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평 프랑켄슈타인 1 : 프랭키스슈타인, 죽은 자의 제국, 메리 고드윈 Smoking


프랭키스슈타인 | 지넷 윈터슨 | 김지현 옮김 | 민음사


현재적이고 윈터슨적인 변주다. 메리 셸리의 ‘미래는 지금’(141)이었을 것 같다. 동시대로부터 여전히 위협 받는, 앞선 사람. 빅터가 말했다. “맞아. 시간에 맞서는 경주야. 나는 오래 살아서 미래에 도달하고 싶거든.” (217)



죽은 자의 제국 | 이토 게이카쿠ㆍ엔조 도 | 김수현 옮김 | 민음사


실존 인물과 역사, 기존 소설 속 인물과 19세기 (대체역사 식) 이야기들이 혼재한다. ‘프랭키스슈타인’에서는 메리가 에이다 러브레이스를 만나기도 하던데 ‘제국’에서는 배비지의 해석 기관이 절정을 이룬다.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했다.



메리 고드윈 1, 2 | 박설아ㆍ유진수 | 서울문화사


짧은 분량 안에 프랑켄슈타인 작품 안과 밖의 진행이 골고루 엮였다. 메리의 뮤즈를 실물로 등장시켜 ‘만화’의 재미를 더한 듯.


 “제가 만일 괴물이었다면… 외로웠을 것 같아요….” (1권, 쪽수 없음)




+메리+퍼시 셸리, 바이런+클레어몬트 일행의 이 유명한 1816년 여정에 함께했던 의사 폴리도리가 써낸 작품은 어떠했을까. <뱀파이어>라는 단편이고, 책세상 <뱀파이어 걸작선>에 실려 있다. 런던 사교계에 등장한 창백하고 아름다운 남자가 알고 보니 뱀파이어였더라, 하는 소설이다. 짧고 단순하고 싱겁던데, 출간된 1819년에는 퍽 오싹하기도 했겠다. 르파뉴의 <카르밀라>가 1872년,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1897년 작품임을 감안하면.




백자평과 밑줄: 에드거 앨런 포 삶이라는 열병, 공포를 보여주마, 더 레이븐 Smoking

에드거 앨런 포, 삶이라는 열병 | 폴 콜린스 | 정찬형 옮김 | 역사비평사


짧은 분량에 꾹꾹 눌려 담긴 일생이네요. 가난, 야심, 재능, 반목, 술, 신경쇠약의 포. 쓸쓸합니다. 한편 ‘레이놀즈’에 대하여 콜린스 선생은 추정 하나를 내 놓네요? 끄덕끄덕 수긍했습니다.


그다음 이틀 동안 포는 불안한 수면 상태와 두 명의 간호사가 깜짝 놀라 몸을 잡아야만 할 정도의 격렬한 발작을 번갈아가며 반복했다. 모런 박사의 진료 일지에 따르면 “그는 ‘레이놀즈’라는 이름을 밤새도록 불렀는데, 다음 날인 일요일 새벽 3시가 되어서야 그쳤다.” (스포방지, 중략) 그것은 지하 세계로의 길 안내를 요청하는 실로 적절한 주문이었다. 그날 아침 5시, 에드거 앨런 포는 그의 시 「애니에게To Annie」에서 예상했던 자신의 운명을 만나게 된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온갖 위기와-

위험들을 더 이상 겪지 않고,

오랜 질병에서도 마침내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삶’이라고 부르는 열병도

드디어 치유되었습니다. (174-175)


+59쪽 오류. 1836년 5월, 스물한 살의 에드거는 당시 열세 살이었던 자신의 사촌동생, 버지니아와 결혼식을 올렸다. (포는 1809년 생으로 1836년에 스물일곱 살이었음)


공포를 보여주마 | 니콜라이 프로베니우스 |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일대기에 충실한 와중 레이놀즈를 ‘실물’로 등장시켜버리는 패기. 포의 세계와 잘 어울리는 공포 팩션물이네요.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언제쯤 이뤄질까요?”

“뭐가?”

“지금까지 쓰신 내용 말이에요.” (80)


Le Corbeau / The Raven | Edgar Allan Poe | Project Gutenberg


무려 말라르메 선생 번역. 불어판 반갑고 한글판 많으나 역시 ‘네버모어’ 맛을 보려면 영어판인가 봅니다. 이 공짜 책에 영/불 두 버전 다 실려 있다는 사실, 훌륭하지 않습니까.


And the lamp-light o'er him streaming throws his shadow on the floor;

And my soul from out that shadow that lies floating on the floor

Shall be lifted-nevermore! (26-27/57)




백자평과 밑줄: 불평꾼들, 처녀들, 미들섹스 Smoking

불평꾼들 | 제프리 유제니디스 |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 왜냐하면 독자는 똑똑하며, 작가가 잘난 체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486, 옮긴이의 말 중 작가의 말) 겸손이즈낫씽, 유제니디스와의 첫 만남이 아주 멋졌습니다. 사 모셔두었던 이전 작품들 꺼내볼 마음이 뿜뿜 솟네요.


“이제 우린 정말 그 두 늙은 여자와 비슷해.” 어느 날 델라가 캐시에게 말한다.

“그렇다 해도 둘 중에 더 젊은 여자는 여전히 나예요. 그걸 잊지 말아요.”

“맞아. 당신은 젊은 늙은이고 난 순전히 늙은 늙은이일 뿐이야.” (61, 불평꾼들, 강조는 원문)


처녀들, 자살하다 | 제프리 유제니디스 | 이화연 옮김 | 민음사


부모의 억압, 과도한 보호, 학대, 혹은 유전자 문제? 시대적 우울? 피로감? 그도 아니면 소녀로서의 삶이 이토록 힘들다는 은유? 모호하나, 죄책감은 분명 너무 늦게 알게 된 ‘도와줘’라는 신호 때문, 아마도.


리즈번 자매들의 수다에 놀라서 사내 녀석들은 처음엔 입도 뻥긋 못했다. 그들이 그렇게나 말이 많고, 그렇게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고, 세상의 풍경에 그렇게 많은 손가락질을 해 댈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가 그들을 간헐적으로 엿보는 사이사이에도, 그들은 계속 살아가고 있었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성장했으며 철저한 검열을 거친 가족 서가에 있는 책이란 책은 모조리 다 섭렵했던 것이다. 게다가 텔레비전이나 학교에서의 관찰을 통해 데이트 예절까지 꿰뚫고 있어서, 대화를 부드럽게 이어 가는 방법이라든가 어색한 침묵을 깨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146-147)


 

미들섹스 1, 2 | 제프리 유제니디스 | 이화연ㆍ송은주 옮김 | 민음사


적어도 3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했던,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성장소설. 품절이라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일독이었습니다. 합본+재출간되면 좋겠네요.


독자 여러분이 알고 싶은 건 아마도 이런 것들일 게다. 우리가 어떻게 사태에 적응했을까? 지나간 기억들은 어떻게 됐을까? 칼리오페는 칼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죽어야만 했던 것일까? 그 모든 질문들에 대해 나는 진부한 이치로 답을 대신하겠다. 이 세상에 우리가 적응하지 못할 것은 없다는. 내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돌아와 남자로 살아가기 시작한 후, 우리 가족은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녀에서 소년으로의 변화는 누구나 다 겪는 유아에서 성년으로의 변화보다도 훨씬 덜 극적이었다. 대부분의 면에서 나는 이전의 나 그대로였다. 지금 현재에도 나는 남자로 살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어머니의 딸이다. (365-366, 2권)




2022 올해의 책 술이깰때까지자시오


때가 됐군요. 2022년 출간 도서 중 에르고숨이 사 읽은 책들이 후보입니다. 몹쓸 에르고숨이 신간을 많이 읽지 않았는지, 경쟁이 치열하지는 않네요. 완소5별 뿐 아니라 4별까지 범위를 넓혀 골랐습니다. 어쨌거나, 축하합니다. 백자평 복붙합니다.



1. 올해의 망치


태풍의 계절 | 페르난다 멜초르 | 엄지영 옮김 | 을유문화사 2022. 12


어둡고 어두운데 이 몰입감 뭐지? (‘필력’인가 보다) 죄책감을 느껴야할까? (죄책감과 조처는 응당 정치하는 자들의 몫이 되어야) 3별리뷰에 땡투구매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으나 어쩌지, 5별로 반해버린 문제작. (양극성 호불호 주의요)



2. 올해의 불안


레이디스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김선형 옮김 | 북하우스 2022. 12


불안 불안한 분위기를 어쩜 이렇게 잘 만들어낼까. 그러면서도 온기가 약간 도는데. (무려) 밝고 예쁜 루이자부터 불길한 영웅을 거쳐 가장 ‘하이스미스다운’ 애프턴 부인까지 스펙트럼이 생각보다 훨씬 넓잖아. 하나하나가 다 멋지고 모여서 더 멋진 단편집.



3. 올해의 사랑


나는 사이보그가 되기로 했다 | 피터 스콧-모건 | 김명주 옮김 | 김영사 2022. 11


페이지터너로 밝혀져. 또르르 슬픈 와중 유머도 반짝이는 이거슨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였으니.ㅜㅜ RIP.



4. 올해의 (어긋난) 사랑


그림의 이면 | 씨부라파 | 신근혜 옮김 | 을유문화사 2022. 9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혼자서 할 수도 없으며 미루거나 당길 수 없이 둘의 시간!이 만나야 하는 거, 사랑. 아이고.



5. 올해의 므흣


내가 행복한 이유 | 그렉 이건 | 김상훈 옮김 | 허블 2022. 8


다 읽지도 않은 주제에 감히 이럼. 표제작은 알고 있거든. 아껴 읽을 심산+흐믓=내가 행복한 이유.



6. 올해의 피서


동쪽 빙하의 부엉이 | 조너선 C. 슬래트 | 김아림 옮김 | 책읽는수요일 2022. 3


물고기잡이부엉이 보전을 위한 탐사 기록. 아르세니에프 선생 환기가 반가웠음. 가끔 소개되는 연해주 주민들 이야기 또한 엉뚱하면서 재미있고. 피서 책으로 제격. (여름에 읽었음)



7. 올해의 전쟁


파이드 파이퍼 | 네빌 슈트 | 성소희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2022. 3


아이들이 너무 귀여워서 눈물겹다. 총알이 난무하고 피가 철철 흐르는 여느 전쟁 장면보다, 하워드가 아이들을 조롱조롱 데리고 다니는 여정 <파이드 파이퍼>가 더 오래 생각날 것 같다. <해변에서> 인류 종말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 보여준 바 있는 네빌 슈트다. 말레이에서 험난한 포로 생활을 겪은 한 여성의 실화를 <나의 도시를 앨리스처럼> 들려준 네빌 슈트다. 또한 <록스 호텔> 등장인물이 바다에 빠져 떠 있는 동안, 자신이 일생 전작품을 읽지 못해 아쉽다고 거론했던 작가 네빌 슈트다. 이제 나는 전작했다. 바다에 빠져도 떠올리지 않을 이름이 된 셈인데 전작해버려 오히려 아쉽다. 모두 완소5별은 못되고 올4별이지만 묘하게 정이 간다고 할까... 뭐야 왜 길게 쓰고 있어, 백자평 아니었음?



8. 올해의 스릴러


블랙하우스 | 피터 메이 | 하현길 옮김 | 비채 2022. 7


과거와 현재가 오가며 긴 이야기가 펼쳐진다. 18년 전후로 만나는 인물들이 내 지인들처럼 반가워진다. 쇠락한 모습이 쓸쓸하기도 하다. 섬의 축축한 바람 속 새 학살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무서움).



9. 올해의 뭥미


이상한 집 | 우케쓰 | 김은모 옮김 | 리드비 2022. 10


출판사와 관계자들께는 송구하다. 다른 좋은 책들도 내시리라 믿는다. <이상한 집> 광고가 짱이었다는 말도 되겠다. ‘건축 평면도만으로도 이렇게 소름 끼칠 수가 있다니!’라잖아. 호러 좋아하는 에르고숨이 딱 넘어갔다는 얘기다. 글 반 그림 반. 억지 전개에 소름은커녕 짜증이 조금 났는데. 그래도 링크를 하나 해 두자면, 고이케 마리코의 <이형의 것들> 중 ‘히카게 치과 의원’ 얘기가 떠오르기는 했다. 근친상간 의사와 간호사 사이에 난 자식과 집터 구조가.



10. 올해의 표지


짠. 1번을 더 크게 보고 계십니다. 술집 올해의 책이라는 뜻입니다. 2022년 마지막으로 완독한 책이기도 합니다. 한번 슥 훑어보려고 펼쳤다가 말 그대로 끝장을 본, 그야말로 빨려 들어가는 필력이었어요. ‘새끼 마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마을에서 손가락질 받으나 꽤 많은 여자들에게 안식이 되어주던 어머니 마녀 사연과, 이름도 없던 새끼 마녀, 이를 둘러싼 인물들이 하나씩 그려지면서 혼을 빼놓습니다. 모두가 어쩜 이런 어둠의 자식들인지... 몇몇 에피소드는 실화를 가져왔다고 작가가 밝힙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의하면 ‘악의 극단성이 충격적이고 초현실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곳,’ 멕시코입니다.


과장하자면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은 (실제로는 냉장고와 흡연실을 몇 번 다녀왔음) <태풍의 계절>, 한글파일2022에 126번으로 기록됐네요. 여름에 큰일을 겪고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형편 감안하면 그럭저럭 읽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피보호자가 거의 완쾌한 만큼 내년에는 다독하고 술집에도 뭔가를 종종 써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해피 뉴 이어! 




백자평과 밑줄: 제4 간빙기, 제노사이드, 치료탑 행성, 완전사회 Smoking

제4 간빙기 | 아베 고보 | 이홍이 옮김 | 알마


필립 K. 딕 + H. G. 웰스 + J. G. 발라드 + 벨랴예프 등이 한데 섞인 듯하다. 그래서인지 참신하다거나 놀라운 면은 잘 모르겠고, 은근한 여혐에는 실망하고 말았다. 60년 세월 감안해도 ‘일본 최초의 SF’ 가뿐하게 추천하지는 못하겠음. 못마땅하게 추천..


예언 기계가 등장했기에 세상은 더욱더 연속적으로, 마치 광물의 결정처럼 고요하고 투명한 것이 될 거라 믿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어리석었나 보다. ‘알다’는 말의 진짜 의미는 질서나 법칙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돈을 본다는 것이었을까? (241)


제노사이드 | 다카노 가즈아키 |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두께에 어울리는 스케일이다. 미국, 콩고, 남아공, 일본을 넘나들며 시시각각 펼치는 전개가 박진감 넘친다. 미국의 더러운 정치와 전쟁, 긴박한 제약 과정이 조마조마한 가운데 초인류까지! 인물들 각각을 타자화하지 않고 (아마 한 명 빼고) 등장시키는 점이 멋지다. 늦게 합류하며 엄지 척.


일방적으로 말을 하던 늙은 과학자가 대통령을 응시하며 말했다.

“무서운 것은 지력이 아니고, 하물며 무력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인격입니다.” (414-415)


치료탑 행성 | 오에 겐자부로 | 김난주 옮김 | 에디토리얼


황폐해진 헌 지구와 치료탑이 있는 새 지구. 어떻게 할 것인가. 읽는 동안 지루한 감이 없지 않으나 종국에는 약간의 뭉클함을 선물 받음. 오에 선생 표 반핵, 재건, 희생과 희망 같은 메시지로.


“(…) 네가 사쿠를 데리고 공터에 나갔을 때, 사람 키와 비슷해서 풀이 그만큼 무성하게 자랐나 하고 새삼스럽게 감격했다. 아무도 없는 초원에 바람이 불면, 바람은 전체적으로 고르게 부는 게 아니라, 파도가 그런 것처럼 한 곳에서 일어 거기에서부터 죽 퍼져나가지. 매일 봐도 참 놀라운 광경이야….” (137, 치료탑)


완전사회 | 문윤성 | 아작


벨러미의 수면 후 미래 유토피아와도 비교해볼 만한 미래상이다. ‘진성’ 사회라면 더 흥미진진하고 기발할 법도 하건만... 60년대 한계일까. 그 한계 내 예스러운 문투는 매력적이다. (미래에도 여전히) 문학이, 너와 세계를 구하리라는 취지도 (마음대로) 읽었다.


“내가 의심하는 것은, 나는 그동안 오랜 잠을 자고 났는데 깨어보니 세상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서, 그 까닭을 의심하고 있어요. (중략) 더욱 본질적인 면, 인류 사회의 기본 형태는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아요. 인간 대 인간, 또는 어느 집단 대 집단의 대립,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심각한 투쟁, 심지어 인간 상잔의 처참한 모습마저 예나 지금이나….” (278-279)


+‘완굥사회’에 부쳐.


“내가 기억하건대 예부터 어떤 집권자고 간에 인민을 위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고 봅니다.”

“왜 그런 소릴 하시죠?” 시니 팔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정치의 성과란 인민의 생활 상태에서 찾아봐야지 위정자의 설명만으론 판단할 수 없다는 겁니다.” (280)


“사생활의 공개와 사생활의 간섭은 다릅니다. 자기 행위가 떳떳한 이상, 공개되고 기록된들 무슨 상관이 있겠소. 그야 흐리멍덩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감당 못 하겠지만, 시니가 되겠다는 사람이면 그런 것쯤 문제 삼지 않지요. 시니가 되면 대단한 영광이죠. 권한도 커요. 시니의 말은 그대로 법률로 통하기도 합니다.”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큰 권리에는 그만한 비중의 의무가 따라야 한다는 초보적인 원리이기도 했다. (284, ‘시니’는 ‘장관’으로 바꿔 읽어도 됨.)


출간일 순으로:

제4 간빙기 (1959)

완전사회 (1965/1967)

치료탑 행성 (1990/1991)

제노사이드 (2011)


‘올해의 책’ 커밍 순...



곰들이 시칠리아를 + 1217알라딘 Smoking


곰들이 시칠리아를 습격한 유명한 사건 | 디노 부차티 글 그림 | 이현경 옮김 | 현대문학


작년 술집 ‘올해의 책’ (권위0+신뢰도 개취) 올해의 사막 부문에 선정된 <타타르인의 사막> 작가 신간입니다. 반가워 냉큼 주문해 읽었습니다. 디노 부차티 선생이 조카들에게 그려주곤 했던 그림들에서 싹이 터 이야기책이 됐다고 합니다. (작가들은 종종 이러쥬, 조카들의 소중함!) 이야기보다 그림이 먼저 존재했던 셈입니다. 귀여워요, 삽화 귀엽습니다. 그런 한편 책이 출간된 제2차 세계대전 시기를 생각하면 무거운 우화로 다가옵니다. 아주 먼 옛날 옛적 이야기라고 극구 강조하면서 전쟁을 얘기합니다. 처음엔 곰과 인간 간 전쟁입니다. 누가 나쁜 놈이고 누가 좋은 놈인가요. 적이 분명히 있을 때는 쉽습니다. 적을 물리친 다음에는 어떻게 되던가요.


곰이 동물 곰으로 등장하는 게 아니고 다른 민족, 다른 피부색, 다른 국가를 표상할 수도, 혹은 ‘활력, 순진함, 선량함, 강인함, 어짊, 너그러움’(155, 해설, 변형)을 상징할 수도 있다는 점, 그래서 우화라는 점 모르지 않지만 간단히 이렇게 말해버리는 내가 있습니다. 시칠리아를 반격하여 점령한 게 곰이 아니고 인간이었다면 이토록 아름답게 깨닫고 제자리로 돌아갈 리가 없다고요. 그러니까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할 해피엔딩을 선물 받았습니다. 미안합니다. 인간이 싫어졌어요. 또 미안합니다. 어린이 독자들이 보낸 편지가 서문에 몇 개 소개되는데 내 독후감보다 뛰어납니다. 인간이 싫어졌어요, 따위를 쓰고 앉아 있는 나란. 실은 현재 지구인 한 명에 대한 내 혐오감이 너무나 커서 그렇습니다. 능력 없고 옷맵시 없는 한 인간이 수천만 명을 인간 혐오자로 만드네요. 음... 요는, 부차티 선생 신간 사랑스럽습니다.


오, 다시 맑은 샘의 깨끗한 물을 마시게. 건강을 해치는 포도주 대신 말이야. 여러 가지 편리하고 근사한 것들과 헤어지자면 슬프겠지. 나도 잘 아네. 그러나 그 후에는 훨씬 행복할 거고 이전보다 훨씬 더 좋아질 거야. 친구들, 우린 살이 찌고 배가 나왔어. 이게 진실이야. (134)


(또또 미안합니다. 싫은 인간 삶이지만 포도주는 포기 못하겠어요)



1217


같이 온 아코디언 식 책자에는 본서에 실린 컬러 삽화가 거의 다 (아마도 한 컷 빼고) 들어 있습니다. 곰님들 작게 간직하기 좋을 아이템이네요. 반면 아니 에르노 매거진은 도대체가. 꼴랑 한 장짜리에 문학동네 에르노 책 광고만 실어놨습니다. ‘매거진’은 무슨, 100원짜리 광고 전단지예요. 저번 구르나 매거진처럼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 발췌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요. 실망스럽습니다. (혐오 0.1 증가) 까만 유령 양말+틴케이스 예쁘고요, 노란 네모는 프랑켄슈타인 봉투입니다. 보자마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라자냐가 떠올라서 크리스마스 그라탕 그릇도 슬쩍 같이 주문했습니다. 문준이 라자냐 할 줄 알거든요? 이번에는 겨울에 오는 내 여름 친구가요. 포도주 잔뜩 사 놓을 겁니다. (사랑 2.5 증가) 끝+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당신의 고독 Smoking

고독한 얼굴 | 제임스 설터 |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우리가 만난 적 있다는 말을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만났다기보다 당신이 나를 어렴풋이 봤다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어머니의 옛집 2층 작은 창을 통해서, 약 2초간. 그때 당신이 머물렀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당신은 견디지 못했을 테고 나와 어머니 역시 다른 삶을 살았을 겁니다. 다른 삶, 닿을 수 없는 당신에게 닿으려고 허공에서 홀드를 찾듯 버둥거리는 삶 말입니다. 당신의 고독이란 것을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외면함으로써 얻어오지 않았던가요. 그러니까 우리가 멀리서 잠시 만났던 그 여름날, 어머니는 옳은 선택을 했던 겁니다. Il faut payer. 당신이 당신의 암벽을 가지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에는 어머니와 나를 잃는 세계도 있었습니다. 그 세계에서 우리는, 어머니와 나는 행복했습니다. 당신도 그러했기를 바랍니다.


어떤 원망도 없이, 당신의 산과 고독을 생각해보곤 합니다. 수직에 가까운 수십, 수백 미터 높이 암벽에 매달려 홀드 하나하나마다 죽음을 상기하는 삶이란. 거대한 자연 앞에 한없이 미약한 존재감을 느끼는 순간이란. 생사의 경계를 함께 넘는 동료애나, 손에서 놓치고 만 물병이나, 등반에 장애가 되는 일행을 향한 증오나, 추락사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나, 부상당한 친구의 안타까움이란. 정상을 밟고 무사히 내려왔을 때의 성취감이란. 신체가 느끼는 낱낱의 고통과 집중력과 피로감을 샤워로 씻어내는 청량감이란. 열여덟 시간의 잠이란. 조난자를 구하거나 기록을 갱신하려는 욕망이란. 소문이 전설처럼 전해지는 유명 등반가의 명성이란. 변덕스러운 날씨와 장비를 탓할 수 없는 운이란. 단출한 소지품과 가재도구란. 떠도는 삶이란.


당신의 고독을 자유라 불러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력을 닮은 온갖 무거운 것들, 결혼, 가족, 가정, 정착지를 이루지 않음. ‘대가’를 치른 자유는 가벼웠습니까. 비싼 값으로 맞바꾼 고독은 행복했습니까. 이곳에선 시선을 들면 언제든지 알프스가 눈에 들어옵니다. 당신의 손과 발자국, 땀과 고독을 비밀처럼 간직한 그 ‘신전’(86)을 볼 때 나는 당신을 봅니다. 어머니의 옛집 2층 창을 통해 당신이 나를 보았던 것처럼 아련하게. 배낭 하나에 온 인생을 넣고 책임과도 같은 중력을 거슬러, ‘소설 속의 누군가처럼 사랑을’(210) 하며 오직 두 손 두 발로 암벽을 오르는 ‘이 아름다운 미국인’(193) 아버지.


어머니는 당신이 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세계에서는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저 ‘떠나가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흘끗 뒤를 돌아보는 것’(168)처럼 당신을 생각하는 편이 최선이라고. 다만 잠깐 손들어 인사해 봅니다. 커다란 허공 속, 수직 암벽, 의지할 곳이라곤 작은 홀드 몇 개와 로프일 뿐 나머지는 모두 죽음일 때, 혹시 당신은 한 번이라도, 당신과 같이 ‘옅은 빛깔의 머리털’(242)을 한 작은 존재를 생각했을까요. 무게, 중력, 추락하기에 맞춤한 짐. 그러지 않았기를, 내가 당신을 책임의 땅으로, 구속으로 끌어내리지 않았기를, 않기를 원합니다. 어머니께 전달되지 못한 당신의 편지처럼 이번에는 내가 당신께 닿지 못할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어머니를 따라 프랑스식으로 몇 번 발음해보았다는 내 이름을 서명으로 남깁니다. 당신의 산에 보 픽스(beau fixe)가 가능한 한 자주 함께하길 빌며, 장.



북쪽으로 가는 도중에 마침내 그르노블에서 그녀가 한 말을 알게 되었다. 자꾸만 굴러다니던 퍼즐 조각 하나가 문득 제자리를 찾아 들어간 것처럼 알아차렸다. 그는 그 집의 장식 없는 기다란 벽, 창문, 되는대로 마구 움직이는 아이의 조그만 팔과 더불어 그녀가 간단히 말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었다. ‘안녕’이었다. (242-243)



중독에 빠진 뇌 과학자 NoSmoking



중독에 빠진 뇌 과학자 | 주디스 그리셀 | 이한나 옮김 | 심심


직접 경험에서 우러나온 약물별 아름다운(?) 묘사가 인상적. 덕분에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중독과 뇌에 관한 훌륭한 이론서이자 훈훈한 경고서.


라고 5별 백자평을 썼습니다. 열일했습니다. 열일한 겁니다. 백자평도 쓰기가 이렇게 어려웠던가. 술집의 지난 독후감들을 훑어보니 참, 어찌 저리도 써댔나 싶습니다. 보세요, 지금은 벌써 다 썼다 이겁니다. 흑흑.


(씁, 더 써보겠습니다) 요는, <중독에 빠진 뇌 과학자> 재밌습니다. 까만 집에서 읽어낸 책입니다. 피보호자가 제목을 못 보게 내가 꼭 엎어놨던 기억이 나네요. 왜지. 왜긴, 중독이라는 말에 이미 죄책감이 들어서이겠지요. 까만 집에 흡연실(나 혼자 씁니다), 알코올(저녁 식사마다 맥주 500캔 하나씩 나만. 피보호자는 금주합니다), 책(당연히)을 슬금슬금 다 들여놓고 있는 중인데요, ‘중독’이라는 단어까지는 차마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금욕적인 까만 집에 주 5일을 머무르며 안녕한 걸 보면 나 중독자요,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중독이라는 활자를 보면 이상하게 뜨끔합니다.


아편, 코카인, 메스암페타민, 엑스터시 등에 노출되기 힘든 환경에 살아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했습니다. 저자의 약물 중독 경험이 담긴 서문만 읽어도 아, 힘겹습니다. 그리고 그리셀 선생 대단하다 여겼습니다. 자신이 빠졌던 중독을 연구하는 뇌 과학자가 되어 이런 책을 썼으니 말입니다. 쯧, 중독에 빠진 불쌍한 중생들이여, 현명한 내가 구원해줄게, 식의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닙니다. 중독과 함께 밑바닥에서 굴렀던 자기 과거를 솔직히 고백하며 그로부터 회복한 현재 삶을 행복하게 누린다고 얘기합니다. 이 행운, 혹은 구원 그리고 이어진 힘겨운 노력이 가능했던 ‘계시’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스포방지.


하지 않겠습니다. 오랜만에 쓰는 주제에 더 써보려고요. 그리셀 선생의 코카인 친구 스티브의 한 마디였습니다. 밑줄 쫙+볼드 땋. 준비됐습니까.


‘세상의 모든 코카인을 가져와도 우리의 욕구를 채우기에는 부족하다.’


ㅠㅠ 계시라고, 저자 본인이 썼습니다. 종교 용어가 이럴 때 맞아떨어지는 걸 어쩌나요, 써야지요. 불경하게스리, 할렐루야. 이런 부분도 있습니다. ‘술이 대형 망치, 일명 오함마이고 코카인이 레이저라고 한다면(실제로도 그러하다) 대마는 한 통의 새빨간 페인트라고 할 수 있다.’(88) 직접 경험에서 온 묘사 되겠습니다. 저자가 이별하기에 가장 힘들었던 약물이 대마였다고 합니다. 대마, 뭔가 아련하지만 쓰지 않겠습니다. 뇌의 희한하고 대단한 능력은 쓰고 싶습니다. 거의 모든 약물에 반응하는 뇌의 마술인데요, 외부에서 들어오는 약물이 일으키는 효과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그것도 약물이 직접 들어오기도 전에, 들어온다는 기대감을 갖는 순간부터 상쇄 작용을 합니다. 그 때문에 내성과 금단증상과 집착적인 갈망이 생깁니다. 간단한 그래프로 보여주는데, 그리셀 선생이 피부에 새기고 싶은 그림이라고 합니다. 하하. 우리도 무언가 강조하고 싶을 때 써먹도록 합시다, 타투.



금욕적(이고 교회적)인 까만 집에서 혼자 불경한 마음으로 읽은 중독 뇌 과학책이었습니다. 백자를 넘어 일기 같은 독후감을 쓰고 보니, 중독이라는 말이 왜 뜨끔했던지 조금은 알겠습니다. 부끄러웠던 것 같습니다. '약물 따위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제법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8) 그렇죠. ‘문제’를 망각하고자, 도망가고자 했던 마음 말입니다. '내가 배운 것은 중독의 반대는 단순히 약물에 취하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상태라는 사실이다.'(24)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고맙습니다.


나 같은 사람들에게 약물은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임을 망각하게 만드는 잠재적 도구로 작용한다. 하지만 그 누구라도 수없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직업이나 가족,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면과 익숙한 허울 들을 벗어 던지고 탈선을 감행할 수 있다.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의 표현처럼 ‘자유란 견디기 힘든 것’이다. 만약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얼마나 쉬이 변할 수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그저 앞으로도 자신의 습관과 은행 계좌를 비롯하여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들이 무탈하게 제자리를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하기 바란다. (24-25, 강조는 나)



바다2 : 막, 마라코트 심해, 물고기 인간, 잭과 천재들2 Smoking


막 | 지다웨이 | 문희정 옮김 | 글항아리


황폐화된 육지를 떠나 인류는 바다 속으로 이주했다. 21세기 끝자락이 배경이다. 열기와 자외선이 이글거리는 육지에는 전투형 안드로이드가 활약하고 사람들은 바다 속에서 산다. 피부 관리사 모모가 주인공이다. 어쩐지 어두운 과거가 있는 듯, 30살인 2100년 현재 엄마와는 20년째 만나지도 않고 홀로 살며 어린 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앤디를 추억한다. 앤디의 행방부터 암묵적 스포방지일 텐데, 놀라운 건 이후에 더 큰 이야기가 기다린다는 점이다. 너무 나간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한편 들면서 예의바른 독자로서 입꾹, 다만 막막하고 슬펐다고 까지만 써둔다.


1994년에 쓰인 점 감안하면 퍽 파격적인 퀴어 SF인 듯하다. 작가 지향 혹은 취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점도 재미 요소 되겠다. 이토 준지의 무시무시한 캐릭터 도미에라는 이름, 파올로 파솔리니의 비극적인 죽음을 그대로 차용한 점 등. 또한 서문에서 밝힌 바, 지다웨이 선생은 집필 기간 니노 로타, 우테 렘퍼, 반젤리스 음악을 들었다는데, 며칠 전 반젤리스 선생의 타계 소식도 있어서 공교롭다. 나 또한 좋아했던 작곡가이고 무엇보다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빈(앳킨슨) 선생이 건반을 맡았던 장면을 가장 잘 기억한다. 가까이 또 멀리 알던 사람들의 부고를 접하는 게 나이 드는 일의 주 업무인가 싶기도 하다. RIP.


“아저씨를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이 동네에서 제일 잘나가는 정원사를 만나면, 그게 바로 나를 만난 것과 같아. 내 몸 전부가 그 사람 안에 있을 테니까.” (125)


마라코트 심해 | 아서 코난 도일 | 이수현 옮김 | 행복한책읽기


‘수심 540미터의 심해를 탐사하던 마라코트 박사 일행은 바다가재를 닮은 거대한 생물 마락스의 공격을 받고 케이블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8113미터의 해저에 낙하한 일행은 8000년 전 화산작용으로 해저로 침몰한 후에도 살아남았던 아틀란티스의 후예들과 조우하는데...’(알라딘 책 소개) 도일 경의 SF는 곧잘 판타지로 흐른다. 심해 탐사에만 머물러도 재미 한 가득일 텐데, 마라코트 박사 일행은 해저의 거대 악을 해결하고 귀환하신다. 명확한 선악 구도, 숨겨왔던 권능, 예쁜 여인 구해 독신 면하기, 이 유치함 뭘까. 이제 도일 경 작품은 이별해도 될 나이? 옳다, 지천명.ㅜㅜ 적응이 안 돼.


“불운한 존재여. 너를 그 자리에서 날려 버릴 힘과 의지를 지닌 것은 내 쪽이야. 네놈은 너무 오랫동안 그 존재로 세상을 저주해 왔다. 네놈은 모든 아름답고 선한 것을 감염시키는 질병이었어. 네가 사라지면 인류의 심장은 한결 가벼워질 것이고, 태양은 더욱 밝게 빛날 것이다.” (148)


물고기 인간 | 알렉산드르 벨랴예프 | 김준수 옮김 | 마마미소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라플라타 강을 배경으로 갓난아기 때 상어 아가미 이식 수술을 받고 새 생명을 얻은 이흐티안드르(그리스어로 물고기 인간)라고 하는 젊은이의 삶과 아름다운 처녀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린 러시아 SF소설의 대표작’(알라딘 책 소개) 웰스의 모로 박사(1896년) 후예라 할 살바토르 박사의 생체실험실이다. 1928년 작. 물속과 실험실 장면뿐 아니라 법정드라마까지 펼쳐져 흥미롭다. 세월이 흘러 누군가는 연구를 계속하고 누군가는 새 삶을 시작하고 또 누군가는 정신줄 놓고 거리를 떠돈다. 등장인물들 각각의 마지막 모습을 언급해주는 방식이 훈훈하다.


작가 알렉산드르 벨랴예프(1884~1942)와 과학자 드미트리 벨랴예프(1917~1985) 간 친족관계는 알지 못한다. 후자는 ‘은여우 길들이기’로 유명한 소련의 유전학자다. 둘 사이 모종의 관계가 있다면 더 흥미진진했겠다. 왜? “동물의 몸, 더 나아가서는 사람의 신체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 인간이 손댈 필요가 있다고 저는 단언합니다.”(270) 같은 주제를 과학자-과학소설가 사이, 그것도 가족 모임 식사 자리에서 토론한다면 재미있을 듯 하잖아. 아무튼 바다 카테고리이므로 발췌는 이렇게.


“인간이 물속에서 살 수 있다면, 해양개발과 심해 해저의 개척은 아주 빠르게 진행될 것입니다. 그리 되면 바다는 더 이상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며, 바다의 자연재해로 인한 인명 희생 사고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바다에 빠져 죽은 자들을 우리가 애도하는 일도 없어질 것입니다.” (278)


잭과 천재들 2 | 빌 나이ㆍ그레고리 몬 | 남길영 옮김 | 와이즈만북스


1권 남극에 이어 2권은 하와이 니호아 섬 깊은 바다다. 해수 온도차를 이용한 에너지 발전 얘기가 나온다. 아탈리 선생 <바다의 시간>에서도 본 바 있는 바다의 숱한 잠재성 중 하나 되겠다. 발전소를 반대하는 세력이 있고, 마침 시설 일부가 훼손되는 사건도 일어난 참이라 우리의 잭 무리가 (당연히) 실상을 파악하고 해결한다. (스포 아니지?) 잠수정을 타고 심해로 내려가는 모험에 이어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일까지 겪게 된다. 손에 땀을 쥐진 않고, (맥주를 쥐고) 마음 푹 놓고 보는 우리 귀염이들 이야기. 섭섭하지 않게 또 만날 기회가 있어서, 3권은 정글이다.


그의 말은 옳았다. 별들은 아름다웠다. 행크 박사는 우리들이 수시로 아무 때나 “끝내준다, 대박” 같은 수식어를 쓰는 습관을 고쳐 주었다. 우리 중 누구라도 그 말을 사용할 때면, 움찔움찔하며 경고했다. 그렇지만 밤하늘의 별들은 그야말로 끝내주는… 어쨌든, 너무, 기절할 만큼 멋졌다. 사방에서 빛을 내고 있는 별들은 마치 수십억 개의 우주선들이 지구를 향해 돌며 헤드라이트를 비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젖히고 좌우로 움직이며 별을 쳐다봤다. 별빛이 가득한 까만 밤하늘은 그야말로 멋지고, 강렬했고, 무서웠고, 그리고 이상하게 추웠다. 행크 박사님은 인간과 같은 고등 생명체의 수가 이 우주에는 너무 터무니없이 적다고 늘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드넓은 밤하늘에 쏟아지는 수많은 별들을 보고 있노라니 내가 고등 생명체이기는커녕, 잘라 낸 발톱보다 작고 한없이 하찮은 존재로 느껴졌다. (300-301)



알라딘0516 압둘라자크 구르나 매거진 술이깰때까지자시오

티셔츠 계절이 돌아왔군요. 화산 청소하고 있는 어린왕자를 선택했습니다. 6500마일리지입니다. 실제 색깔은 사진보다 더 밝은 하늘색입니다. 너무 화사해서 신체랑 따로 놉니다. 까만 빨래랑 같이 한 번 돌려야겠어요.

작년과 재작년 노벨문학상 시즌에는 우리 출판계가 당황했을 듯합니다. 번역 작품이 없어서 말이죠. 2020년 루이즈 글릭 선생은 시인이어서 그랬는지 (시집은, 네, 잘 팔리지 않쥬) 그냥 쉭 넘어가더니 2021년 구르나 선생 작품은 문학동네가 대대적으로 번역 출간하네요. 평들을 기다리는 동안 <압둘라자크 구르나 매거진>이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줍니다. 200마일리지짜리 레어템 되겠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 (전체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일부와 김금희 작가의 <바닷가에서> 리뷰, 이석호, 왕은철 선생의 안내 글이 실렸습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구르나 선생은 (지금은 탄자니아인) 잔지바르 섬 출신이고 영국에서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작품을 쓰고 가르쳐왔습니다. 벌써, 뭔가, 멋지고 아프고 훌륭한 스토리텔링 기대하게 됩니다. 구르나 선생 웰컴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어린 시절을 보낸 도시의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사물이, 건물이, 사람이 겪은 수모를 보았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이가 빠진 사람들이 행여 과거의 기억을 잊을까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기억을 보존하고, 거기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쓰고, 사람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 순간들과 이야기들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지배자들이 자축하며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려 했던 폭력과 잔혹성을 써내야만 했습니다. (압둘라자크 구르나 매거진 03쪽,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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