인 과정이다. (128-129)


다라야는 끝내 아사드에게 넘어갔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과 책이 패배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역사는 억울하게도 천천히 말하니까. 저자가 아흐마드에게 들려주는 독일 베벨 광장의 ‘침몰한 도서관’ 얘기는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나중에 역사가 들려줄 우리 모습이 부끄럽지 않으려면 지금, 싫어하거나 무서워하기 전에 적어도 알려고 해야 하겠다. ‘모르겠고, 수염 기른 남자들, 베일 쓴 여자들은 다 테러범’이라 여기며 혐오하기 전에 말이다. 제국주의를, 독재를, 광주를 겪어본 어떤 나라가 그때까지 인권이나 인류애 따위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더라는 기록이 미리 부끄러워지려는 2018년에 읽었다.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전갈자리. Smoking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박연준 지음/알마


프리다 칼로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고집불통, 사랑의 폭식자,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에 매달려 펄럭이는 깃발, 사랑이 지배하는 식민지다. (16)


지독한 사랑입니다. 피 낭자한 아픔이고 강렬함입니다. 과연 괴롭습니다. ‘예술로 승화한 고통’이라고 진부하게 쓸 뻔하다가, ‘고통을 벽에 걸어두었던’(91) 화가라고, 시인의 말을 빌려옵니다. 프리다 칼로 그림을 ‘번역한’ 시 열 편과 편지, 산문이 책 한 권을 이루었습니다. 박연준 시인입니다. 그림과 시의 만남, 그림 번역이 근사합니다. 편지와 산문으로는 시인의 신변 근황을 알려주네요. 그것까지 알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알게 돼버렸습니다. 그래요, 사랑이라니까요.

돌보아야 할 사랑이나 그로 인한 고통이 없는 내게 밤은 짧고, 평화롭습니다. 내 밤이 늘 이랬던 건 아닙니다. 내 고통은, 오래전에 예술은커녕 토사물과 똥으로 흘러나간 그것은 수소 산소 질소 탄소 등으로 분해되어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을 겁니다. 짧고 평화로운 밤을 내게 주기 위해. 그러나 고통스럽게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를 읽게 하기 위해. 어쩌겠습니까, 사랑을 멈추지 말라는 책도 열어 보고 막 그럽니다.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이종산 외 지음/큐큐


부끄럽게도 나로선 모두 처음 만나는 작가 여섯 명입니다. 실린 소설도 여섯 편이지만, 각 작품이 모티브를 취한 고전 작품이 있으므로 총 열두 편을 읽어야 완독한 느낌이 들 듯합니다. 우리 현대 작가가 소환한 고전 작품이 이렇습니다. 캐서린 맨스필드 <가든파티>, 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 중 ‘애러비,’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허먼 멜빌 <선원, 빌리 버드>, 셰리든 르 파누 <카밀라>, 미야자와 겐지 <은하철도의 밤>.

<더블린 사람들>과 <선원, 빌리 버드>를 못 읽어봤습니다만 나머지 네 편으로만 봐도 모두 매력이 넘치는 고전입니다. 조이스와 멜빌은 ‘후일담’(기획의 말, 최성경)과 순서를 바꾸어 내게 오게 되겠네요. 그것도 특별한 독서가 되지 싶습니다. 작가들 개성을 따라, 애틋하고 아련하고, 때로는 아프고 어둡게 또 신비롭게 읽다가 마지막 작품에 이르러서 ‘어머나 깜짝이야,’(178, <유월 열차>, 김봉곤) 했습니다. 아픈 꿈처럼 다시 환기되는 <은하철도의 밤>입니다. 어쩜 이토록 멋진지. 보관함에 들어 있는 <여름, 스피드>가 더 반짝반짝 빛을 내는 것 같습니다.


열차는 다시금 출발해 너와 나를 스쳐 지나가는데, 지난밤과 낮 우리를 둘러싸던 그 노래.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제발 멈추지 말아요 하고 반복되던, 고작 사랑이지만 결국 사랑이라고 울려 퍼지던 그 노래를, 무너질 듯 무너지던 천장, 은하처럼 반짝이고 터지던 미러볼, 깊은 밤 나는 흥얼거리는 걸 멈추지 못하면서, 조금은 울면서, 점점 더 멀어지면서, 우린 하나가 되진 못하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둘쯤은 될 거라고, 눈을 뜨면 사랑을 할 테고, 이대로 눈을 감아도 사랑을 하는 거라고, 사랑하는 류, 당신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고. (197-198, <유월 열차>, 김봉곤)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특별판) 
이응준 지음/작가정신


공교롭게 전갈자리로 이어집니다. 김봉곤 <유월 열차>의 ‘전일담’ <은하철도의 밤>에서도 전갈자리가 나오거든요. 전갈이 타 죽은 불꽃이라는 ‘그 불은 빨간 루비보다도 투명하고 리튬보다도 아름답게, 술에 취한 듯 타오르고 있었습니다.’(<은하철도의 밤>) 이응준의 전갈자리도 붉습니다만 어둡고 처연해, 투명한 루비 같지는 않고 검붉습니다. 피 같습니다. ‘그는 11월의 전갈자리에서 태어났다.’(15)에서 시작해 ‘그의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은 이러하였다.’(112)로 끝납니다.

재벌 아들이 베트남에서 소일합니다. 마약을 합니다. 섹스를 합니다. 미래도 꿈도 없습니다. 퇴폐, 탐미, 어쩌면 데카당스? ‘세기말 우울’이라고 손가락들이 저절로 쓰고 말았는데, 초판 발행이 2001년 3월이라니 그대로 두렵니다. 누아르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느낌입니다. 아, 영화로도 만들어졌던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18년 전 작품을 이제야 만나 좀 머쓱합니다만 오히려 예리한 날이, 벼린 그대로인 듯해서 더 반갑습니다. T가 향로를 녹여 만들었다는 칼처럼 말이지요. ‘잔인한 어둠에 갇힌 한 사내의 몰락을 그리고 싶었다’(11)는 초판 작가의 말입니다. 어둠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는 게 너무 무료했고, 여태 무엇에 고통 받아 왔던가를 알지 못했다. 그는 과연 이것을 인생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주저하고 있었다.
원폭 같은 비가 터졌으면, 버섯구름도 있는. (112)



과학은 논쟁이다 NoSmoking

과학은 논쟁이다 - 8점
장대익/반니


과학은 노잼이다, 로 읽으면 안 된다. (사실은 완독 목록 메모지에 내가 쓴 글씨를 내가 그렇게 읽었다.)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시작된 잡담이 토론 강연회로 이어졌고 그 결과로’(10, 프롤로그, 이명현) 나왔다는 책으로, 과학자와 과학철학자 간 대담이다. 그놈의 페이스북이란 것에는 정말이지 훌륭하고 멋진 컨텐츠가 유통되는 모양이다. (흠. 가입할까.) 네 개의 챕터가 과학일반, 양자이론, 복잡계 물리학, 생물학 논쟁이다. 내용이 심하게 깊지는 않고 길이도 짧아 부담 없다. 인맥은 부담 된다. (응. 가입하지 말자.) 얼굴책facebook으로 만나지 않고 책book으로 만나는 내 이유다. 그나저나 과학철학이란 무엇인지?


과학철학이 과학에 줄 수 있는 것은 이런 낯선 경험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학철학이 현대 과학에 대한 성찰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 과학철학은 현대 과학과 그 응용이 시민사회의 공공선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사회적 정의를 지키고 있는지, 여러 윤리적 원칙의 경계를 위반하지는 않는지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다.  (234-235, 에필로그, ‘과학vs과학철학’에서 ‘과학+과학철학’으로, 홍성욱)


문학vs문학비평 비슷한 관계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지 않을까. 한 우물을 파고 있는 사람에게, 잠깐이라도 지상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라는 식의 환기 역할을 과학철학이 하는 듯도 하다. 위 발췌문에서 중략한 부분에는 이런 글이 들어 있다. ‘화학자들은 다른 사람에 비해 화학물질을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고, 생명공학자들은 생명공학의 잠재적 위험보다는 그 혜택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원자력 전문가들은 원자력의 위험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괴담’으로 취급한다.’(234) 다름 아니라 길이가 아쉬운 이 책 후속편이 나온다면 원자력 전문가와 과학철학자의 '괴담' 토론도 보고 싶다.


다시, 둘의 관계를 쉽게 쓰자면 덕후(과학자)와 지적질러(과학철학자) 사이로도 보이는데 생물학 챕터에서는 그 역할이 오히려 역전된 듯해서 눈에 띄는 동시에 뭐랄까, 든든했다. 이런 책의 장점이라면 앞으로 계속 구해 볼 저자와 그러지 않을 저자를 걸러낼 수 있음이겠고, 그리 되었다. 인간을 ‘향상’시킨다는 말을 주저 없이 한다거나 비장애인을 ‘정상인’(213)이라고 지칭하는 등의 얕은 ‘성찰’을 더 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성형을 해서 외모가 나아지면 짝짓기에 유리하겠지만’(224) 이라고밖에 생각을 못하는 건 진화심리학의 한계인지 저자의 한계인지 모르겠다만 자신의 엉성한 논리를 설명하기보다는 상대방 의견을 ‘생물학적 보수주의처럼 보인다’(228)고 못 박는 자세는 무척 미(비)성숙해 보인다. 인공 신장 이식과 외골격을 늘리는 것(뭔지는 모르겠지만)을 같은 차원으로 놓는 건 어불성설 아닌가. 목숨이 끝나는 것과 신체를 개조하는 차이인데. ‘vs’를 만들려고 애써 ‘급진주의’ 노선 역할 플레이를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무척 후지고 불편한 목소리다. 진화심리학에 대한 내 느낌과 똑같다. '향상' 관련하여 과학자 송기원 교수가 적절하게 지적하는 부분이 이렇다.


차라리 향상이 아니라 취향의 문제라면, 예를 들어서 머리카락 색을 까만색에서 노란색으로 바꾸는 문제라면 저는 동의할 수 있지만, 향상이라는 개념에는 가치의 문제가 들어가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유전자를 우리가 교정해서 향상시킬 수 있다면, 좋은 유전자와 나쁜 유전자를 구분하는 가치 판단이 개입될 확률이 굉장히 높기 때문에 더욱더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20세기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이 가치의 개념이 인간에게 적용됐을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다 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218, 송기원)


그리고 내가 듣고 싶은 과학철학의 목소리는 예컨대 이런 거다.


제가 싫어하는 말이 남성의 뇌와 여성의 뇌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 거의 대부분 같고 통계적으로 조금 다른 것뿐입니다. 통계적으로 다르다고 해도 남성중에는 여성적인 뇌의 특징을 가진 사람도 상당수 있고 여성 역시 흔히 말하는 남성적인 뇌의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 뇌와 여자 뇌는 기본적으로 다르다고 하면서 사회적 편견을 조장하고 확장시키는 데 과학의 권위를 활용하는 나쁜 과학자들이 꽤 많습니다.  (168-169, 이상욱)


통계물리학적 서술과 동역학적 서술을 다루는 챕터에서 나온 얘기다. 각각 많은 수를 입력해서 나오는 거시적인 출력 혹은 예측, 그리고 미시적인 입력에서 나오는 미시적인 출력 혹은 예측을 말함이다. 통계의 폭력을 흔히 겪곤 하는데, 바로 그것이다. 통계에 비해서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할 수는 있어도 누군가를 앞에 두고, 통계가 이러니까 너는 틀림없이 이래, 라고 하는 경우 말이다. ‘여자들은 명품 좋아하잖아’와 ‘노통에 대한 미안함이 있는 사람은 정의당 지지하지 않아(지지하면 안 돼, 에 가까운)’가 최근에 내가 겪은 통계의 폭력이다. 명품 싫어하고 노통에 대한 미안함 있으며 정의당 지지한다. 통계물리학으로만 세상을 볼 것 같으면 누군가를 ‘물리적’으로 왜 만나는지 모르겠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 통계에 비해서 얼마나 다른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에서 만나는 거 아닌가. 귀납적으로 정보를 쌓아가는 게 관심 혹은 만남 아닌가 말이다. 통계 무식하게 쓰지 말자. 끝이 왜 이런가. 평화로운 마무리를 하자면, 과학은 노잼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인문학적으로’ 흥미롭게 읽을 <과학은 논쟁이다>다. 끝.


37쪽. 암흑에너지는 dark energy. dark matter는 암흑물질. 둘은 퍽 다른 것으로 안다.


걸 온 더 트레인 + 인투 더 워터 Smoking

걸 온 더 트레인 - 8점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북폴리오


기차  얘기만 나오는 줄 알고 기대 없이 열었는데 세상에. 알코올중독자가 나온다. 걸 온 더 트레인 위드 알코올. 바람직하지 않게도, 술이 몹시 당긴다. 그래서 같이 마셨다. 레이첼의 만취 바보짓과 숙취 후 자책감에도 함께 부끄러워했다. 구멍 난 진실과 왜곡된 기억과 그걸 이용하는 거짓말쟁이가 적재적소에 배치된 스릴러다. 이혼, 실업, 불임, 알코올의존, 인생 낙오자로 여겨지는 레이첼의 핍진성이 어찌나 뛰어난지, 심지어는 독자들에게도 비호감인 모양이다.

그러니 어쩌랴, 나로선 더 격려하고 안아주고 싶다. 집착과 집요함이 징글맞다 싶다가도 결국 각성에 이르고 자신을 찾으며 진실을 밝힌다. 알코홀릭 가스등 이펙트 정도 되겠다. (술꾼에게는) ‘익숙한 물건 하나’(505/521)의 반격이 통쾌하다. 지나친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마치 프로이트 할배한테 한 방 먹이는 듯도 해서 깔깔 웃었다. 레이첼을 이대로 안아줘도 될지, 다음 폴라 호킨스로 내처 가 본다.


“당신이 날 속인 거야.”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당신은 모든 게 내 잘못이라고 했지. 당신은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믿게 만들었어. 당신은 내가 괴로워하는 걸 지켜보고, 당신은…….” (478/521)


인투 더 워터 - 10점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북폴리오


옳거니. 더 길어지고 더 깊어졌다. 위선과 위력, 거기에 휘둘리는 사람과 침묵하는 사람, 바깥에서 온 사람, 오해를 풀고 성장하는 사람이 골고루 등장한다. 폴라 호킨스는 다른 사람을 조종하거나 조종되는 심리를 잘 아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마녀사냥을 소재로 삼았다. 강을 낀 마을이 배경이다. 작가이자 사진가인 넬이 죽기 전까지 쓰고 있던 글 제목도 ‘드라우닝 풀Drowning Pool’이다. ‘벡퍼드는 자살 명소가 아니다. 벡퍼드는 골치 아픈 여성들을 제거하는 곳이다.’(142/600)

‘골치 아픈 여성’ 즉, 침묵하지 않는 여성,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여성, 진실을 밝히려는 여성 등이 되겠다. 쉬운 단문으로 슥슥 진행하는 솜씨가 끝내준다. 다만 각 챕터들이 제목으로 달고 있는 이름이 화자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 게 약간 산만하다고 할까. 연대와 자매애는 전작과 다르지 않고 거기에 더해 화해, ‘가족의 탄생’까지 이룬다. 서로 안아주는 등장인물들 덕분에 덜 외롭다. 든든한 폴라 호킨스다. 안아도, 안겨도 좋을 작가. 제가 한 패악질에 대해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인간을 그냥 뚝 끊어내어 이후를 알려주지 않는 점도 멋지다. 안물안궁, 개자식아, 식으로.


추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번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용히 말했다.
“내가 네 첫 남자였잖아, 응? 오래전 얘기네.”
그가 웃었다.
첫 남자? 나는 토할 것 같았다.
“아니, **.”
놀랍게도 내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고 또렷하고 크게 나왔다.
“네가 내 첫 남자였던 게 아니야. 네가 날 강간했지.” (392-393/600)



감염된 독서 NoSmoking

감염된 독서
최영화 지음/글항아리

감염내과의사 최영화의 에세이. 정확히는 전공을 살린 서평 모음집이다. 제목 참 잘 지었다. 페스트, 장티푸스, 옴, 에이즈, 콜레라, 말라리아, 천연두, 결핵 등 감염병이 소재로 등장하는 문학작품을 언급한다. 짧은 꼭지들이 싱거운 듯 담백한 듯. 그러면서 가끔 아재/아줌 개그도 없지 않다. 각 작품 발췌문은 원작으로 만나고픈 생각도 들게 해, 당장 이태준의 『무서록(無序錄)』은 보관함에 넣었다. 범우사 (새)문고판이 아직 판매중이라 기분 좋다. 『문장강화』도 여태 완독하지 못한 주제에.


『무서록』중 「병(病)」에서, ‘하 생활이 단조로운 때는 앓기라도 좀 했으면 하는 때가 있다.’(133) 같은 문장을 접했을 때 의사로서 얼마나 반가웠을지, 또 이태준이 ‘앓고 싶은 감염병’으로 제시한 병에 대해 ‘좋은 선택입니다.’(135)라고 덧붙일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이 간다. 해당 병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그에 대한 이태준의 글도 최영화의 글도, 감히 내가 툭 말해버리기에는 너무 아름답거든. 아주대 의료원 소식지에 실었던 칼럼을 모아 묶은 책이라 한다. 진료와 교육 생활 단편도 조금씩 보이는 게, 과연 아주대 의료원 사람들에게는 재미있는 소식지였겠다.

그리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해 마침내 606번째 화합물에서 목적을 이룹니다. 살바르산을 발견한 거지요. 606번째 화합물! 이제는 파울 에를리히와 연결되어 그의 업적으로 남아 있지만 나와 학생들은 이 대목에서 갑자기 샛길로 빠집니다.
“자 여러분! 606번째 화합물까지의 실험입니다. 대단하지요? 500번에서 멈출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끝내 갔지요. 그런데 이 실험은 누가 했을까요? 에를리히 선생이 했을까요?”
“아니요.”
학생들은 우렁차게 대답합니다.
“그럼 누가 했을까요?”
“조교들이요.” (216-217, 이름을 남기지 않는 사람들:『반 고흐, 영혼의 편지』와 항생제의 역사)

 

와일드우드 Smoking

와일드우드 
콜린 멜로이 지음, 이은정 옮김, 카슨 엘리스 그림/황소자리

 

“동생은 갈색 코듀로이 점퍼를 입고 있어요.” 프루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저기, 제 동생은 머리카락이 없어요.” (165/667)


‘머리카락이 없는’ 동생, 그러니까 아기인 동생 맥이 납치됐다. 까마귀 다섯 마리가 물고 날아갔다. 누나 프루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지날 수 없는 숲Impassable Wildness’이라 불리는, 금지된 숲으로 들어간다. 금지됐다하면 들어가게 되는 법. 푸른 수염의 붉은 방인 셈이다. 숲의 숨겨진 모습과 권력구조, 프루 자신의 출생 비밀이 하나 둘 밝혀진다. 숲 속 전쟁과 혁명 등 이야기가 장황하다 싶었는데 와일드우드 ‘연대기’ 첫 권이다.


총 3권 긴 이야기 도입부로서 멋지다. 와일드우드 각 지역과 캐릭터들이 선명해졌고 숲에 남은 누군가는 앞으로 진행될 모험에서 성장소설답게 변태하리라는 예감, 통행증을 받은 누군가는 지금 떠나지만 다시 돌아오리라는 기대, 숲의 권력 다툼과 새 정부 수립에 한동안 진통이 있으리라는 염려, 사람과 동물, 식물이 협력하고 공존하리라는 상상을 하면서 첫 권을 덮게 된다. 그림과 편집이 아름답다는데 전자책으로 봐서 조금 아쉽다. TTS(우는 거 아님) 이용하긴 했다만. 그렇다면 누군가를 안거나 누군가에게 안겨서 종이책 ‘읽힘 당하며’ 같이 보면 좋……을까. 조카는 너무 커버렸다TT(우는 거 맞음). 징그러운 놈.


“친애하는 형제 자매…, 인간 동물 동지들이여! 오늘 우리는 사악한 마녀, 우리 모두를 없애려 하는 마녀와 싸우기 위해 그 동안 서로에게 품었던 원망과 적개심을 잊기로 한다. 오늘 우리는 와일드우드의 산적이 아니다. 오늘 우리는, 노스우드에서 온 겸손한 농부들이 아니다. 오늘 우리는 함께 진군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모두가 형제이고 자매다.(…)” (580/667)


(285/667)


 


11알라딘6 술이깰때까지자시오

사울 레이터 달력+희귀본 득템한 기록.

몬테크리스토 백작 + 타이거! Smoking


   몬테크리스토 백작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이희승맑시아 옮김 / 동서문화사
 
“거봐.” 당글라르가 카드루스에게 말했다. “일은 이렇게 돌아가고 말았어. 이래도 당테스를 변호할 생각인가?”
“아니. 하지만 농담 하나로 이렇게 일이 커지다니 너무나 무서운 세상이야.” (85)


‘농담 하나로’ 일이 커져 1700여 쪽이 되어버린 경우다. 표절이나 같이 쓰기, 다시 쓰기에 능했던 알렉상드르 뒤마라고는 하나 <몬테크리스토 백작> 만큼은 구상부터 집필까지 혼자 작업했다고 한다. 그만큼 에드몽 당테스에 홀딱 감정이입한 아빠 뒤마다. 전지전능, 철두철미, 우아한 신사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통쾌한 복수극이다. 복수하려는 의지가 당테스를 그리 만들었다. 신에 가까워져버린 사람을 부리는 펜은 분명 기꺼웠겠다. 오래 벼린 칼이 날카로워지듯, 긴 시간의 1700여 쪽이 필요하기도 했겠고. 나로서는 <빠삐용>과 뒤섞여 어렴풋했던 기억을 솎아낸 일주일이었다. 이프 섬과 몬테크리스토 섬을 지도에서 확인했다. 그래, 지중해다. 내가 가본 적 없고 언젠가 가볼지도 모를, 너의 바다.


“부인,” 백작이 말했다. “부인께선 지금 혼동하고 계시는군요. 이건 불행이 아닙니다. 이건 벌이에요. 모르세르 씨가 무너진 것은 제가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겁니다.” (1361)

 

 타이거! 타이거! -앨프리드 베스터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고전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들은 이 당시 태양계가 요동치는 이유가 한 인간이 폭발하기 직전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인간을 변형시켜 우주의 주인이 되게 하는 폭발이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25세기를 무대로 걸리버 포일의 복수극은 시작된다. (21)


‘한 인간’이 핵심이다. 걸리버 포일의 복수는 애초에 거창한 인류애나 사회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부서진 우주선에 혼자 버려진 이유, 그리고 곁을 지나가던 우주선이 자신을 구해주지 않은 이유를 찾고, 복수하고자 했다. 정확한 적을 추적하고 사형(私刑)을 하고자 했으나 그 끝에 가보니 딜레마, 혹은 어떤 조금 더 큰 이치에 닿게 된다고 할까. 양심, 삶의 (무)의미, 정보의 불평등 같은 거. 복수 여정 자체가 어쩌면 삶, 배움, 도약의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당테스가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변태하면서 거의 신에 가까워졌듯 그렇게. 그러고 보면 분노나 복수 감정이 앎의 큰 엔진인 게 맞는가 보다. 분량은 짧지만 스케일은 우주적으로 넓어진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변주. 광대 역할과 여성편력까지, 포일이 당테스보다는 아빠 뒤마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궁금해 했다’는 표현이 나는 너무 좋아서, 마지막 발췌는 이렇게.


태양처럼 노란색으로 빛나며 침묵에 잠긴 황량한 우주 공간에서 굉음을 내고 있는 초거성 카노푸스는 한때 아가미가 있는 생명체의 침입을 받았다. 이 생명체는 우주의 바닷가에서 숨을 헐떡거리며 떠다녔다.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웠으며 과거보다는 미래에 더 가까웠고 세계의 끝 100리 저쪽에 있었다. 그 생명체는 먼지와 유성의 질량을 궁금해 했다. 토성의 띠처럼 넓고 납작한 띠를 이루고 토성 공전 궤도만 한 크기로 카노푸스를 둘러싸고 있는 티끌의 질량을 궁금해 했다……. (379)


 

화성의 속을 궁금해 했다……. 인사이트 무사 착륙 소식에 덧붙이는 P. S.
“왜 별이나 은하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라고 포일이 묻는 장면이 있다. 고장 난 바텐더 로봇이 대답하길,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은 묻지 마십시오. 그냥 사는 겁니다.” (370)



알로 술이깰때까지자시오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읽고 있습니다. 에드몽 당테스 전지전능하네요. 며칠 전 생일에는 맑은 공기를 스스로 선물했습니다. (생파에서 정선생은 내 바뀐 젓가락을 보고도 ‘알라딘에서 샀어요?’ 하던데) 알라딘 아니고 반디앤루니스에서 샀습니다. http://www.bandinlunis.com/front/product/detailProduct.do?prodId=G002B66 알로 공기청정기 A7입니다. (아. 새 젓가락은 여름에 문준이 내 낡은 수저포크나이프세트를 몽땅 바꿔준, 아름다운 결과입니다.)

컴퓨터 USB포트에 꽂아 씁니다. 할매컴 소리에 묻혀 기계 소음은 거의 귀여운 수준입니다. 작고 예쁩니다. 담배 연기 잘 먹습니다. 창문 닫고 따뜻한 겨울 보낼 수 있겠어요. 컴퓨터 끄지 않고 외출했다 돌아왔을 때 방구석 아재냄새가 예전 같지 않은 건 확실합니다. 공기질 표시등에 빨간색이 나타나면 음흉하게 씩 웃습니다. 나는 즐기고 알로 님은 열일합니다. 사용 삼 일째 되는 지금까지 발견한 단점이라면, 알로 님을 자꾸 들고 마시려 한다는 점이겠네요. 책상 위 친구들이 주로 이런 모양이라.

공기에 양보하세요, 합니다.

몰아 쓰는 50자평과 발췌문 Smoking

훌륭한 군인 - 8점
포드 매덕스 포드 지음, 손영미 옮김/문예출판사


에드워드가 ‘훌륭한 군인’이자 끝내주는 감상주의자이려면 얼마나 한 민폐가 요구되는가. 자신의 연애편력을 ‘통속소설이 아니라 아주 좋은 책처럼 이야기’(42/363)하는 에드워드인데, 좋은 질문이다. 통속소설이냐 아주 좋은 책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레오노라는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당신 아내는 바람둥이고, 지금 내 남편을 유혹하고 있어요.” (258/363)


 

마당이 있는 집 - 10점
김진영 지음/엘릭시르

(옆집 발코니 흡연자, 나인 줄;) 그래. 이런 걸 원했어. 바로 이거야.


나는 주변 사람들처럼 절대 억울한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억울한 가해자가 되어 사악한 피해자를 죽여야 했다. (324)



i에게 - 10점
김소연 지음/아침달


<i에게>로 다시 만나면서 김소연 시인에 대한 ‘내 입장을 분명히 하였습니다’(58) 5별입니다.


무사하지 않다는 것으로 간신히 무사하다고 소식 전합니다 오늘은 막힌 변기와 친하게 지냈고 마침내 양변기의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싸준 묵은지 한 포기를 도마 위에 올려놓으며 밥에 대한 내 입장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무사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지만 이것이 무사하다는 전갈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부엌 쪽창에 얼 비치는 내 그림자를 보면 자꾸 엄마 하고 부르고 싶어집니다 음악가에게 망원경을 주면 우주의 비밀에 대하여 작곡할 수밖에 없다는데 제게 어울리지 않는 것을 좀 보내주시겠습니까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쥘 게 없는 손으로 주먹을 쥐는 나날입니다 도저히 악의적일 수가 없는 호칭을 등에 업고 늦은 밤에 양말을 갭니다 양말에게 짝을 찾아주는 일 정도가 가장 어울리는 나에게도 스웨터에 오래 매달리다 보면 동그란 보풀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58,「스웨터의 나날」전문)



- 10점
최은영 지음, 손은경 그림/미메시스
 

어쩜. 이래서였군요. 얼마나 반가운지 아실까요. 당신이 진짜임을 알겠어요.


희영이 지녔던 장점들의 상당수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몇 가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한 깊은 수준의 공감을 했고, 상처의 조건과 가능성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 (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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