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맨 Smoking

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창비
 

일단 웃음. 하하하하. 갑갑하고 숨 막히게 뒤틀려 있는 초중반부 디스토피아 분위기에 치를 떨며 이를 악물었던 탓에 (아야, 턱관절) 후반부의 사랑스러움은 선물 같다. 하하하하... 그러라고 이리도 빼곡한 500쪽이었던 거다. 페이지마다 빈틈없이 가득 찬 문장. 책에도 등장하는 월드클래스 무용가 부부의 볼륨 댄스 같은 문체랄까. 볼륨 댄스를 잘 알지는 못한다만 소재로 등장하는 볼륨 댄스라서 억지를 부려본다. 스텝을 밟았다가 되돌아가 다시 밟고 진행, 중복하는가 싶으면 변주, 진행. 머릿속에 흐르는 생각들을 손가락 타이핑이 어떻게 따라잡았나 싶을 정도로 입말이 줄줄 흘러넘친다. 번역이 퍽 수고스러웠으리라 짐작되는데, 잘 됐고, 술술 읽힌다. (띄어쓰기 잘못은 빈번하다.)


북아일랜드 어느 지역이 배경이다. ‘반대자’ 편, 즉 북아일랜드 독립파가 주류인 동네다. 길 건너에는 ‘국가 수호자’(조국 수호자 아니다) 세력이, 국경 너머에는 아일랜드가, 물 건너에는 영국이 있다. 정치·종교적으로 대립하는 두 무장 세력인 반대자와 수호자 간 테러와 암살이 난무하는 가운데 사회 분위기가 전체주의적이다. 누군가, 아마도 조직원일 텐데, 시시각각 감시하고 도촬한다. 진실보다는 소문과 평판이 더 사실이 된다. ‘정상’과 ‘비정상’이 그렇게 결정된다. 남들과 조금만 달라도, 특별하게 빛을 발해도, 정치·종교적으로 무관심하려 해도, ‘어떤 편에도 속하지 않는 법을’(169) 몰라 가만히 있으려 해도, 페미니스트여도, 남자가 요리를 하려고 해도, 여자가 걸어 다니면서 책을 읽어도 ‘상도에서 벗어난’ 사람 취급 받는다.


진상을 알아보려 노력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소문을 진실로 믿어버리는 확증편향에 기가 질린다. 당사자가 눈앞에서 사실을, 자기 생각을 얘기해도 듣는 이 머릿속에 자리 잡은 ‘사실’의 털끝도 건드리지도 못한다. 엄마도, 가장 오래된 친구도 그러하니, 입을 다물어버리는 수밖에. ‘친구는 아니라고, 이 일에 개인적으로 반응하면 안 된다고 대답했는데 친구가 개인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면 대체 무엇으로 와 있단 말인가?’(288) 며칠 전 내가 겪은 일과도 겹쳐 밑줄 그어놓았다. 다음은 내 얘기다. 친구와 만난 자리에서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그건 당신 생각이고.” 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287) 나는 그냥 미친 사람처럼 폭발하고 말았다.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하나마나한 말을 하는 사람을 나는 제일 싫어하는 것 같다. 그럼, 내가 당신과 만나서 내 생각 얘기하지 남 생각을 얘기해야 하나. 그러니까 당신 생각, 혹은 원한다면, 남 생각은 뭔데? 끝까지 듣지 못했고 “나 갈게.” 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반복하지 않은 말이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슬픔을 느꼈다. 내가 지금 가장 오래된 친구와 연을 끊고 물러나는 게 아니라 가장 오래된 친구가 이미 나에게서 멀어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애정이야 남아 있을지라도 믿음은 끝이 났고 그 남아 있는 애정이라는 것도 어쩌면-관계와 비슷한 것이었다. (287)


슬픔은 뭐, 분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이나 남이 아니라 나!는 그렇다. 다시 소설 얘기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무력감에 이대로 무너져 ‘미친 여자’가 되고, 이어 마녀사냥 당할 것인가. 생각지도 못한 탈출구를 애나 번스는 마련해 놓았다. 비록 ‘나’를 위한 반격은 아니었을지언정 시기적절한 사건과 응징이 일어난다. 옆 사람이 자기 과녁을 보고 쏘았는데 내 과녁에 꽂히는 일도 있는 법. 쏘는 사람이 내 과녁 쪽이 아니라 내 바로 옆에 있을 때라면 가능하지도 않겠는가. ‘나를 위해 한 일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내가 부차적 효과로 큰 혜택을’(440) 입었다. 나를 위한 일은 아니지만 내 편이 한 일임은 맞는 거다. 화장실 응징 장면은 어찌나 통쾌하던지. 화장실 하면 떠오르는 개자식 일화도 있으나, 생략한다. “그건 당신 생각이고.” 때문은 아니지만. 파란색 하나였던 하늘이 온갖 무지개 색 하늘로 변하고 길 이쪽저쪽을 넘나들며 아이들이 왈츠를 추고 부드러움이 제 역할을 하리라는 여운을 남긴다. 판타지가 아니라 유토피아가 아니라 리얼리즘으로. 볼륨 댄스 혹은 왈츠(또 억지다) 문체가 빛을 발하는 후반부다. 하하하하이기도 하고 흑흑흑흑이기도 한 <밀크맨>, 50주년 맨부커상 이름값 하는 발견이다. 물론 내! 생각이다.


내가 운동복으로 갈아입으려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길에 창문으로 내다보니 국제적 커플이 정말 대유행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사방에서 엎어지고 있었다. 구역 아이들이 전부 나와서 주름장식 스커트를 흔들며 놀고 있었는데 얼핏 보면 꼭 샹들리에에 금색 양단과 무늬 벽지로 장식을 한 것처럼 보였다. 밖으로 나가보니 거리에 그런 아이들이 가득했다. 리본, 실크, 벨벳, 하이힐, 빳빳한 페티코트를 걸친 아이들이 짝을 짓거나 아니면 혼자 짝이 있는 척 왈츠를 추면서 가끔씩 넘어졌다. (482-483)




11생선알라딘2 술이깰때까지자시오


커피가 재생지에 싸여 있어서 예쁘고 좋았어요. 양말적인 너무나 양말적인 니체의 하얀색 어찌 감당할지는 모르겠... 아무튼 생일은 오늘입니다. 주말생파는 망했지만 하하하하건배.


내가 그대를 잊으면 Smoking

내가 그대를 잊으면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시공사

 

단편은 현존하는 산문 중 가장 어려우면서 절제된 형태라고 생각해요. 꾸준하게 단편을 쓰면서 통제력과 기법을 훈련할 수 있었지요. (《작가란 무엇인가 3》, 065, 커포티)


10대 커포티다. 작가 사후 30여 년이 지나 발견된 초기 작품집으로, 첫 장편 《다른 목소리, 다른 방》 전까지 썼던 단편들인 셈이다. 《다른 목소리, 다른 방》의 기조가 곳곳에 스며있다. 14~17세 작가가 어쩜 이렇게 성숙하고 날카로울까. 소위 (미국) 남부 고딕 분위기와 냉정한 시선 안에서도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온기가 느껴진다. 춥고 더러운 가운데 피어난 (벨 랜킨 양의) 동백 같다. 《작가란 무엇인가 3》인터뷰에서 커포티가 언급한 바, 절제와 통제가 그야말로 최고다. 《다른 목소리, 다른 방》옆에 나란히 꽂아둘 보석, 내가 그대를 잊을 리는 없는 걸로.


모두가 얼마나 슬픈 일인지 모르겠다는 둥 운운했지만, 나는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야말로 벨 양을 비웃고 농담을 해댔던 사람들이었으니까.
뭐, 벨 랜킨 양은 확실히 기묘한 사람이었고 어쩌면 약간 정신이 나갔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추운 2월, 꽃을 뺨에 대고 그처럼 잠잠하고 고요히 누워 있던 그녀는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61, <벨 랜킨 양>)





모리스 Smoking

모리스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열린책들

 

그렇다. 그가 겪는 고통의 본질은 외로움이었다. 언제나 굼뜬 그는 그것을 깨닫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피붙이에 대한 질투, 굴욕감, 둔감했던 지난날에 대한 분노 따위는 사라질 것이었고, 수많은 상처를 남긴 뒤 결국 사라졌다. 클라이브에 대한 추억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외로움은 남았다. 모리스는 잠에서 깨어 숨을 헐떡이며 <이젠 아무도 없어!>라든가 <너무 끔찍한 세상이야!>라고 소리치곤 했다. (190)


영화 개봉 덕에 되살아난 책이다. 고마워라. 출간된 지는 48년 됐지만 포스터가 쓴 날로부터는 100년이 훌쩍 넘었다.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던 시절 공기를 청년 포스터도 마시며 살았던 셈이다. 작가 사후 출간의 이유다. 영화의 운명도 우리에게는 그와 좀 닮아서 제작된 지 32년 만에 한국 최초 개봉이란다. (속닥. 나는 프랑스에서 보았다. 헤헤.) 영화를 다시 볼 것 같진 않은데, 언제나처럼 원작이 멋져서다.


참고로 휴 그랜트는 모리스가 아니다. 원작으로는 모리스에 더 어울릴 것도 같은데 아무튼 휴 그랜트는 클라이브다. 청년 모리스는 클라이브로 인해 사랑에 눈 뜬다. 눈 떴더니 클라이브는 눈 감고 다른 데로 가버린다. 출세와 주류 사회로. 배신자. 그러나 모리스는 자기 지향과 사랑과 자유를 배신하지 않는다. ‘어둠을 향해서…… 가구들 틈에 사람을 가두어 두는 집 안의 어둠이 아니라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어둠!’(270) 그리고 커튼을 열어젖히고 창문 너머 외치는 ‘이리 와!’(270)가 있다.


‘단숨에’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집필 기간이 짧은 장편인 만큼 쭉쭉 진행한다. 세세한 대화를 낱낱이 들려주기 보다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식으로 처리하는 부분에서도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얼른 해버리고자 하는 마음이 읽힌다. 그에 따라 독자도 얼른, 성큼성큼 저 ‘혁명적인’(382, 작품평론) 이야기를 보게 된다. ‘장조의 화음’(383)이 과연 시대를 앞선 감이 있다. 작가 연보를 보면 조금은 슬퍼지겠으나, 그래서 더욱, 밝은 장조가 의미 있지 싶다. 탈고 105년, 출간 48년, 영화 제작 32년 뒤 당신과 내게까지도.


어느새 경기는 현실과 유사한 모양새를 띠었다. 모리스도 힘을 내기 시작했다. 정신이 맑아진 그는 ㅇㅇ과 자신이 온 세상에 맞서서 경기하고 있고, 보레니어스 목사와 들판에 선 선수들뿐 아니라 관람석의 관객들과 온 영국이 위켓 주변으로 조여들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서, 그들의 부서지기 쉬운 관계를 위해서 경기를 했다. 하나가 쓰러지면 다른 하나가 뒤를 따를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해칠 생각이 없었지만, 세상이 그들을 공격하는 한 그들은 세상을 난타해야 했고, 주의 깊게 기다리다가 온 힘을 다해 타격해야 했다. 그들 둘이 힘을 합하면 세상의 다수도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걸 보여 주어야 했다. (285)




11생선알라딘 술이깰때까지자시오

 

갈색 원주율 러그 예쁘지요? (함정) 실물보다 사진에서 더 예쁩니다. 피너츠 아크릴 달력은  크레마마 님 거치대로 쓸 수 있겠어요. 지지대 사이 충전 선이 지나갈 틈도 있답니다. 크레마마 님 충전 선 꽂는 데가 아래쪽 가운데라 일반 독서대로 볼 때 불편했거든요. 아크릴 앞판, 뒤판이 자석으로 착 붙는 형식이네요. 약해 보여 한 번 떨어뜨리면 끝날 듯; 조심할게요. 양말은 다윈 버전입니다. 양말의 기원.




모든 순간 + 시간은 NoSmoking

모든 순간의 물리학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현주 옮김, 이중원 감수/쌤앤파커스


140쪽 안에 ‘모든 순간’을 어떻게 담나 싶다만. 플랑크 단위부터 거시 규모까지를 다루는 물리학 개괄이라면 그리 틀린 제목도 아닌 듯하다. 친절하고 밀도 높은 수업 7강이다. 현대 물리학 즉, 아인슈타인부터 시작해 양자역학, 그리고 각각이 보는 우주와 물질의 구조, 이어서 둘의 통합 움직임까지 간략한 겉핥기다. 겉핥으면…… 갈증 난다. 과묵한 책의 장점이랄 수도 있어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다음 책으로 가본다.


블랙홀의 열은 세 가지 언어[양자, 중력, 열역학]로 쓰인 로제타스톤(Rosetta stone)입니다. 이 비석은 현재 누군가가 자신의 암호를 풀어 정말 시간의 흐름이 무엇인지 말해줄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12)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카를로 로벨리 지음, 이중원 옮김/쌤앤파커스

 

루트비히 볼츠만은 이것을 알아냈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기본적인 운동 법칙이나 심오한 자연의 문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무질서해져서 특수하거나 특별한 상황이 점점 사라지는 것에 있다. (39)


그러니까 엔트로피 말이다. 열역학 제2법칙. 증가하는 무질서도. ∆S≥0 우주와 사물과 당신과 나의 노화와 죽음까지도 설명하는 수식 되겠다. <모든 순간…>보다는 덜 과묵한 <시간은…>인 만큼 조금은 더 가까워진 물리학이다.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속도에 따라 달라지던 시간이고,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중력에 따라 달라지던 시간이, 양자역학에서는 플랑크 시간이 된다. 시간이 양자 효과를 나타내는 규모다. 그러니까 (양자역학에서처럼) 시간 역시 요동, 확률, 관측, 결정…… 아아. 그래,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으로 하자. 빛이 파동이자 입자임에 친숙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 중력도 시간도 그렇게 장(場)이자 입자인 것이다. 연속과 단절, 혹은 장과 입자, 또 혹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즉, 거시세계 설명과 미시세계 설명을 통합하려는 저자의 연구가 양자중력이론이란다.


대단하다. 나야 우주의 정답을 42로 알고 세상을 뜰 예정이긴 하지만, 정말 놀라운 세상 아니, 인간 아니, 물리학이다. 그건 그렇고, 딴지다. 중간에 저자의 개인사와 문학적 환기도 가끔 등장하는데, 194쪽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 끝없는 세상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초반부에서, 어린 마르셀이 매일 아침 알 수 없는 심연에서 거품처럼 의식이 떠오르는 어지러운 순간에 당황하여 재발견하는 세상이다. 나중에 마들렌의 맛이 그에게 콩브레 마을의 향기를 되살리게 했을 때 방대한 땅을 열어준 세상이다. 프로스트(Frost, 1874~1963)는 이 거대한 세상을 3천 장이나 되는 자신의 대작에 하나의 지도로 서서히 풀어놓았다. (193-194, 강조는 나)


<가지 않은 길>의 프로스트가 정말 프루스트(Proust, 1871~1922)를 연구했나? 하여 검색을 잠깐 해보았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아시는 분 있다면 알려주시길.) 잠정적인 내 생각으로는 194쪽 전체에 어김없이 ‘프로스트’라 표기된 이름은 모두 ‘프루스트’로 보아야할 듯하다. 영문이름과 생몰연도 병기까지 해 놓아 몇 번을 다시 읽었다만. 딴지 끝+엔트로피는 계속 증가 중.


우주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점진적으로 무질서해지는 과정이다. 마치 처음에는 정리되어 있던 카드 묶음을 섞으면 섞을수록 무질서해지는 것과 같다. 우주를 섞는 거대한 손은 따로 없고,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는 우주의 각 부분들 사이의 상호 작용 속에서 스스로 조금씩 섞일 뿐이다. (172)





왜 다윈이 + 왜 종교는 NoSmoking

왜 다윈이 중요한가 
마이클 셔머 지음, 류운 옮김/바다출판사

 

다윈이 왜 중요하냐면 진화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진화가 왜 중요하냐면 과학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 왜 중요하냐면, 과학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뛰어난 이야기, 곧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말해 주는 서사적 모험담이기 때문이다. (268-269, 에필로그)


질문이 제목이니 대답이 마지막 문장이다. 화끈하다. 반다윈주의 혹은 창조론 또 혹은 지적 설계론을 속 시원히 논박한다. 설로웨이 선생과 함께 했던 갈라파고스 여행기로부터 시작해 창조론 타파 논점들을 역설한 후에 윌슨 산 천문대와 에살렌 연구소 에피소드로 끝난다. 에살렌 연구소? 명상하고 목욕하고 마사지하고 영성이 어쩌고 하는 곳인가 본데, 약간 엉뚱한가 싶으면서도 잘 녹아들어간다. 특히 에살렌 바로 아래 해변에서 촬영했다는 <코스모스>와 엮어 금상첨화다. 세이건 만큼 ‘영적인 과학자’(264)도 없으니 말이다. 소위 시적 과학. 과학이 세상에서 아름다움이나 영성을 앗아가는 게 아니라 더해줌을 셔머 선생 역시 보여준다.


그에 비해 창조론은 어떤가. 따져보면 창조론은 문화 현상이지, 진화론의 상대로 링에 오를  선수가 아니다. 과학적 긍정 증거를 내놓지 못함으로써 반증의 여지가 아예 없다. ‘지질학, 고생물학, 동물학, 식물학, 비교해부학, 분자생물학, 집단유전학, 생물지리학, 발생학 등에서 독립적으로 수행된 탐구가 모두 동일한 결론, 곧 진화가 일어났다는 결론으로 수렴’(25)되는 것과 비교해보라. 또한 창조론에서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결점은 양자택일의 오류다. 진화론을 깎아내린다고 해서 창조론이 성립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신성에 대한 추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내가 보기에 과학이 담당할 기능으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나 주관적이기 때문이다.’(194)라고, 기독교 신자이자 생물학 교수인 리 앤채니 선생이 말했다. 더구나 진화론을 받아들이고도 얼마든지 신에 대한 믿음을 간직할 수 있다. 셔머 선생도 ‘다시 쓰는 창세기’를 종결 편으로 덧붙여놓았다. 조금은 짓궂을지 모르겠으나…… 아멘.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아담 시대 이전의 피조물에서 나온 중간 화석들의 이빨, 턱, 머리뼈, 골반을 풍부하게 땅에 놓아두셨다. 당신께서 특수창조하신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이름을 루시라 하셨다. 루시는 사람처럼 곧선 자세로 걸을 수는 있었으나 유인원처럼 뇌는 작았다. 그리고 이것이 너무 혼란스러움을 깨달으시고는, 이를 이해할 고인류학자들을 창조하셨다. (273, 종결, ‘다시 쓰는 창세기’ 중)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리처드 도킨스 외 지음, 존 브록만 엮음, 김명주 옮김/바다출판사


최근에 불고 있는 반과학 열풍의 원인이 무엇일까? 나는 어느 정도는 문화전쟁의 패자들(여자들을 부엌에 가두고, 흑인들을 버스 뒷자리로 몰고, 동성애자들을 벽장 속에 감추어두려 했던 사람들)이 그동안 느꼈던 분노, 두려움, 좌절, 모욕 같은 감정들이 낳은 결과라고 본다. 또한 늙는 것과 죽음을 둘러싼 인류 보편의 뿌리 깊은 공포도 한 가지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최근의 반과학 열풍이 이런 감정들만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책임은 이 감정들이 악의적으로 조작되기 쉽다는 데에 있는 듯하다. (41, 레너드 서스킨드, ‘반과학에 대처하는 과학자들의 자세’)


<신들을 위한 여름>(에드워드 J. 라슨, 글항아리, 2014)이나 영화 <신들의 법정Inherit the Wind>(스탠리 크레이머 감독, 1960)으로 유명한 스콥스 공판은 1925년 일이었다지만, 무려 2005년에도 미국에서는 도버 지역 학군 공판으로 떠들썩했다. 도버 교육청이 교실에서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 대신 지적 설계를 가르치기로 제안했다는 사건이다. 창조론도 진화하는 모양이다. 지적 설계론에 대한 16명 과학자들 반론을 존 브록만이 엮었다. 서스킨드 선생이 짐작한 이유에 무척 수긍이 가고, 더구나 저 열풍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은 그 바람과도 닿아 있는 게 아닐까 했다.


저들의 ‘놀라운 정신착란’(9, 판사가 했다는 말)을 그냥 무시할 만도 했겠으나, ‘과학자들은 일반대중에게 올바른 지식을 심어줄 기회를 마다하면 안 된다는 것’(10)이 브록만의 믿음이란다. 고마운 일이다. 덕분에 멋진 책으로 남게 된 건 고무적이다. 진화생물학자, 고생물학자, 인류학자, 심리학자, 인지과학자, 이론물리학자, 철학자 등의 다채로운 글발과 전공발이 펼쳐진다. 진수성찬인데, 엉뚱하게 감동은 부록에서 먹고 말았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임명한 공화당원 판사 조지 E. 존스 3세의 판결문이다.


지지자들의 주장, 법정에 제출된 문서에 적힌 설명, 6주간의 재판에서 이루어진 면밀한 조사를 토대로 지적 설계를 샅샅이 주의 깊게 검토한 결과, 우리는 지적 설계는 과학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따라서 지적 설계가 타당하고 입증된 과학이론이라는 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적 설계는 동료 검토를 거치는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지도, 연구와 검증을 하지도, 과학계의 승인을 받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319, 부록, ‘펜실베이니아 중부 미국 연방 지방법원 판결문 발췌’ 중)





무지개를 풀며 + 눈먼 시계공 NoSmoking

무지개를 풀며 
리처드 도킨스 지음, 최재천.김산하 옮김/바다출판사


빛을 프리즘(즉 과학)으로 풀어냈다고 해서 무지개(즉 자연)가 덜 아름다워지는 건 아니라는 도킨스 선생의 성토다. 나쁜 시적 과학이나 엉터리 우주관이 오히려 추하거나 위험하다는 취지. 가이아 같은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웅변이 과학적으로 옳지 않음이야 알고 있었지만 굴드의 ‘단속평형설’을 뜯어 비판해준 점은 퍽 고맙다. 다만, 초판은 오탈자가 수두룩해서 무지개 풀다가 깜짝 놀라는 효과가 있음.


확언하건대 나는 언제나 대멸종이 진화 역사의 단계적 과정에 매우 깊고 극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믿어 왔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대멸종은 다윈주의적 과정이 재출발하도록 터를 닦아 줄 뿐 다윈주의적 과정의 하나는 아니다. (299-300)


눈먼 시계공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용철 옮김/사이언스북스


시계 같은 복잡한 물건에는 반드시 그 제작자가 있을진대, 하물며 더 복잡한 생물에야 어찌 설계자가 없을쏘냐, 라고 창조설을 폈던 19세기 신학자 페일리의 논문에서 시니컬하게 따온 제목 되겠다. 설계자 당연히 있다. 자연선택이다. 지금부터 160년 전, 그러니까 페일리의 해당 논문이 나온 지 50여 년 뒤 다윈과 월리스가 내놓은 이론 말이다. 진화의 역사로 보자면 눈 깜빡할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최첨단 이론을 역설하는 도킨스 선생이다. 그 시간 동안 절대 눈 깜빡하지 않은 이가 많아 답답해했던 심정이 잘 담겼다.


여전히 반가운 이름, 굴드 또한 여러 번 언급된다. 소위 단속평형설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점진적인 진화론과 다르지 않다는 점. 내 생각에, 미국의 개신교적인 분위기가 굴드(나아가 진화론)를 좀 회절시킨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생명의 ‘갑작스러운 폭발’이나 불연속적인 대격변 같은 표현은, 문학적으로 장식(굴드의 재주)될 때 도약, 의지, 설계 따위와 나란히 놓이기 딱 좋음이다. 이외에도 박쥐 소나sonar의 자세한 설명과, 케언스스미스가 주장했다는 규소 기반 생물설 소개를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SF가 좋아할 소재이기도 하잖아. 500쪽이 넘는다. 취향에 따라 재미는 곳곳에서 발견할 명저다.


누적적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이야말로 우리가 아는 한, 조직화된 복잡성의 존재를 원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인 것이다. (514)





올빼미와 부엉이 NoSmoking

올빼미와 부엉이 - 10점
맷 슈얼 지음, 최은영 옮김, 박진영 감수/클

 

성난 얼굴, 수줍은 듯한 걸음걸이, 지갑을 찾으려는 듯이 낮게 맴도는 비행, 어마어마한 숙취로 번져버린 마스카라…… ㅇㅇㅇㅇ가 이렇게 밤을 지새우고 나면 햇살 좋은 한낮이 된다. ㅇㅇㅇㅇ를 방해하지 말라, 말도 걸지 말라.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다시 잠자리에 들도록 내버려두라. ㅇㅇㅇㅇ에겐 잠이 필요하다. (29/131)

 

왜 뜨끔하지? 술회동이 끝난 어느 날의 내 모습을 맷 슈얼 님이 봤을 리 없잖아. 그러니까, 저건 내가 아니라 ㅇㅇㅇㅇ(쇠부엉이). 요래 그려놓았다.


‘부엉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니 귀깃이 있긴 할 텐데 아주 작은가 보다. 아니나 다를까 영어 이름으로도 Short-Eared Owl이다. 백과사전에서라면 ‘한국에서 겨울새로 관찰되며 천연기념물 제324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다음백과)라는 부연설명을 볼 수 있을 터. 이 책은 그런 딱딱한 설명과는 관계가 없다. 귀엽고 재치 넘치는 몇 줄 해설이, 사랑스러운 일러스트레이션과 함께한다. 야행성 맹금류가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건가. 안 될 건 또 뭐람, 이라고 답하듯 저자의 애정이 듬뿍 담겼다. 그림들마다 쳐다보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러고 보니 <비밀의 정원> 내 부엉이도 그립구나.


애써 찾아 데려온 사진인데 뭔가 후지고 근본없... 미안. <올빼미와 부엉이> 목록과 비교대조해본 결과, 무성한 숲에 있는 너는 자메이카부엉이 혹은 긴눈썹꼬마올빼미인 듯하다. 안녕? 이름 얘기가 나온 김에 표지모델들도 이름으로 불러보자. 기억에 있을 때.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애기금눈올빼미, 흰가면올빼미, 분홍눈썹수리부엉이, 빗장무늬올빼미. 쓰다듬고 싶은 표지이나 전자책이라 그럴 수가 없군. 무해하고 사랑스러운 책. ‘책선물무례설’(내가 신도다) 예외라고 해도 좋겠다. <펭귄과 바닷새들>은 종이책으로 봐야겠다. <올빼미와 부엉이> 속 내 최애캐를 소개한다. 두둥+끝.

검은가면올빼미Tyto tenebricosa : 흰가면올빼미와 정반대인 올빼미. (…) 하지만 어쨌든 검은가면올빼미는 위험하지 않다. 작은 설치류나 곤충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지만. 검은가면올빼미는 남쪽 하늘에서 빛나는 별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는 흰 반점이 수놓인 칠흑 같은 마법사의 망토를 걸친 채 동남부오스트레일리아의 유칼립투스 숲을 조심스레 지나간다. (39/131)



루거 총을 든 위즈덤하우스 술이깰때까지자시오

 

<루거 총을 든 할머니> 리뷰대회 상품이랍니다. 퍼플박스 안에 뭐가 들었는가..



 

까만 잔은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림자 없는 남자> 머그컵인가 봅니다. 예뻐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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