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지름0331+0414버틀러+0419 Smo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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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갈 때 뭐 신고 가지, 걱정하시는가요, 패션피플님들? 알라딘 쓰레빠면 됩니다. 단돈 (마일리지) 4500원. 비 오는 날이라면 필립 K. 딕 우산(4000원)을 함께 코디해주세요. 더 먼 편의점으로 가게 될지도 몰라요(부끄러워서?). 맥주나 포도주를 살 요량이라면 알라딘 에코백 하나쯤은 어깨에 걸려 있을 텐데요, 와. 알라딘패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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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누피 빨래통 없이 어떻게 살았나 싶어요(과장). 빨랫감 보관용 수납함이 아니라(그렇게 쓸 수도 있습니다), 세탁기에서 꺼내, 널러 갈 때 젖은 세탁물을 담는 빨래통 말입니다. 속이 코팅 재질입니다. 제겐 아주 기막힌 틈새 아이템이었어요. 구깃구깃한 옆면이 말끔히 펴지지 않아 그리 아름답진 않지만 요긴합니다. 배달 도착하자마자 (빨래도 했고) 버틀러 선생의 <씨앗~우화>를 와락 읽었습니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 옥타비아 버틀러 | 장성주 옮김 | 비채


근미래 디스토피아예요. 근미래라... 2024년, 화들짝. 한 세대 전 작가들이 그린 근미래를 살아가는 우리 독자들인 것입니다. 버틀러의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요. 기후 변화, 방화벽(放火癖, pyromania)을 불러일으키는 마약, 폭력으로 온통 황폐화된 미국입니다. 정치와 경찰은 믿을 만한 게 못 되고 노예 생활이 아니라면 일자리랄 것도 없습니다. 방화, 도둑질, 살인, 강간 등이 난무합니다. 화성에도 사람이 가는 우주 시대임에도 지구는 거의 자급자족 시절로 퇴보한 지경이에요. 각자가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무법천지에서 초공감증후군을 가진 십대 주인공 로런은 어떻게 헤쳐 나갈까요... 시와 글을 씁니다. 종교를 창안합니다. 다름 아니라 이 책이 로런의 일기입니다. 그리고 그래요, 길을 떠납니다. 본격 로드물 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매카시 <로드>의 피로감이 따라옵니다만 그나마 제목대로, 희망이 여운으로 남습니다. 다행이지요.


“저 사람들을 왜 부르려는 건데?” 해리가 나를 보았다.

“우리는 저 사람들이 없어도 되지만 저 사람들은 우리가 없으면 곤란하니까.”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365)

블러드 차일드 | 옥타비아 버틀러 | 이수현 옮김 | 비채


아껴두었던 <블러드 차일드>도 내처 꺼내 보았습니다. 일곱 개 단편 중 <말과 소리>가 <씨앗~우화>와 비슷한 느낌이 나더군요. 웬 질병 이후 사람들이 언어 능력을 잃어버린 사회를 그립니다. 폭력이 (또) 난무하고, 도시는 (또) 폐허가 됐습니다. 1. 말하고 듣는 능력이 없어지거나 2. 읽고 쓰는 능력이 없어지거나 합니다. 1보다 2가 더 무서웠습니다. 둘 중 고르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습니다만.


그녀는 질병이 그들을 가지고 놀면서 각자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능력을 빼앗아간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143, 말과 소리)


흑, 그러니까 나는(당신도) 분명 2 증상을 앓을 겁니다. 정치인들은 모두 1 증상... 그러면 좀 조용해지려나요. 흠. <블러드 차일드>에는 단편마다 버틀러 선생 후기가 달려 있습니다. 친절하네요. 이렇게 나는 버틀러 선생 전작(全作) 독자가 됐습니다. <쇼리><킨> 독후감이 술집에 있군요. <야생종>은 오멜라스 판으로 읽었습니다. 흐릿한 기억 가운데 그래도 <야생종>을 가장 멋진 작품으로 꼽겠습니다. <와일드 시드> 원제를 붙여 비채에서 새 번역으로 나오기도 했지요. 투명 홀로그램 파우치의 문구는 <블러드 차일드>에 두 번째로 실린 단편 <저녁과 아침과 밤>에서 온 것이더군요. 

과학사 연대표 포스터는 방 문 바깥쪽에 붙였습니다. 저 문을 열면, 모니터 앞에 앉아 여전히 읽고 쓰기가 가능한지 자신을 테스트해보는 에르고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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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빌의 유령 블루투스 스피커 없이 어떻게 살았나 싶어요(잘 살았음). 휴대폰 음질보다는 확실히 낫습니다. 관건은 지속 사용 가능 시간일 텐데,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다만 예쁜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잘 쓰려 합니다. 12월 굿즈였던가요, (무선) 피너츠 피규어 독서등도 (유선으로) 잘 쓰고 있다지요. 엘크 파우치는 예상보다 작아요. 담뱃갑 넣기에 딱. 귀엽습니다. <엘크 머리>는 무서웠으면 좋겠고 <그래서...>는 웃겼으면 좋겠습니다.




뒤렌마트 : 사고, 혐의, 노부인, 천사, 물리학자들, 헤라클레스, 로물루스 Smoking

약속, 사고 |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소녀가 살해됐다. 취조 받던 피의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진범을 잡으려고 마태 경위는 주유소를 차리고 긴 세월 기다린다, 거의 폐인이 된다, 경찰국장은 우연한 기회에 진범을… 까지가 <약속>에 내가 남겨둔 메모다. 링크로 기록하기 위해 언급하자면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약속>을 모티브로 해서 쓴 작품이 <죽은 등산가의 호텔>이다... 엇. <죽은 등산가의 호텔> 독후감이 없네? 링크는 개뿔. 독후감 쓰기를 미루면 이렇게 된다. (반성은 하는데 노력이 따라주지 않는다)


죽은 등산가의 호텔에서도 투숙객이 죽고, 전개가 (게으른) 독자의 예상대로 흐르지 않는다.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본인 후기에 따르면 ‘추리 독자의 흥미가 뚝 떨어지는 결말 부분에서 예기치 않은 비극적인 반전이 가미된 소설’(<죽은 등산가의 호텔>, 374)을 쓴 셈이다. <죽은 등산가의 호텔> 서지분류가 결정적인 힌트 되겠다. 그래서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약속>의 어떤 부분에 사로잡혔다는 얘긴가. <약속> 속 등장인물이 하는 말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다.


나를 화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니라 당신네들 소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진행 방식입니다. 이 대목의 사기극은 언어도단에다 파렴치하기까지 합니다. 당신네들은 사건 진행을 논리적으로 설정하지요. (…) 그럼 어느 틈엔가 범죄자를 체포하게 되고, 정의는 승리를 도와주는 겁니다. 이런 식의 픽션이 나를 참을 수 없이 격분 시킨단 말입니다. 현실이란 논리를 가지고서는 극히 일부밖에 파악 되지 않는 거니까요. (19-20)


현실은 추리소설에서처럼 논리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 현실에서는 자주, 그리고 때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우연이 개입한다는 점. (이런 걸 소설 속에서 얘기한다는 건 맹점). <약속>은 ‘추리 장르에 바치는 임종 기도’(<죽은 등산가의 호텔>. 374)라는 부제까지 가졌다는데, 그렇게까지 거창한 이름을 달지 않고도 그냥, 매우 황량한 느낌이 남는 추리소설이다. 그래, 비논리적이고 우연적(?)이고 덧없는 현실과 닮았다고 하자.


표지에는 <약속>만 제목으로 쓰였지만 <사고>가 함께 엮였다. 나는 <사고>가 더 좋았기 때문에 5별은 <사고> 몫이다. 고맙게도 내 메모가 남아 있고, 이렇다. 직물 판매인 트랍스 씨. 출장길에 자동차 고장으로 하룻밤을 해당 마을에서 머물기로 함. 호텔은 만원, 전직 판사 별장에 들게 됨. 재미삼아 벌이는 이들 무리의 모의재판에 피고로 참여함. 거나한 식사와 음주 속에서 가짜 사형 선고를 받음. 새벽 해산 후 트랍스 씨는…까지다. 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연극 같은 진행에서 뒤렌마트 선생 특기가 드러난 듯싶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다. 술 취한 노인 셋의 슬랩스틱 희비극에 깔깔+흑흑했다. 뒤렌마트 선생 작품에는 종종 술주정뱅이들이 나와, 나는 속절없이 좋다.


판사와 형리, 혐의 |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나는 범죄를 저지를 터인데 너는 그걸 범죄로 입증하지 못할 것이야, 오래 전 젊은 시절 ㅇㅇ이 베르라하 수사관에게 한 말이다. 베르라하는 늙은 수사관이 되어 다시 저 도전에 맞닥뜨린다. 가까운 마을 백만장자로 돌연 재출현한 ㅇㅇ을 어찌 해야 할까. 후배 수사관을 시켜 염탐하도록 한다. 그 과정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두둥. 예언을 들은 신화 속 영웅 같은 처지랄까. 예언이 실현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예언 실현으로 가는 길이 되는 법이다. 베르라하의 기억에만 있던 과거가 독자에게 나중에 제시됨으로써 함께 살인자를 찾아보는 재미는 덜하지만 다른 재미가 충분해서 뒤렌마트 선생이 추리소설을 더 많이 쓰지 않은 게 아쉽다. 예의 ‘추리소설의 임종’을 선언하듯 베르라하는 우연이라는 녀석을 노골적으로 읊기까지 한다.

 

“총알이군요.” 블라터가 말했다.

“어떻게 찾으셨지요? 경감님!” 클레닌이 감탄의 어조로 말했다.

“우연이었네.” (20)


우연도 우연이지만 뒤렌마트 선생 작품에서는 형리가 꽤 자주 등장하는 점도 눈에 띈다. 희곡에서는 한층 더하더라. 정의란 무엇인가, 과연 당신이 판단할 수 있는가, 같은 자문에서 나온 직업군 아닐까 싶다. 뒤에 실린 <혐의>는 무려 나치 친위대 의사를 소재로 한다. 우리 늙은 베르라하 수사관은 병자가 되어 측은하게도 침대에 누워 있는 신세다. 그러면서도 머리는 비상하게 돌아간다. 마취 없이 수술하며 숱한 살인을 저지른 의사를 직접 조사하기로 결심한다… 아주 긴 장편으로 쓰일 법한 내용이나 어디선가 본 바, 아니, 아래 이어질 <노부인의 방문> 해설 212쪽에서 본 바, 뒤렌마트 선생은 ‘스스로 지구력이 모자라는 사람이고, 그래서 결코 원고지 1,000매 이상 써보지 못했다고 고백’(예니, 최병준)했단다. 하하. 물론 이 길이로도 좋지만 설명을 보고 더 좋아졌지 뭐람.


노부인의 방문 | 뒤렌마트 | 최병준 옮김 | 예니


앞선 추리소설 두 권은 뒤렌마트 선생이 생계를 위해 썼다면 이제부터는 선생의 전문 분야 되겠다. 희곡! 1955년 작, 1956년 취리히 초연. <노부인의 방문>이다. 갑부가 된 노부인 차하나시안(킴 카다시안 아니다)이 몇 십 년 만에 고향 귈렌을 방문한다. 쇠락하고 황폐해진 마을이다. 마을과 주민들에게 큰돈을 희사하겠단다. 무엇을 조건으로? 정의… 흠칫, 기괴하고 낄낄, 웃기고 저런, 으스스하다. (뭐 이런 조합이 다 있담) 아무튼 기괴하고 웃기고 으스스하다. 종국에는 허무감이 남는데 이건 아마 차하나시안 선생 본인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오명 속에 고향을 떠났다가, 이를 악물고 살아내, 상아로 된 팔다리를 한 채, 무시무시한 재력을 휘두르며, 결국에는 ‘정의’를 사 가지고, 다시 귈렌을 뒤로 하고, 카프리로 떠나는 기차 안에서 말이다.


차하나시안 : 잘 있어요, 알프레드.

일 : 잘 가요, 클라라.

(가마는 뒤쪽으로 나간다. 일은 벤치에 앉아 있다. 나무들은 가지를 떼어버린다. 흔히 볼 수 있는 막과 장식이 있는 극장 전면이 위에서 내려온다. “인생은 진지하고 예술은 유쾌하다”라는 간판. 뒤쪽에서 화려한 새 제복을 입은 경찰이 나와서 일 곁에 앉는다. 귈렌 사람들이 모여드는 동안, 라디오 아나운서가 나와서 마이크에 대고 말하기 시작한다. 모두가 새롭고 화려한 옷이나 연미복을 입었다. 도처에 사진기자, 신문기자, 영화 카메라.) (186, 제2막)


천사, 바빌론에 오다 |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 황혜인 옮김 | 책세상


1953년 작. 천사 바빌론에 오다. 바빌론이라니? 그렇다. 고대가 배경이다. 네부카드네자르 재위 시절 초기다.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이름을 가진 바빌론 왕은 네 명이나 되는 가운데, 작품 속 전왕과의 미묘한 관계로 보아 뒤렌마트 선생은 네부카드네자르 1세(기원전 1124년경~? 재위)를 모티브로 가져온 듯하다. 왜냐하면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장 유명하시다. 기원전 604년~기원전 562년 재위)의 전왕은 바로 자기 아버지였고 아버지가 죽은 후 별 갈등 없이 즉위했기 때문이다. 그러자니 배경이 BC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만. ‘언덕바지에 걸려 있는 정원’(62)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업적이라, 고증 어쩔+거 별 무소용이다. (덕분에 검색질로 바빌론 많이 둘러보고는 왔다) 작품 속 공중 정원은 오래된 미래로 여겼고, 네부카드네자르 또한 실재 인물 개인이라기보다 전제군주라는 한 캐릭터로 보면 될 성싶다.


천사가 내려온다. 천상의 소녀도 데리고 온다. 지상의 누군가를 선택하여 그 은총을 주어야 하겠는데, 누구를 선택할까? 가장 가난한 자, 바빌론에서 한 명 남았다는 거지를 (왜냐하면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빈곤을 추방했거든) 찾아라. 역설적이게 (거지로서 가장 무능하고) 가장 큰 권력을 가진 네부카드네자르가 선택된다… 아이고. 천사는 자연과학자이며 전제군주는 (1세든 2세든 히틀러든 스탈린이든) 무능하고 무정하고 우스꽝스럽다. 거지는 현인이며 시인 노동자들은 뭐든 쓰고 있다. 시끌벅적하고(평민과 시인들!), 역시 기괴하고(두 왕의 미묘한 ‘백치’ 왕세자의 줄넘기), 또한 희극적이기도 하면서(전왕과 현왕의 의자 다툼), 다만 약간 따뜻하다. 시인과 거지에 바치는 찬사 같기도 한 것이. 


그들은 그곳을 떠난다. 아마도 교회를 탈퇴한 몇몇 시인들이 모래 폭풍우를 헤치며 뒤따라가고 있다. (165, 3막)


물리학자들 | 뒤렌마트 | 차경아 옮김 | 두레


1961년 작. (+2021년 독.ㅎㅎ) 브레히트 <갈릴레이의 생애>가 표제작으로 되어 있는 두레 판이다. 더구나 세 번째 순서로 함께 실린 작품은 하이나르 키파르트의 ‘오펜하이머 사건에서’다! 핵물리학자 관련 연극으로는 <코펜하겐>(마이클 프레인)만 알고 있었는데 (코펜하겐 단행본으로 번역 출간 바랍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이 얼마나 소중한 책인지. <갈릴레이의 생애>와 <물리학자들>은 다른 판본도 나와 있지만 <오펜하이머 사건에서>을 보려면 이 책밖에 없다. 이 책을 내가 언제 어디서 구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만 잘했다, 나여. 오자가 좀 많으나 그조차도 사랑스럽다. 앞으로 술집에서 두 번은 더 등장할 훌륭한 책이기에 그만 닥치고, 작년에 남겨 놓은 메모를 옮긴다. 물론 뒤렌마트 선생의 <물리학자들>에 관한 거다. 과학자 혹은 과학의 책임을 물음. 과학의 발전이 인류의 몰락을 초래한다면? 하는 딜레마. 정신병동에 스스로를 유폐함으로써 그 나름의 도덕적 책무를 행한 듯 보임.


(그들은 마시고 술잔들을 식탁 위에 놓는다.)

뉴턴: 우리 다시 정신병자로 변신합시다. 뉴턴이 되어 유령처럼 떠돌아다닙시다.

아인슈타인: 다시 크라이슬러와 베토벤을 깽깽이로 켭시다.

뫼비우스: 솔로몬 왕을 다시 나타나게 합시다.

뉴턴: 미쳤지만, 현명하게.

아인슈타인: 갇혔지만, 자유롭게.

뫼비우스: 물리학자이지만, 죄를 짓지 않고. (237)


헤라클레스와 아우기아스의 외양간 |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 황혜인 옮김 | 지만지


1954년 라디오 드라마. 1963년 연극 대본으로 개작, 상연. 1980년에 재차 개작. 헤라클레스의 과업도 뒤렌마트를 거치니 웃기고 울리는구나. 낄낄대다가 자못 숙연해진다. 어디선가 본 바, 아니, <판사와 형리> 202쪽에서 본 바, “따라서 우리는 조국의 더러운 부위와 얼룩을 발견하면, 실로 헤라클레스가 아우기아스의 외양간에서 똥을 쳐낸 것처럼 쓸고 닦는 일부터 파악해야 할 거요(…). 그 영웅의 열 가지 행적 가운데 이 일이 나한텐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오.” 열 가지가 아니라 열두 가지일 텐데, 헤라클레스가 맡은 열두 개 과업이란 것은 검색으로 금방 찾아볼 수 있다. 사자나 암사슴을 잡아오라, 멧돼지, 황소, 암말, 소떼를 데리고 오라, 괴조나 히드라를 죽이라, 또 혹은 누군가의 허리띠나 황금 사과를 찾아오라 등.


뒤렌마트 성정에 (그리고 슬쩍 끼워 넣어보자, 내 성정에도) 맞춤한 건 역시나 아우기아스 외양간 오물 치우기인 듯하다. 그놈의 엠비티아이인지 뭔지 보다는 헤라클레스12 테스트가 더 자신을 알게 해주지 않을까 싶다. 게리온의 소떼 에피소드는 앤 카슨이 <빨강의 자서전>으로 변주한 적 있다. 황금 사과 에피소드는 재닛 윈터슨이 <무게>에서 취한 적 있다. 외양간 치우기 에피소드는 뒤렌마트가 택했다. --> 앤 카슨은 헤라클레스10, 소위 괴물을 객체로 두지 않고 주체로 생각해본 당신은 공감 대마왕이군요 카테고리. 재닛 윈터슨은 헤라클레스11, 외로움과 짐에 대해 사색하는 당신은 타고난 사고 실험가, 작가가 되어 보는 건 어떨까요 카테고리. 뒤렌마트(와 나)는 헤라클레스5, 그 큰 힘으로 고작 동물들을 잡거나 죽이다니요? 생산적으로, 위생적으로, 모두를 위해, 아름답게, 그 힘 청소에 써보자고요, 정원으로 만들면 더 좋고요 카테고리. 어때. 자기가 알파벳 네 글자라고 누군가 얘기해올 때마다(어쩌라는 거지), 또 내 알파벳 네 글자를 물어볼 때마다(모르는데 어쩌지) 이걸로 응답하겠어. 헤라클레스5. 흠... 수습하자. 뒤렌마트의 헤라클레스5는 이리도 멋지다.


이제 정신 차리고 여기서 사는 것을 시도해 보거라. 이 흉측하고 황폐한 나라 한가운데서 사는 것을 시도해 보거라. 만족하는 사람이 아닌 채로 자신의 불만을 계속 전달하며 시간과 함께 사물을 변화시키는 불만족한 사람으로서 살아 보거라. 이것이 내가 이제 너에게 부과하는 영웅의 행위이며, 내가 너의 어깨 위에 올려놓고 싶은 헤라클레스의 과업이다. (186)


미시시피 씨의 결혼, 로물루스 대제 |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 김창활 옮김 | 서문당


미시시피 씨는 결혼을 했다. 형벌로써의 결혼 되겠다… 끝. 뒤에 실린 <로물루스 대제>를 얘기하고 싶어서다. 초연이 바젤 1949년이다. 위에 온 책들보다 가장 앞선 작품이다. 가장 나중에 읽었고 가장 크게 감동했다. <미시시피 씨의 결혼>이 표제작으로 온 게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로물루스 대제> 매력적이다. 로물루스 대제는 로마를 멸망시키기 위해 무엇을 할까. 잘못 쓴 거 아니다. 자기 나라, 게다가 자기가 왕인 나라 로마를 ‘멸망시키기 위해’… 닭을 키운다. 오블로모프보다 훨씬 적극적인 태업이다. 마냥 우울할 것만 같은 캐릭터이나 그렇지가 않다. 다정다감하고 유머러스하고 정치적 반근면에 최선을 다해 근면한다. 그야말로 희비극의 절정. 이어서 이상한 슬픔, 허무감이 온다. 아흑 뒤렌마트 선생님.


선생 작품 중 하나를 추천하자면 이걸로 하겠다. 로물루스 대제를 읽고 뒤렌마트를 끊는 독자는 없으리라. 아껴두었던 상투문장을 이번에 쓰기로 한다. 뒤렌마트를 한 편도 읽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편만 읽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문장. 책상 위 난립한 책 무더기 중 뒤렌마트 무더기를 치우면서 뭔가 아직도 아쉬운데, 왜지? 왜긴. 번역본 전작(全作)에서 <법>(솔출판사, 1996)과 <혜성>(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99)이 함께 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보고 싶구나. 다시 나오면 좋겠습니다. 내가 두 권 살게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2)


로물루스 : 맞았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내 정치적 견해요.

율리아 : 그러니까 당신 같은 사람은 황제가 될 필요가 없었단 말예요.

로물루스 : 오직 황제가 되어야만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의미를 가지는 거였소. 내가 개인적으로 태만하다는 것은 아무 쓸데없는 일이지. (248/302)




알라딘 무민 수건 술이깰때까지자시오



오랜만이쥬. 오늘 도착한 알라딘 배달입니다. 세 권만 해도 5만원 충족하는 걸 보면 책값이 좀 높지요? 그만큼 두 권이 두툼하네요. 아 재밌겠다. 어서 읽고 싶습니다만, 독후감이 밀려 있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대선 후 기분은 더 더럽습니다) 내 술집인데도 낯설어... 이전에 받은 무민 수건도 사진이 있기는 하네요. 구립니다.


저 사진을 찍고 무민 수건은 세탁기 삶음 기능 당했습니다. MOOMIN 꼬리표는 분리됐고 자수는 우글렁해져서 나왔습니다. 그래도 물기는 잘 닦겠지요. 흰색 수건 전문가(? 애용자)로서 수건은 면빤스와 함께 무조건 95도 삶음으로 돌립니다. 선셋살롱에서 다른 건 더러워도 흰 수건의 청결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내 하얀 수건 하나가 어찌어찌 승호 씨 집에 흘러간 적이 있는데 회색이 되어 있어 못 알아봤던 기억이 납니다. 하하. 요는, 흰색 수건 좋아합니다. 끝으로


코로나 장발과 이별했습니다. 지난달 상민 씨가 잘라줬습니다.




바다1: 심해, 숲, 콘서트, 구별법, 뱀장어, 문어, 시간, 해변 NoSmoking


심해 | 클레르 누비앙 | 김옥진 옮김 | 궁리


심해. 뭐가 심해. 아름다움이 심해... 가 아니고. deep sea, 深海. <물백과사전>에 따르면 수심 2000~6000미터 사이를 심해라고 하는 모양이나, 통상적으로 수심 200미터부터 그리 불러도 되는 듯하다. 깊은 바다에 간 사람이 달에 간 사람보다 수가 적다. 1930년대 윌리엄 비비(약 800미터), 1954년 오귀스트 피카르(약 4,000미터), 1960년 자크 피카르와 돈 월시(10,916미터), 2012년 이목을 끌었던 캐머런 감독이 도달한 깊이가 10,908미터(혹은 자료에 따라 10,898미터)다. 피카르와 월시(트리에스테)는 탐사보다는 신기록 수립을 위한 잠수였다는 점 감안하면, 마리아나 해구 약 11킬로미터 깊이 ‘챌린저 딥’을 몸소 탐사한 사람은 캐머런 감독인 셈이다.


클레르 누비앙의 <심해>는 프랑스에서 2006년에 나왔고 우리 번역본은 2010년판이다. 아름다움이 심하다는 말은 맞다. 고퀄 사진들이다. 온통 발광하고 유영한다. 귀엽거나 희한하거나 예쁘거나 무섭거나 못생긴 우리 동료들이다. 압력과 저온과 어둠과 용적을 생각하면 폐소 공포가 스멀스멀 생길 법도 한데 세상에, 뭇 생물들이 나 여기 있소(혹은 나 귀찮게 하지 마라) 하는 거다. 이 크고 무겁고 멋진 책이 70% 정가인하로 만 원대다! 부디 두루 득템하시면 좋겠다. 서재(혹은 화장실)에 두기에 딱 멋지다.


1970년대 중반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초점을 바꿔 갈라파고스 열곡으로 2,400미터까지 내려간 지질학자들은 암석성 해저의 갈라진 틈에서 나오는 따뜻한 물(섭씨 20도 내외)을 발견했다. 곧이어 그들은 캘리포니아 만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중남미 해안 앞바다에 걸쳐 있는 산맥인 동태평양해팽에서 높다란 광물질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천(섭씨 350도)를 발견했다. 그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지질학자들은 이러한 온천, ‘열수분출공’이 심해저에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고온의 물이 흐르는 곳에 희한한 동물들이 특별한 군집을 이루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40, 심해 탐험, 신디 리 반 도버 박사, 미국 윌리엄&메리 대학교)


바다의 숲 | 크레이그 포스터, 로스 프릴링크 | 이충호 옮김 | 해나무


다큐영화 <나의 문어 선생님>은 어땠는지? 책으로만 만난 나는 글쎄... 바다에 미친 크레이그 님과, 자기 얘기를 줄줄 풀어놓는 로스 님을 보았다. 야생 자연이 좋다고 굳이 장비 없이 감행하는 다이빙, 그것도 매일 잠수를 고집하는 게 좀 의아했다. 뜯어말릴 이유야 없지만 뭐, (부럽기는 했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잠시 동안의 스노클링 경험만으로도 저 거대한 물에 공포감을 느꼈던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앉아 있다. 스노클링 말고 잠수는 또 다를 거야. 내가 좋아할 수도 있어... 하여간, ‘자연의 거울이 그(로스)에게 어떻게 효과를 나타내는지’(366) 보았어야 했나 보다. 바다와 바다 생물 얘기만 기대했다가 로스 개인사가 펼쳐져 놀라기는 했다. 두 명 각각 다른 색깔의 글쓰기를 한 책에 녹여낸 사람은 편집자 피파 에를리히 선생인 모양이다. 글 반, 사진 반. 사진 좋다.


이빨고래는 바다의 박쥐라고 할 수 있는데, 고주파 음을 발사해 청각으로 주변 환경을 ‘본다.’ 즉, 반사된 소리를 포착해 그것을 상으로 만들어 볼 수 있다. 수염고래는 주파수가 아주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들음으로써 아주 먼 거리에서도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 (…) 귀뼈는 고래의 몸에서 가장 단단하고 가장 오래 남는 뼈이기 때문에 고래의 마지막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339, 크레이그)


바다 생물 콘서트 | 프라우케 바구쉐 | 김종성 감수 | 배진아 옮김 | 흐름출판


2021년의 책으로 이미 등장했던 <바다 생물 콘서트>다. 플랑크톤으로 시작하여 산호초, 바닷물, 심해, 바다 생물, 해저 자원, 인간의 폐악질(플라스틱)과 자성, 미래로 끝난다. 350여 쪽밖에 되지 않는 책이 이토록 커 보일 수 있는가. 낭비하는 페이지가 하나도 없이 지식으로 가득하다. 해양학자 프라우케 바구쉐(‘바구셰’로 표기해야 하지 않나 싶다만)의 첫 책이다. 이렇게 빼곡하게 아름다운 책을 써놓고 두 번째 책이 또 나올 수 있겠나 싶을 정도다. 아무튼 알라딘에 신간알림신청은 해 놓았다. 밑줄 친 곳이 너무 많아 감히 간추려 소개할 엄두가 나지 않고 다만 강추하는 바다.


그나마 기록해 두자면, 내 생애 손에 꼽을 정도로 먹어본 바닷가재에 대한 생각과, 이제 내가 사랑에 빠진 뱀장어와, 미워하기 위해 알기로 한 해달 정도 되겠다. 바닷가재는 매너 넘치는 사랑꾼이다. 궁금하지 않은지. 교미를 방해하는 저 딱딱한 껍질을 어떻게 벗고 입는지? … 읽어볼 일이다. 읽어본 나는 바닷가재 이제 못 먹는다. 더구나 바닷가재가 산 채 뜨거운 물에 들어갈 때는 고스란히 고통을 느낀다는 점을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도 <재밌다고들 하지만~>에서 고발한 바 있다.


(…)성체가 되어서는 인간들의 접시 위에 오르게 된다. 이 경우 그들은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왜냐하면-너무나도 고통스런 운반 과정을 겨우 참고 견딘 끝에-산 채로 펄펄 끓는 소금물 속으로 던져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7년에 바닷가재가 학습능력이 있고, 고통과 불안, 스트레스를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2017년 베를린 행정 재판소는 바닷가재를 비롯한 다른 갑각류 동물들의 고통 감내 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274-275)


뱀장어 편에서 요하네스 슈미트의 이름이 나왔을 때 <삶, 죽음, 그리고~>를 옆에 두고 흐뭇해했다. 책 쌓아두고 읽는 마약효과다. 사르가소해까지 나오자, 앗, 스포하지 마시라고 육성으로 얘기하더라, 내가. 하하. 해달은 ‘검은 영혼’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소개된다. 와, 개자식 아니고 해달자식이다. 해달 수컷의 행패가 끝장이다. 성폭행, 살해, 시간, 유괴, 협박 등등. 매카시 선생이 비정하게 묘사하는 사이코패스 주인공 격이다. 개자식 대신에 해달자식이라는 욕 사용하기를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이 새끼, 근데 수달이랑 어떻게 구별하지? <사소한 구별법>을 보면 된다.


+가차오탈리즘 덧붙인다. ‘~ㄱ건대’ 맞춤법은 이미 언급했고, 아마도 편집자가 가장 부끄러워할 64쪽은 이렇다.

‘고둥’ 뒤에 붙은 영문표기는 당연히 학명이어야 할 텐데, rhend는 뭐다? 백과사전 검색까지 한 나도 부끄러웠다(저절로 ‘고둥’을 찾아주더라)...


사소한 구별법 | 김은정 글 그림 | 이수종 감수 | 한권의책


‘배영을 하면 해달, 자유형을 하면 수달’(24)이란다. (배영을 하며 손에 조개를 쥐고 있는 귀여운 모습의 해달이다. 속지 않아!) 둘 다 족제빗과, 각각 해달속 수달속을 차지한다. 해달은 해양동물, 수달은 육상 동물로 분류되지만 수달은 물에서도 뭍에서도 산다. 둘이 사는 곳이 겹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수달만 산다. 해달 뒷발은 지느러미 모양이라 땅 위에서 걷지 못하는 반면 수달은 네 발로 땅 위에서 사람보다 빨리 뛸 수 있다. 해달은 주행성, 수달은 야행성이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어린이책이다. 친절하고 과학적인 그림이 함께한다. 자꾸 자꾸 잊어버리는 ‘자연 속 작은 차이’ 아웃소싱된 책이랄까. 17쌍 생물들이 소개되는데 어.. 물개/물범이 없다. (해달자식이 성폭행하는 대상 중에 어린 바다표범(물범)이 있다) 검색으로 찾아놓은 게 이렇다.

물개(northern fur seal 북방물개) : 귓바퀴 있음. 4족 보행. ㄴ자 몸.

물범(harbour seal) : 귓바퀴 없이 귓구멍. 뱃살 튕겨 이동. ㅡ자 몸.

‘물개 박수’는 과연 옳은 말 되겠다. 그나저나 이렇게 읽고도 시험 본다면 틀릴걸? 미워하기 위해 알기로 한 해달자식... 역시 좋아해서 알고자 하는 것에는 못 미치는 건가. 옳다. 좋아하게 된 거 얘기하자.


삶, 죽음,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물고기 | 패트릭 스벤손 | 신승미 옮김 | 나무의철학


뭐라 설명할 길이 없는 존재론적인 결의로 이뤄지는 기나긴 금욕의 여정이다. 하지만 뱀장어가 사르가소해에 다다르면 다시 집에 돌아온 것이다. 수면을 뒤덮은 두터운 해조류의 소용돌이 아래에서 뱀장어의 알이 수정된다. 이와 더불어 뱀장어의 임무가 끝나고, 뱀장어의 이야기가 완성되고, 뱀장어는 죽는다. (13)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물고기가 내게 오면서, 사르가소해=진 리스 공식에서 사르가소해=뱀장어 공식으로 바뀌었다. 뱀장어 생태 연구 역사와 요하네스 슈미트의 삶, ‘뱀장어 문학’까지 환기한다. 뭐가 빠지지 않으면서? 자기 이야기. 1장 ‘뱀장어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보자.’(7)로 시작하여 2장 ‘아버지는 당신이 유년 시절을 보낸 집 주변 들판과 맞닿은 개울에서 나에게 뱀장어 낚시를 가르쳐주셨다.’(15)로 이어진다. 패트릭 스벤손은 스웨덴에서 태어났고 기자 출신으로 아버지 회고록을 이따위로 썼다. 이따위, 특정 분야를 깊이 공부한 후에 넓게 연결시키는 글쓰기를 말함이다. 와, 멋진 책.


뱀장어의 생활사는 아리스토텔레스 시절부터 미스터리였다. 여러 생물학자들의 연구와 발견을 거쳐 번식지를 드디어 알아낸 사람이 요하네스 슈미트다. 슈미트에 이르기 전에, 젊은 프로이트 할배도 (열아홉 살이어도 프로이트는 할배임) 트리에스테에서 뱀장어 고환을 찾으려 몇 년을 보냈단다. 고환은 못 찾고 ‘그는 물고기의 성적 특성을 이해하고 싶었지만 기껏해야 자신의 성적 특성만 발견했다.’(64) (뱀장어는 필요한 순간이 되기 전까지는 눈에 보이는 생식기를 가지지 않는다.) 덴마크 사람 요하네스 슈미트는 칼스버그 연구소의 후원으로 탐사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면서 작은 렙토세팔루스 유생, 더 작은 렙토세팔루스 유생, 더 더 작은 렙토세팔루스 유생을 따라가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버들잎 모양 유생의 이동과 강력한 해류 사이의 관계를 알 수 있었다.’(87)


렙토세팔루스 유생-실뱀장어-황뱀장어-은뱀장어 네 단계, 강하성(降河性) 생활사를 지금은 안다. 번식과 죽음을 아우르는 첫 순간 혹은 마지막 순간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생존 기간도 수수께끼다.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데, 남획과 기후 변화가 뱀장어를 위협하고 있다. 멕시코 만류가 약해져 유생이 길을 잃으면, 망망대해... 흑. 저자는 도도나 스텔러바다소 예를 들며 더 슬프게 한다. 베링해에 이름을 준 비투스 베링과 함께 캄차카 반도를 탐사했던 게오르그 빌헬름 스텔러가 해우류(바다소)를 소개하기가 무섭게 (27년 만에) 멸종해버린 사실 말이다. (참고로, 난파에서 살아남은 이들 일행은 베링섬에서 해달자식!들을 잡아먹는다) 스텔러바다소는 낭만적인 이름만 남기고 ‘도도와 달리 일상의 일부가 되지 못했다.’(274)


뱀장어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적어도 4,000만 년 동안 존재해온 생물을, 빙하기에 살아남았고 대륙 이동을 목격한 생물을, 인간보다 수백만 년 앞서 지구에 등장한 생물을, 수많은 전통과 축하와 신화와 이야기의 대상인 생물을 지울 수 있을까? (277)


그리 된다 해도 내가 기억할 거야, 멋진 앙귈라 앙귈라여. 저자가 언급한 권터 그라스 《양철북》, 보리스 비앙 《거품의 나날》, 그레이엄 스위프트《워터랜드》(1983)를 ‘뱀장어 문학’으로 링크했다. 《워터랜드》는 소설 번역본이 없고 영화 <나의 청춘 워터랜드>(1992)로 나온 적 있나 보다. 제레미 아이언스, 에단 호크 출연. 스티브 질렌할 감독. 소설로 보고 싶은데 아쉽다.


문어의 영혼 | 사이 몽고메리 | 최로미 옮김 | 글항아리


저자가 만난 여러 문어 선생님들과 아쿠아리움 사람들, 잠수 경험까지 담겼다. 문어 선생님들 포함하여 모두가 이름을 가졌다. 그리 무겁지 않은 에세이. 사이 몽고메리 선생은 다른 책으로 더 만날 것이므로 여기서는 이만.


난 통 위로 몸을 구부려 경외심과 고마움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더니 물속으로 한 방울 떨어졌다. 기쁨과 슬픔의 눈물에는 프로락틴이 들어 있다. 프로락틴은 남녀 공히 성교와 꿈, 발작 시 절정에 이르는 호르몬이며 여성에게서는 젖의 합성에 관계한다. 난 옥타비아가 내 감정을 맛볼 수 있었을지 궁금했다. 맛을 인식했을 수도 있다. 물고기에게도 프로락틴이 있다. 옥타비아에게도 마찬가지다. (332)


바다의 시간 | 자크 아탈리 | 전경훈 옮김 | 책과함께


아탈리 선생이 쓴 바다의 ‘총체적 역사’(11)다. 300쪽 남짓한 책에 총체적 역사라니, 넓은 글쓰기랄까. 이런 식의 서술은 ‘세분화된 영역들의 전문가들로부터 그토록 오랫동안 오해를 받아왔다’(11)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세분화된 영역의 깊은 글쓰기가 쓸모 있는 만큼 아탈리 식 총체적 역사 서술도 의미가 있을 터다. 다만, 재미가 좀 덜... 바다의 기원부터 생명의 탄생, 인간의 출현, 항해, 전쟁, 배의 발달, 어업, 무역, 통신, 지정학, 해양문학, 해저탐사, 해저자원까지 압축된 이야기가 빽빽하다. 참고자료 수만 해도 253개다. 각주인가 싶은 작은 숫자들이 모두 참고자료로 안내한다. 서양에만 치우치지 않아 반가웠다. 바다 관련 책들 읽다 보니 기승전환경문제이더라. 아탈리 선생 역시 ‘바다를 구하라’가 맺음말이다.


시멘트, 콘크리트, 유리 제조 시 해저면에서 채취한 모래를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충분한 혁신이 이루어져야 한다. 기업가라면 누구나 이들 시장에서, 인류의 미래를 위해 필요하면서 동시에 수익성이 있는 대체재를 개발하는 데 열중해야 한다. (291-292, 바다를 구하라 | 건설적인 기업이 해야 할 일)


해변이 정말로 사라지고 있을까? | 롤랑 파스코프 | 전효택 감수 | 김성희 옮김 | 민음in


응. 왜? 댐 건설, 골재를 위한 채굴, 해변에 인접하여 지은 건축물, 항만 시설, 평균 기온 상승 등등 때문이란다. ‘퇴적물 결핍 위기에서 해변을 구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해변 앞바다에서 채취한 모래와 자갈을 공급하는 것이다. 이 방법만이 자연적인 상태에서 해변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해결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업이 전 세계의 모든 해안에 확대되려면 각국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55)


바다1. 뱀장어책 표지가 처음에는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좋다. 잔잔한 물 표면에 빛이 찰랑찰랑... 삶, 죽음,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물고기 최고다.


어쩌다 보니 호러 모음: Smoking

숲속의 로맨스 | 앤 래드클리프 | 장용준 옮김 | 고딕서가


18세기 영국 고딕소설의 대가 앤 래드클리프다. 여기저기 비평가들이 많이도 언급했던 <우돌포의 미스터리>는 아니어도, 심지어 제목에 ‘로맨스’가 들어가도 (200번째로 말하는 바, 로맨스 소설 싫어한다) 래드클리프여서 냉큼 사 보았다. (그리고 냉큼 실망하게 된다) 젊고 아름다운 아들린, 출생의 비밀을 스스로도 모르는 아들린, 계속 갇히는 아들린, 시를 짓는 아들린, 걸핏하면 기절하는 아들린. (스포 없음) 아들린이 두 번째로 기절했을 때 내 모든 기대를 내려놓았다. 기절을 18세기 풍 꽐라라고 애써 여기며 읽었다. 출생의 비밀과 로맨스와 못된 놈 처벌이 이러구러 밝혀지고 이루어진다. 세 번의 납치와 여섯 번의 기절 동안(정확하진 않다, 대강 하는 말이다), 나쁜 놈들이 나쁜 짓들을 서로서로 까발리면서 도피와 추적과 협박이 개연성을 가지게 된다. 독자 몰래 등장인물들이 과거 가졌던 관계 및 사연이 차차 드러나는 방식 되겠다.


어두운 숲, 황폐한 건축물, 비밀 공간, 관 속 해골, 이상한 일기 쪼가리들, 고딕이다. 그런데 무섭지 않다. 그래서 나는 엉뚱한 호러물이라고 소심하게 주장할 참이다. 유령을 보았기 때문이다. 두둥. 유령은 아네트라는 이름을 가졌다. 있으면서 없는 사람이다. 고단하고 긴 도주 끝에도, 아무 것도 없는 황폐한 곳에서도 고귀하신 분들이 먹고 자고 산책하고 ‘로맨스’할 수 있었던 힘. 하인 페터 부인으로 소개되었으나 페터가 아들린과 함께 떠난 후 아네트는 어떻게 됐는지, 페터도 래드클리프 선생도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네트는 유령이다! 다른 말로 그림자. 그림자 노동이라는 말 괜히 마침맞은 게 아니다. (소심하게) 호러 소설 맞지?


“선생님은 정말 제가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을 콕 집으셨네요. 저는 후작을 절대 사랑할 수도 없고 또 솔직하게 말씀드리지만 그분을 존경할 수도 없습니다. 감사를 표하자고 한 사람의 일생 전체를 바치는 건 너무 심한 희생입니다.” (201)


+후주 싫어, 각주로 달아줘요. 특히 이토록 짧고 간단한 주석이라면.


호러 | 김혜영, 권하원, 배예람, 경민선, 이로아 | 안전가옥


장르명을 제목으로 한 앤솔러지다. 공모 작가들은 ‘밀실, 증강현실, 포비아, 휴가, 쓰레기’(5) 다섯 개를 키워드로 받은 모양이다. 밀실과 쓰레기가 만난 것으로 보이는 ‘습습 하’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습습 하가 뭔가. 매운 라면 먹는 소리란다. 글쎄, 짭짭이든 쩝쩝이든 습습이든 먹는 소리 질색인 나로서는 좀 싫은 제목이지만 멋진 작품이기는 하다. 일, 이인 가구, 집 쪼개 세 놓는 현실이 적나라하다. 다름 아니라, 전기 고지서가 옆집이랑 통합으로 나온다. 예전에 이런 집에 살아봐서 와 닿았다. 지금도 이런 데 꽤 있을 걸? 내 경우 글쎄, 초기 몇 달 동안 수도요금이 건물 전체로 나와, 내 평년 요금의 10배는 냈던 기억이 있다... 안물안궁TMI 죄송. 작품에서는 전기요금이다. 문제의 고지서를 ‘우리’(나와 룸메)가 가져와야 5000원 삥땅 칠 수 있다. (나쁜 짓) 이걸 미처 챙기지 못한 달 어느 날 우리는 옆집에 무단 침입한다. (나쁜 짓2) 무얼 본다? (말할 수 없다) 단편에 걸맞게 기발하고 강렬하다. ‘호러’를 여는 이야기로 제격이다. 네 편이 더 이어진다. (좋은 말 나올 것 같지 않아서) 그만 씀.


나도 습습 하, 습습 하, 소리를 내다 숨을 삼켰다. 새삼 이상하게 느껴졌다. 옆집의 일이 그저 공짜 계란이 사라졌다는 말로 끝난다는 게, 그게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게. 놀랄 만한 유튜브 영상 하나를 발견하고 세상에, 라며 탄식 한 번 한 뒤 바로 잊어버리듯이. 바로 옆집인데도, 직접 봤는데도, 우리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은 한없이 가벼웠다. (39, ‘습습 하’ 김혜영)


기이한 이야기 | 메이 싱클레어 | 송예슬 옮김 | 만복당


1. 그들의 불이 꺼지지 않는 곳 : 사후세계가 꿈처럼 펼쳐짐. 아마도 지옥.

2. 징표 : 부인이 죽고서야 친절한 마음을 표현하는 괴팍한 주인공.

3. 크리스털의 결점 :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의 염력 혹은 광기.

4. 증거의 본질 : 재혼한 남편 부부에게 전부인 환영이 찾아옴.

5. 죽은 자가 알게 된다면 : 노모의 죽음에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는 주인공에게 노모 환영이 나타남.

6. 희생자 : 살해당한 희생자 환영이 살인자 앞에 나타남.

7. 절대적 세계의 발견 : 사후세계에서 환영들이 나누는 대화. 아마도 천국.


(2021년 한글파일 정리하다 발견하여 옮겨 놓는다.) 1번 악몽 같은 전개는 퍽 멋지다. 기억 속 공간을 헤매고 헤매 도착하는 곳이 호텔방, 별무매력 불륜 상대 옆이라면 어쩌지. 떠나고 다시 떠나도 돌아오게 되는 곳이 호텔방, 별무매력 불륜 상대 옆이라면 어째. 불멸의 지루함이야말로 지옥 아닌가.


이제 두 사람은 우중충한 하얀 침대 끄트머리에 함께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무거운 팔을 양옆에 축 늘어뜨린 채 서로를 피해 고개를 떨궜다. 두 사람의 격정이 견딜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불멸의 지루함이 되어 그들을 짓눌렀다.

“오스카, 언제까지 이래야 해요?”

“나도 모릅니다. 지금 이것이 영원의 순간인지, 순간의 영원인지 나도 모르겠군요.” (47, 그들의 불이 꺼지지 않는 곳)


죽음, 무의식, 꿈을 같은 편으로 놓은 장치는 7번 작품에도 등장한다. 다만 환한 버전으로. 불륜녀와 불륜남과 주인공 모두 형이상학적 대화를 나누며 행복해한다. 하하. 1번과 7번이 저승으로 들어간 영혼들 이야기라면 (3번을 제외한) 나머지 단편들은 영혼이 이승에 출현하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헨리 제임스 <나사의 회전>이나 <에드워드 옴 경> 같은 분위기 있잖은가. 더 특별하게 싱클레어의 환영들은 대체로 친절하다. 이승의 삶을 더 편안하게 해 주려는 듯 열일하신다. 괄호 안에서 제외한 3번은... 이것이야말로 내가 별무매력, 싱겁다고 백자평에 써버리게 한 주범 되겠다. 염력이다! 끝.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 | 마리아나 엔리케스 | 엄지영 옮김 | 오렌지디


1. 땅에서 파낸 앙헬리타 : 어려서 죽은 앙헬리타 유령이 ‘나’에게 나타남. 뼈가 묻혀 있던 집이 팔리면서 마당이 파헤쳐진 게 이유였음.

2. 호숫가의 성모상 : ‘우리’가 보기에 예쁘지도 않은 실비아가 멋진 남학생 디에고와 사귀자 시기, 질투.

3. 쇼핑카트 : 빈민굴 노인 술주정뱅이가 동네에 들어와 똥을 눔. 마을 주민들이 쫓아내며 쇼핑카트를 압수함. 이후 마을에 ‘마쿰바의 저주’가 내린 듯 안 좋은 일들이 연이어 벌어져 쇠락함.

4. 우물 : 엄마, 외할머니, 언니의 공포증 치료를 위해 호세피나를 대동하고 코리엔테스의 여사님 혹은 마녀 집에 감. 그날 이후 세 사람은 낫고 호세피나가 공포증을 갖게 됨.

5. 슬픔에 젖은 람블라 거리 :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음습하고 퇴락한 동네엔 아이 유령들이 악취를 피우며 득시글댐.

6. 전망대 : 호텔 전망대에 사는 미친 여자 유령(‘위층 여자’)이, 신경이 쇠약한 투숙객 엘리나를 후임자를 간택한다는 얘기.

7. 심장이여,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 심장 페티시스트인 나. 말 그대로 심장을 좋아함.

8. 카르네 : 아이돌 가수를 병적으로 좋아하는 십대 소녀들. 죽은 가수 무덤을 파 살을 먹음. 다른 소녀들이 부러워함.

9. 생일, 영세식 사절 : 은밀한 동영상을 촬영해 주는 사업을 하게 된 남친. 환각에 사로잡혔다는 소녀를 촬영해주고...

10. 돌아온 아이들 : 실종되었거나 죽었던 아이들이 돌아옴. 마을이 온통 이상해짐.

11.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 : 혼자 지내는 여자 골초 파울라. 조금 떨어진 아파트에 담뱃불 화재. 노년 여성이 불타 죽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음.

12. 죽은 자들과 이야기하던 때 : 위저 보드 게임을 하는 소녀 친구들.


유령과 공포를 빌려온 리얼리즘이랄까. 묵직함이 남는 엔리케스 표 다크 픽션이다. 전작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또한 무섭다기보다 무거운 공포였던 기억이 있다. 젊은 엔리케스 선생 파이팅.


힐 하우스의 유령 | 셜리 잭슨 | 김시현 옮김 | 엘릭시르


<제비뽑기><우리는 언제나 성>에 이어 <힐 하우스>로 잭슨 선생 마무리했다. 무서움으로 치자면 단편 ‘제비뽑기’가 최고이나, 으스스한 집 기운은 오래 이어져 <샤이닝>과 <대불호텔>까지 내려온 셈이다. 잭슨 선생은 작품 못지않게 자기 실제 삶도 꽤 알려져 있는 경우라, 강화길 작가도 인천까지 그이를 데려올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남편을 매니저 삼아.


엘리너는 아이처럼 생각했다. 너무 추워. 머릿속이 이렇게 소리로 요란하니 다시는 잠들지 못할 거야.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 나는 소리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듣는 거지? 나는 이 집에 조금씩 조금씩 흡수되고 있어. 이 소리에 내 몸이 조금씩 조금씩 부서져 나가겠지.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할까? (304)


대불호텔의 유령 | 강화길 | 문학동네


네, 이제 알겠어요.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게 되었다는 걸요. 당신들에게서는 어떤 얼굴이 보여요. 외롭고 고독해서, 한 번 만난 이에게 쉽게 마음을 여는 사람. 오랫동안 함께 지낸 사람에게 실망하고 자리를 떠나온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 미련을 갖고 있는 사람. 아아, 그건 내 얼굴이에요. 각자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만, 결국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우리가 여기에 함께 있네요. 부유하고 있어요. (208)


그렇다고 한다. 대불호텔에 잭슨 선생을 등장시킨 게 멋졌다. 사실은 고딕 형식을 빌린 작품 안에 전쟁과 인천과 중국동포에 대한 혐오, 우리 가난함,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 아등바등 살려는 의지가 다 들었다. 다만 ‘자, 옛다, 사랑!’ 식으로 끝맺는 게 좀 못마땅해 결말은 안 본 척, 모른 척했다. ‘나를 거쳐 간 사람이 많습니다’로 시작하는 독후감을 알라딘에 썼다. 5만원인가, 3만원인가 적립금 받아 책 샀다.


세 번째 호텔 | 로라 밴덴버그 |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문학동네는 ‘번’ 앞에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가. 표지부터 내지까지 줄곧 ‘세번째’ 호텔이다.) 클레어는 혼자 쿠바 여행 중이다. 죽은 남편을 다시 본다. 살아서 생활하는 모습이다. 쿠바 공포영화제, 좀비.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미국에서 같이 살 때는 몰랐던 남편인 건가. 하기야 누군들, 누군가를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죽은 자를 보내는 의식이랄지 애도랄지 그렇게 여기며 읽었다. 하트 크레인, 조라 닐 허스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같은 시인, 작가가 언급되는 걸로 봐서 밴덴버그 선생의 취향을 알 수도 있겠다. 와중에 더욱 반가웠던 이름이 있다. 어떤 남자가 혼자 앉아 보고 있는 <포켓판 외딴섬의 지도책>이다. 유디트 샬란스키의 ‘내가 가보지 못한, 그리고 절대 가볼 일 없는 50개의 섬들’이 부제인 책! 밴덴버그 선생 이 책 되게 좋아하나 보다. 나도나도.


그는 일출과 히치콕과 겨울 산책과 감초 사탕을 사랑했다. 클레어는 이런 식으로 무한히 나열할 수 있었지만, 타인을 안다는 것이 고정불변하는 상태가 아님을 이해했다. 안다는 것은 유동적이고, 말로 형언할 수 없고, 한계가 있지만 그 한계의 정확한 위치, 즉 앎이 끝나고 모름이 시작되는 지점은 보이지 않는다. 경계를 넘어선 다음에야 경계에 도달했음을 알게 된다. (167)


밤의 여행자들 | 윤고은 | 민음사


<밤의 여행자들>을 호러 카테고리에 넣어버림으로써 스포했다. 재난 관광이다. 화산 폭발이나 홍수 장소를 찾아 셀카 찍는 실제 인물들이 뉴스가 되기도 하더라만. 어째 저럴까 싶은 심리를 어째 잘 이용하는 재난 관광 전문 여행사라고 어째 없겠나. 그런데, 설마 이렇게까지? 했는데 설마 이렇게까지다. 냉정하고 가차 없다. 낯설고 매력적이다.


쓰나미가 무이를 뒤흔드는 동안 몇 백 년을 견딘 나무들은 뿌리로 악어들을 감싸 안았다. 날이 밝은 후, 악어들은 그 섬에서 살아남은, 대부분의 사람이 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억하는 대사가 없었다. 연습한 대사도 없었다. 특별한 사연도 없었다. 리허설도 수당도 없었지만 깨진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오듯, 이야기들은 바다로 흘러나왔다. (218-219)


호러북클럽이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방식 | 그래디 헨드릭스 | 강아름 옮김 | 문학동네


제목 참 발랄하다. ‘북클럽’ 나오고 ‘뱀파이어’ 나오고 ‘처단’ 나오고 유령까지 나온다. 고어, 시체, 언데드 다 나오는 와중 아니나 다를까 고구마 클리셰도 어김없다. 주인공 말을 아무도 믿지 않는 거. 두 가지가 있겠다. 혼자 미친 사람(또는 영웅)이 되든지, 다른 사람들을 끝까지 설득하든지. 여기서는 후자다. 여성 연대와 노동이, 공고한 남성 호모소셜에 균열을 내는 게 멋지다. 그로테스크한 마지막 장면은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 도입부와도 만난다. 북클럽, 그리고 뱀파이어 소재인 만큼 <드라큘라> 패러디 혹은 오마주가 ㅋㄷㅋㄷ재미있었다고, 메모에 남아 있다(기억에는 없다).


“개차반 같은 남자가 앞으로 달라지겠다는 말을 뱉을 순 있죠. 당신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면 뭐든 해줄 거예요. 하지만 당장 눈앞에 뻔히 보이는 걸 믿지 않는다면 당신만 바보가 돼요. 이 사진 속 남자는 그예요. 우리한테 속삭인 건 미스 메리고요. 남들은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나는 내가 본 걸 믿어요.” (423)


언데드 다루는 법 | 욘 A. 린드크비스트 |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엘뷔는 손녀 바로 옆에 가서 앉았다. “뭘 하시던가요?” 플로라의 그 말에 엘뷔는 한숨 돌렸다. 정신을 놓지 않았고, 오히려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엘뷔는 답을 알고 있었다.

“내 생각엔.” 그녀가 말했다. “살아 있는 척을 하는 것 같아.” (91)


즉시, 너무나 쉽게 타자화해 버릴 수 없는 언데드를 상상해보라는 제안 같다. ‘구원’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기억, 사랑, 죽음을 합치면 그게 될 듯도 하다.


경계선 | 욘 A. 린드크비스트 | 남명성 옮김 | 문학동네


1. 경계선 : 북유럽 신화 속 트롤이 인간 세상에 끼어들어 삶.

2. 언덕 위 마을 : 기울어지는 아파트 건물. 하수구 속 문어 괴물.

3. 임시교사 : 로봇 선생 베라. 핑크 플로이드 음반 속으로 들어감.

4. 지나간 꿈은 흘려보내고 : <렛미인> 외전. 카린과 스테판의 러브스토리이기도 함.

5. 마지막 처리 : <언데드 다루는 법> 뒷이야기. 플로라와 엘뷔 재등장. 부활자 영혼들을 구원함.


야릇한 분위기 속에서 ‘비정상’ 혹은 소수자 또 혹은 약자를 포용하는 마음이 전해진다. 특히 여타 다른 뱀파이어, 언데드물과는 차별되는 격이 멋지다.


인 더 백 | 차무진 | 요다


나체의 동민이 아내 앞에 우뚝 섰다.

아내는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앉아 그를 보았다. 아니, 보는 것 같았다.

아내가 농담했다.

--울 신랑, 여전히 큰데. (83)


키 크고 물건도 큰 ‘울 오빠’(남매가 결혼한 줄)는 엄청난 능력자. 자극성과 반전에 기댄 억지 비장함.


낯익은 괴물들 | 김종광 외 8인 | 폭스코너


촉법소년, 성 착취, 인공지능 세 가지 테마 각각 세 편의 단편소설이 엮였다. 무섭고 화가 난다. 무섭고 화가 나서 후딱 읽게 된다. 후딱 읽다가 듀나 작가 SF에서 겨우 숨통 텄다. 이렇게-->헥헥. 밑줄 친 문장은 없네.


신의 아이 | 코맥 매카시 |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응? 감히 코맥 매카시 ‘순문학’을 호러 카테고리에 넣다니? (무서웠어요) 위 모든 작품들 보다 더 호러블한 매카시 선생이다. 어쩌면 호러 장르로 분류되지 않아 더 충격이 컸겠다 싶다. 희한하지, 빌어먹을 개자식의 일대기를 보는데도 고매해. 매카시 맛이란 것은. ‘아니, 그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안타까운 인간들이었어. 죄다 삼백육십도 개자식들이었다고. 이건 우리 아버지가 쓰던 말인데 어디에서 보나 개자식이란 뜻이야.’(202) 개자식 아니고 신의 자식. 마흔에도 매카시의 비정함은 여전했음.


어쩌다 보니 호러 모음 끝.



2021년의 책 술이깰때까지자시오


2021년 출간된 책들 중 제가 읽은 산 책이 대상입니다. 범위 정말 좁지요? 그러니 더욱 축하합니다. 짝짝짝.


1. 올해의 장편

프로젝트 헤일메리 | 앤디 위어 |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 2021. 5


읽을 때 참 행복했습니다. 2021년 단연 최고잼이었어요. 질질 울었다는 백자평들을 보며 왠지 (어쩌면 동질감으로) 빙글 웃게 됩니다. 동료들, 그렇쥬, 질문?



2. 올해의 앤솔러지

책에 갇히다 | 김성일, 문녹주, 이경희 외 | 구픽 2021. 1


단편들 간 편차가 크지만 그런 만큼 취향적격 작품을 만날 수도 있겠습니다. 제 경우 붉은 구두, 금서, 바벨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책에 관한 이야기잖아요!



3. 올해의 건축

피라네시 | 수재나 클라크 | 김해온 옮김 | 흐름출판 2021. 10


공간 배경이 장난 아닙니다. 너무 멋져서 깜짝 놀랐어요. 꿈에 나올 듯한 공간, 그것을 또 현실과 어떻게 연결시켜 놓는지 지켜보는 과정이 있습니다. 짠, 다 꿈이었지롱, 식의 전개는 적어도 아니니 믿고 보셔도 좋겠습니다.



4. 올해의 스릴러

펠리시아의 여정 | 윌리엄 트레버 |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2021. 5


무심한 문장으로 차곡차곡 쌓아가는 조짐 끝 터뜨리는 한 방. 이런 거 좋아합니다. 제 말로 ‘망치맛’ 말이죠. 조짐, 조짐. 문장, 문장 꼭꼭 씹어 읽게 하는 힘이 트레버 선생에게 있는 듯합니다.



5. 올해의 웃음

전국축제자랑 | 김혼비, 박태하 | 민음사 2021. 2


K스러움을 꼬집는데 그렇다고 아프지는 않은 게, 열린 마음과 다정함이 뒷받침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제목부터 일러스트까지 찰떡궁합 유쾌한 르포르타주. 무엇보다, 제가 매우 사랑하고 부러워하는 글발입니다.



6. 올해의 허명

사랑의 종말 | 그레이엄 그린 |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2021. 11


소설에서 제가 싫어하는 스토리 두 가지를 여기에서 밝히겠습니다. 사랑에 관한 겁니다.

1) 남주가 첫사랑을 이루지 못한 이후 마음을 탁 닫아버려 주위 모든 것에, 모두에게 무심하고 무뚝뚝한 민폐 캐릭이 되는 겁니다. 제 스스로는 쿨하다고 할 마음 가난뱅이 류로,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같은 (슬퍼하라고 쓴 듯한) 이야기에도 저는 짜증만 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2) 여주를 죽여 놓고 (살해했다는 게 아니라 병이나 허약체질로 ‘사망시켜’ 놓고) 그이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남주들이 회상하거나 논평하는 겁니다. <사랑의 종말>은 뭐다? 딱 이 경우다. 명성이 자자한 작품이라 기대를 품고 봤습니다만 제겐 허명이 됐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린 선생. 싫었어요. 다른 작품들은 물론 더 읽어볼 요량입니다만 사랑의 종말은 정말이지 제게 종말이었습니다. 흑흑.



7. 올해의 사막

타타르인의 사막 | 디노 부차티 | 한리나 옮김 | 문학동네 2021. 2


그야말로 사막 같은 책입니다. 멋지다는 의미에서. 허무한 인생 같다는 의미에서.



8. 올해의 바다

바다 생물 콘서트 | 프라우케 바구쉐 | 배진아 옮김 | 김종성 감수 | 흐름출판 2021. 7


바다 생태계입니다. 빼곡합니다. 허투루 존재하는 게 없네요. 플랑크톤부터 심해까지, 펄떡이는 생명과 순환이 아름답습니다. 다만 가차오탈리즘 발동하게 됩니다. ‘추측컨대’ ‘짐작컨대’가 자주 나와요. 바른 표기는 ‘추측건대’ ‘짐작건대’입니다. ‘생각건대’와 마찬가지로요. 좋은 책이 이런 것 때문에 책잡히면 아쉽잖아요? 교정 좀 신경 써 주시면 좋겠습니다. 바다 관련 책들을 모으다 보니 한정 없네요. 물고기 한 마리(?)가 또 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만 사고 좀 읽어라, 나여. 네. 문어와 뱀장어를 읽고 있습니다.


(안물안궁 TMI) 바닥 모양이 바뀌었쥬?



9. 올해의 여행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 에릭 와이너 |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2021. 4


백자평을 불러옵니다.

<행복의 지도>에서부터 알아봤다. 여행을 감미한 공부와 취재. 유머와 따스함. <천재의 지도>도 기대하고 있다.’

소크라테스, 공자, 에피쿠로스, 베유, 보부아르 등의 현명함을 전수 받아서 좋았다고 쓸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저자에게 제 마음이 달칵 열린 지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바로 저자의 가방 수집벽입니다. 글쓴이의 이런 ‘약점’에 저는 약합니다. 책 또 사고 말았다며 징징대는 글을 사랑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음. 그렇다고 저자의 45개! 가방에만 밑줄을 치지는 않았습니다.

'교실에서 공자는 무서운 존재였다. (…) 한 젊은 남성이 오늘날의 ‘쩍벌남’처럼 “가랑이를 활짝 벌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본 공자는 남자를 “버러지”라 부르며 꾸짖고 지팡이로 남자의 정강이를 때렸다.' (310)

올해의 문장 되겠습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올해 만난 ‘쩍벌’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다리를 넓게 벌려서 삼각형 또는 이른바 삼점의 불경함을 이루는 것은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배반의 악마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다이어그램에 속한다.’ (<사이클로노피디아> 185)

누군가 떠오른다면... 흡. 공자의 지팡이를 생각하면 좀 후련해져요.ㅋ 2021년에 정치를 혐오하게 됐지만 내년 투표는 할 겁니다. (불끈)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는 읽힐 목적으로 쓴 게 맞나 싶을 만큼 어지럽습니다. 아우라는 있는데 감동은 없었어요. 사실은 제대로 읽었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아주 힘들게 완독했다는 점에서 리스트에 등장해도 손색은 없겠네요. 

올해의 석유 혹은 올해의 컬트 정도 될까요. 이런 백자평을 썼습니다. 복붙.

‘옥탄가 높은 번역임에도 (존경!) 내 독서기계는 이상연소, 노킹 발생. 다른 말로, 머리에 쥐 났습니다. 들뢰즈 가타리를 만난 듯한 느낌이 반갑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하네요. 산만하고 장황한 헛소리인지, 합리적 사변 문학인지, 그 둘을 구분하는 건 또 무슨 의미인지 싶은, 컬트 필 다분 문제작.’

올해의 여행 주인공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로 돌아와, 저자가 4년 앞서 쓴 <천재의 지도>에도 가방 얘기를 했을까요. 그랬다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수집벽 초심자 와이너 선생, 가방 컬렉션 아직은 20개쯤으로.



10. 올해의 표지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 최승자 | 난다 2021. 11


티에르탕의 베케트 | 멜리스 베스리 | 이세진 옮김 | 뮤진트리 2021. 12


지난달과 이번 달에 나온 신간입니다. 표지 카테고리를 만든 이유, 따끈할 때 사서 아직 읽지는 않았는데 올해의 책 리스트에 포함시키고 싶어서입니다. 이 얼굴들 좋아합니다. 사진 찍어놓으면 작가 아우라가 저절로 따라온다고 할까요. 제가 사랑하는 작가들이에요. <한 게으른 시인>은 최승자 선생 산문집. <티에르탕>은 베케트 선생이 쓴 게 아니고 말년의 그이를 그린 소설이랍니다. 잘 읽어 보겠습니다. 올해의 책 끝+해피 뉴 이어!



P. S. 새 집 이름 지었습니다. 선셋살롱입니다. 매일 창문으로 저녁노을이 찾아오더라고요. 서향이라는 얘기죠. 선셋살롱은 중고책도 팝니다. 알라딘>온라인 중고>판매자샵에서 보신다면 반가워해주세요(주문해주세요). 계속 업데이트합니다. 끼룩.




보물섬 Smoking


보물섬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강성복 옮김 | 펭귄클래식 코리아


“존 실버, 당신은 악명 높은 악당이자 사기꾼이오. 아주 형편없는 사기꾼이오. 당신을 처벌하지 말아달라는 얘기를 들었소. 그러므로 내 어떻게 하지는 않겠소. 하지만 죽은 자들이 당신 목에 맷돌처럼 매달려 떨어지지 않을 것이오.” (307-308)


펭클 마카롱입니다. 예쁩니다. 앞표지 안쪽 스티븐슨 얼굴 그림 외엔 삽화도, 섬 지도도 없습니다. 번역본이 여러 종이나, 월터 패지트의 삽화가 실린 판본은 없는 모양입디다. <피터와 앨리스와 푸의 여행>에서 본 바, 패지트의 그림 아주 멋지던데 말이죠. 아쉬운 대로 숙제 완료하였습니다. 소년 소녀 권장 도서를 중년이 읽으면 어떻다? 겸연쩍다... 그러나 이 숙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척 즐거웠습니다. 생각건대, 교훈 같은 게 없어서인가 봅니다. 아주 그냥 직진으로, 모험과 재미!라고 할까요. 물론 꼬집자면 ‘소년’ 모험 소설이라는 점이 있겠습니다. 초반 잠깐 등장하는 짐 엄마를 제외하면 여성 캐릭터가 전무합니다. 벡델 테스트 통과 못하겠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보물섬>을 혹평하였다는 내용도 <피터와 앨리스와 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벤 보우 제독’ 여인숙 소년 짐 호킨스가 어찌어찌 보물섬 지도를 손에 넣습니다. 의사 리브지, 지주 트렐로니와 함께 히스파니올라 호를 섭외하고 선원 모집하여 항해를 떠납니다. 선원 중 요리사로 들어온 사람이 키다리 존 실버입니다. 보물섬 지도에 대한 정보를 이미 간파하고 있던 해적이죠. 선상 반란을 모의합니다. 우리의 짐이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과 통 속에서 이를 엿듣는 장면 뒷이야기도 <피터와 앨리스와 푸>에서 보았습니다. 작가 스티븐슨 아빠가, 항해 동안 선원들 먹으라고 넣어두는 사과 나무통이 넉넉히 크다고 귀띔해 주었다는군요. 귀엽습니다. 스티븐슨의 의붓아들 로이드 외에 스티븐슨 아빠 토머스도 <보물섬>의 소중한 청중이었다는 얘깁니다. 토머스는 등대 및 해양 전문가였다고 합니다. 멋지죠? 등대 전문가라니! 배와 항해 디테일에서 스티븐슨이 든든했을 듯합니다. 다시 내용으로 돌아와, 히스파니올라 호는 해당 섬에 도착합니다. 두둥. 섬에서 벌어지는 요새전과 육박전, 심리전, 침투전, 보물찾기전... 페이지 순삭입니다. 스포방지 내용 끝입니다. (무려 130년도 넘은 모험기에 스포방지. 친절하쥬?) 



우리의 짐 활약을 보노라면, 로이드가 얼마나 열광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애초 로이드 한 사람 아니, 아빠 토머스 포함 두 사람의 청중이, 오래오래 남을 작품을 만든 경우라고 해도 되겠지요. 그런 점에서 더욱 좋았던 작품입니다. 소년 로이드는 이후 어떤 생활을 영위했을지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피터 팬> 데이비스<곰돌이 푸> 밀른 같은 삶은 아니었기를 바랍니다. 아 참 로이드는, 스티븐슨이 사랑에 빠진 유부녀이자 이후 스티븐슨 부인이 된 패니의 아들로, 이야기를 재촉하던 당시 13세였습니다.


4부 초반, 그러니까 소설 딱 중간 지점에서 세 장에 걸쳐 화자 시점 변환이 있어 의아했습니다. 내내 짐의 목소리이다가 갑자기 의사 리브지 목소리가 등장해요. 역시 <피터와 앨리스와 푸>에서 사연을 알게 되었습니다. 허약해빠진 스티븐슨이 연재에 몸을 혹사당해 3부까지 쓰고 휴지기를 가졌다는군요. 따라서 4부를 시작할 때 ‘이전 편에서…’ 식으로 리브지가 내용을 설명해주는 격이랍니다. 저 유명한, 이상야릇무시무시부리부리카리스마 캐릭터 존 실버는 3여 년 후 탄생할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의 싹이 아닌가 했습니다만, 저만의 생각인 걸로 합시다. 그보다 제게 아주 컸던 발견(?) 혹은 환멸(!)을 적겠습니다. 존 실버 모델에 관한 겁니다. <피터와 앨리스와 푸>에서 곽한영 선생은 스티븐슨이 친구 헨리 제임스를 그렸다고 했잖아요? 흑흑, 곽선생님...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William Ernest Henley (1849~1903)

영국의 시인·비평가·편집인. 자신의 잡지를 통해 1890년대 영국 대문호들의 초기 작품을 소개했다. 어려서 결핵을 앓아 나중에 한쪽 발을 절단해야 했다. 다른 한쪽 다리는 그가 에든버러에서 만났던 외과의사 조지프 리스터의 인술과 새롭고 철저한 외과치료법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에든버러에 있는 병원에서 20개월(1873~75) 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병원 생활에 대한 인상적인 자유시를 써서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이때의 작품이〈시집A Book of Verses〉(1888)에 수록되어 있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또한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라는 행이 들어있는 가장 인기 있는 시〈인빅터스Invictus〉(1875)도 이 시기에 씌어졌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과의 오랜 우정은 1874년 그가 환자였을 때 시작된 것으로 헨리는〈보물섬 Treasure Island〉에서 불구인 친구를 보살피는 롱 존 실버라는 인물로 그려진다. (다음 백과, 강조는 나)


일단 외과의사 조지프 리스터 선생 반갑고요, 넬슨 만델라 님이 낭송하여 유명해졌다는 ‘인빅터스’도 정보 저장하였습니다. ‘불구인 친구를 보살피는 롱 존 실버’는 엉터리이지만 요는, 그 헨리가 이 헨리였던 것입니다.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 편집자로 일하면서 키플링, 헨리 제임스(!), H. G. 웰스 등에게 처음으로 출간 제의를 하기도 했다고, 알베르토 망겔 선생이 <끝내주는 괴물들>에서 말하네요. 나무 의족 같은 외모만 차용한 줄 알았으나 헨리는 이후 스티븐슨과 불화했다고도 하고, 이래저래 어쩌면 내면까지도, 스티븐슨이 헨리를 존 실버에게 투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들의 사연과,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삶도 퍽 궁금합니다. 어디선가 다시 만나면 반가워하겠습니다. 숙제도 하고, 틀린 정보도 수정하면서 근심 없이 빠져들었던 <보물섬>입니다. 사모아 섬의 투시탈라(이야기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입니다.


스티븐슨은 1883년 헨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롱 존 실버가 태어난 것은 자네가 장애에도 불구하고 보여준 힘과 능란한 수완 덕분이었네…… 불구의 몸으로 사람들을 쥐락펴락하고, 발소리만으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사나이라는 발상은 순전히 자네에게서 가져온 걸세.” 그러나 이 해적 요리사를 그리는 데 영향을 준 요소는 그뿐만이 아니었을 듯하다. 헨리의 복합적인 성격, 지성, 손상된 용모, 과장스러운 행동거지, 한없는 야망 등이 어두운 방식으로 반영된 인물이 바로 실버였을 것이다. (303-304, 알베르토 망겔, <끝내주는 괴물들>)


<피터와 앨리스와 푸의 여행> 163쪽, 패지트의 삽화 + <끝내주는 괴물들> 299쪽, 망겔의 삽화 (귀여워서 깔깔)




0830알라딘지름 술이깰때까지자시오


9월 사은품을 일찍도 받았쥬. 8월 쿠폰을 쓰면서 9월 적립금 및 사은품을 지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9월은 허전해서 어쩌느냐고요? 그럴 리가요. 살 책과 굿즈는 늘 있..



문동 세계문학전집: 나와 닮은 캐릭터는? 술이깰때까지자시오


재밌네요. 책쟁이들 한번 해보시길.


저는, 두구두구...

<프랑켄슈타인>을 좋아하는 건 진심, 딱 걸렸네요. 신통방통합니다아.


백자평과 밑줄: 홀, 전국축제자랑, 택시, 여자를 위해, 믿습니다! NoSmoking


홀: 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 김홍모 | 창비


눈물을 꾹 참고 보려했습니다만, 왜 꾹 참아야하는지요. 용기 내어 펼쳐 보고 웁니다. 부디 안녕을, 일상을 바랍니다. 같이 울어요. 또 같이 웃어요, 꼭.


나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부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과 의사는 그때 본 것들이 너무 괴로운 기억이라 보호본능이 작용해서 기억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오히려 기억이 안 나는 게 좋을 거라고. 기억을 하게 되면 못 견딜 거라고.

나중에 해경에서 찍은 영상을 봤는데

나는 혼자 세월호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73)



전국축제자랑 | 김혼비ㆍ박태하 | 민음사


이토록 다정하게 까발리는 K스러움이라니. 이토록 유쾌한 르포르타주라니. 제목부터 일러스트까지 완소5별+깔깔.


그런 김혼비의 마음에 유일하게 걸리는 것이 있다면 축제가 올해 내건 슬로건 ‘오감만족, 완주에서 FUNFUN하게!’였다. 맙소사. 김혼비는 ‘뻔’을 ‘Fun’으로 바꾸는 식의 K-관공서식-위트(‘위트’라고 불러 주는 것도 감지덕지다.)를 정체불명의 애벌레를 한 주먹 먹어야 하는 것보다도 견디지 못했다. 아직도 ‘Fun한’이라니 너무 뻔하지 않은가.(2016년 정도에서 끝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에도 ‘희로愛rock 공연’, ‘우리가 그린Green 대회’, ‘맘mom 편한 톡톡talktalk 타임’ 같은 이름의 행사는 조용히 외면해 왔다. 그런 김혼비가 그래도 슬로건이 ‘가을 냄새 FallFall 나는 강추(秋) 축제!’가 아닌 게 어디냐고 애써 두둔해 주며 이곳까지 온 것은 그만큼 와일드푸드에 대한 열정이 컸다는 점으로밖에 설명이 되질 않는다. 완주에 도착할 때쯤, 완주군이 펴내 무려 전국 서점에서 유통 중인 관광 안내서의 제목이 ‘완주 놀Go 보Go 먹Go’인 것을 발견하고 마음이 다시 차갑게 sick기는 했지만(완주군을 떠도는 ‘제목 빌런’, 그는 대체 누구인가.) 에라error 모르겠다, 눈 딱 감Go, 와일드푸드를 향한 우리들의 두드림DoDream! (188-189, 이건 먹고 들어가는 콘셉트 | 전북 완주 완주와일드푸드축제)



아무튼, 택시 | 금정연 | 코난북스


유쾌함이 늘 좋습니다. 책 읽고 영화 보고 담배 피우고 택시 타고 에 또... 글 많이 써 주세요! 인세 들어오면 책 읽고 영화 보고 담배 피우고 택시 타고 에 또...


기사 할아버지는 최고령 택시 기사 기록을 깨는 게 목표라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약간 감동했다. 해맑게 말하는 기사 할아버지에게 어떤 종류의 애정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자문했다. 이건 누군가와 함께 롤러코스터를 타거나 외나무다리를 걷거나 공포영화를 보면 심장 박동이 빨라져서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과 같은 종류의 감정이 아닐까? 확실히 내 심장은 빨리 뛰고 있었다. 택시 기사 할아버지의 떨리는 손을 본 이후로 쭉 그랬다…… (67-68, 라이센스 | 고령화 택시)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 이라영 | 문예출판사


멋진 작가들 소개 잘 받았습니다. 작가와 작품에 장소성이 함께 하니 더 좋네요.


나는 백인 남자들의 저서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사람을 지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편견이 아니라 경험의 축적으로 얻어낸 결과다. (19, 서문 |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 오후 | 동아시아


‘섹시한’ 주제를 고르는 안목에 언제나 혹하게 됩니다. 다음 작품도 기대합니다. 4 전작 독자가 말합니다, 믿슈미다!


“무지는 지식보다 더 확신을 가지게 한다.” -찰스 다윈

“이 시대의 아픔 중 하나는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은 무지한데, 상상력과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의심하고 주저한다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

이 두 위인의 말에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 더닝 크루거 효과다. (…) 새로운 분야를 접하면 처음에는 누구나 무지하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든 첫 번째 정보가 들어오면 그 내용을 신뢰하게 되며, 이후 자신이 그 분야를 잘 아는 것처럼 그 주장을 반복하게 된다. (344-345, 심리 : 우리는 왜 미신을 믿는가 | 믿음은 더 큰 믿음을, 무지는 더 큰 무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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