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마에게 바치는 청소지침서 Smoking

살인마에게 바치는 청소지침서 | 쿤룬 | 진실희 옮김 | 한스미디어


살인마에게 청소지침을 바치는 이는 누구인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그러니까 죽으면서 남기는 지침인가 죽이면서 내리는 지침인가. 후자다. 그렇다면 살인마가 피해자라는 얘기인데…… 그렇다. 응징 살인. 스무 살 남짓 청년 스녠이 청소지침을 내리는 주인공이고 결벽증을 가졌다. 몹시 괴로운 과거도 가졌다. 끔찍한 기억 중 일부는 지워지기도 했다. 스녠이 응징하는 이들은 잭 더 리퍼를 추앙하는 살인마 집단이다. 다크웹에 스너프 필름을 전시하는 이들이다. 응징 살인 이어지고, 기억 되찾고, 정의는 실현…… 될까?


발랄한 표지와 제목 믿고 열었다가 큰 코, 아니 작은 돼지코 다쳤다. 가벼운 터치로 그리는 살인 장면이 가차 없다. 썰고 베고 피 뚝뚝은 예사다. 청소지침 내릴법한데다, 단 몇 줄 만에 싹 청소되는 모습은 으아…… 소설이니까. 가벼운 듯싶으나 무겁다. 유치한가 싶다가도 슬퍼진다. ‘블랙코미디’(찬호께이 추천사)라는 것의 뒷맛이겠다. 황당무계하다고 치부할 수 없는 게, 다크웹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 사건이 최근에 있기도 해서다. 그런 면에선 ‘소설이니까’라고 못하겠는 거. 누군가에게 기꺼이 추천하기가 꺼려지나 (응? 왜지? 몰라, 찔려) <선생님이 알아서는 안 되는 학교폭력 일기>가 출간된다면 찾아 볼 성싶다. 후속작 떡밥이 아주 확실하게 뿌려졌거든. 한 군데 밑줄 쳤다.


얼빠진 샤오쥔은 넋을 놓고 스녠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놀라운 속도와 효과에 혀를 내두르며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저 녀석, 혹시 미래에서 온 청소 로봇인가……?’ (266)




백자평과 밑줄: 한순간에, 타 버린 비밀, 파란 눈, 하트 잭 Smoking

한순간에 | 수잰 레드펀 |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이기심을 드러내는 극한 상황 설정은 좋았지만(5별)+간호사 장면은 정말 뭥미했음(1별)+울컥울컥하다가도(4별)+로맨스에 간지러워져. 남은 등장인물들에게 짝을 지어주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걸까(2별) =3별


사람은 자신의 삶이 한순간에 강탈당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살아간다. (238-239)


타 버린 비밀 | 슈테판 츠바이크 | 김선형 옮김 | 세창미디어


비밀은 타버리고 아이는 성장한다. 소품이지만 과연 큐브릭이 탐낼만한 심리 소설.


그는 삶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어른들이 아이를 속이기 위해 마치 범죄자처럼 몰래 도망가는, 그런 행동까지 마다 않게 하는 그 끔찍한 비밀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그들은 그 많은 거짓말로 무엇을 감추려고 하는가. 그는 머리를 싸매고 생각했다. 이 비밀은 어린아이가 풀어야 할 자물쇠이고, 자라서 성인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복해야 하는 것임을 그는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103-104)


파란 눈 검은 머리 | 마르그리트 뒤라스 | 김현준 옮김 | 문학동네


텅 빈 무대, 두 사람이, 없는 사람을(사랑을) 주절대기. 뒤라스의 사막(99)에 오지 않는 고도는 아마도 사랑인가 보다. 또는 영화 <her> 속 사만다의 현실태(?)와는 사랑할 수 없는 그런 것이거나.


그녀가 말한다, 사람들은 지금 그들이 사는 모양새로 살게 될 거라고, 사막에 내버려진 육체를 가지고 그와 함께, 마음속에는, 단 한 번의 키스와, 단 한 마디 말과, 단 한 조각 시선을 하나의 오롯한 사랑을 떠안는 기억으로 품고서. (99)


하트 잭 | 퍼트리샤 콘웰 |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


이번엔 연쇄 커플 살인사건이다. 실제 사건을 소재로 했다니 더 흥미진진. 전편 친구 애비 기자가 등장해 반가웠는데...


“오른손 뼈 열한 개, 왼손 뼈에 열일곱 개 소실.”

“전체가 몇 개요?”

마리노가 얼른 받아 적으며 물었다. 나는 검시를 계속하며 대답했다.

“손은 스물일곱 개의 뼈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손의 움직임이 엄청나게 정교한 거예요. 그림도 그리고, 바이올린도 켜고, 서로 만지며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도 모두 손뼈 덕분이죠.”

자신을 방어하는 것 또한 손 덕분에 가능하다. (118)




최고들의 이상한, 과학자들 2, 촛불의 과학 NoSmoking

최고들의 이상한 과학책 | 신규진 | 생각의길


과학자들 28명의 인생과 업적을 간략하게 다룬다. 간략한데 감동적이다. ‘최고’들의 일대기를 추리기가 어려웠을 터에, 최고를 꼽는 것 자체가 까다로운 선택이었으리라. 예컨대 프리츠 하버(1868~1934) 같은, 글감으로 ‘섹시’하지만 정치적으로 나쁜 과학자를 각주로 처리(141)해버린 점이라든지, 산소 발견 우선권에서 애매한 위치를 점한데다 요절한 까닭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칼 빌헬름 셸레(1742~1786)를 28명에 넣는다든지 한 점은 독자로서 믿음직하고 고마운 선택이 됐다.  


가끔 등장하는 원리와 수학식까지도 고맙게 읽힌다. 내 경우 가장 와 닿고 인상적인 수학식은 리제 마이트너 꼭지에서 등장한다. 아인슈타인의 E=mc2 는 다 알잖은가. 이걸 이용해 우라늄 원자 한 개가 분열하면서 발생하는 에너지 계산을 해 낸 거다. 저 공식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이는지를 세상에, 처음 본 것 같다. 그래서 그 에너지가 얼마? 약 2억 전자볼트란다(143). 하여,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나 핵폭탄의 어머니로 불려버린 리제 마이트너다. 멋진 과학자 마이트너에 관해서는 다른 책을 더 구해 놓았으니 다음 기회에.


왜냐. 이어 놓을 과학자가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이기 때문이다. 정식 교육 과정을 밟지 않은 ‘흙수저’로서 직업전선(제본소)에서 책으로 배우고 몸소 실험을 거듭해 전자기 영역에서 엄청난 업적을 남긴 과학자 말이다. 외르스테드(1777~1851)가 ‘우연히,’ 전류가 자기장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게 공표되자 패러데이는 그렇다면 자기장도 전류를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발상의 전환, 상상력, 실험, 성공.


그러나 다른 과학자들은 역선(力線) 개념을 쉽사리 수용하지 않았다. 전기력이 두 개의 점 사이에 순간적으로 원격 작용하는 힘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식인의 언어인 라틴어도, 과학의 언어인 수학*도 배우지 못한 자가 제시한 이론이어서 학자들의 거부감이 더 심했다고 과학사는 전하고 있다. (53)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이 발표된 그해에 태어난 맥스웰이 훗날 그의 이론을 아름다운 수학 방정식으로 만들게 된다. (주)


패러데이와 얼굴들: 『과학자들 2』118쪽+『최고들의 이상한 과학책』46쪽+『촛불의 과학』뒤표지


과학자들 2 | 김재훈 | Humanist


<과학자들 3>을 먼저 봤지 싶은데, 2권 역시 삼위일체(간결+유머+지식) 양서다. 키득키득하면서 교양인이 될 수도 있는 바람직한 책. 패러데이 편은 무려 두 챕터를 할애했다. 얼핏 과학사에서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도 있겠다 싶은 배분으로, 2권에서 패러데이와 아인슈타인, 1권에서 갈릴레이와 뉴턴이 (김재훈 작가로부터) 차지한 영예다. 패러데이 편 키득키득 지점을 밝히자면, ‘잘생겨도 너무 잘생긴 화학자’(113) 험프리 데이비 경(1778~1829)의 포즈 되겠다. 시종 존잘각도45도왼쪽프로필 컷으로 등장한다. 깔깔. 데이비는 패러데이를 실험실 조수로 고용했고 이후 왕립학회 회장이 되는 이다. “내가 과학자로서 이룬 것들 중 하나를 꼽으라면, 그건 바로 패러데이를 발견한 것이다.” (139, 데이비 경 대사)


1820년 외르스테드의 전기장 자기장 관련성 발견 이후 (그리고 나중에 맥스웰이 방정식으로 아름답게 정리해주기를 기다리며) 전자기학은 당시 소위 핫한 과학계 연구 영역이었던 모양이다. 앙드레 마리 앙페르, 하인리히 렌츠도 동시대 과학자로 곁다리 등장하신다. 패러데이의 전동기와 전자기유도실험이 소개된다. 업적도 업적이지만 패러데이의 소박 지향 과학커뮤니케이터 성품이 멋지다. 왕립학회 의장 자리 거절, 기사 작위 거절, 대부분의 출판도 거부했고 유일하게 펴낸 책이 아래에 나온다. 자신이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잊지 않고 베풀 줄 알았던 패러데이다.


평생 호사를 누리지 않는 평범한 과학자로 남기를 바랐던 패러데이가 정성을 다했던 일은 서민들과 아이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시즌 무료 강연이었습니다. 1860년 그의 생애 마지막 강연은 1861년 《양초 한 자루의 화학사》라는 책으로 발간되어 과학을 꿈꾸는 어린이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어주었습니다. (140)


『최고들의 이상한 과학책』55쪽+『과학자들 2』140쪽


촛불의 과학 | 마이클 패러데이 | 문병렬ㆍ신병식 옮김 | 범우사


‘양초 한 자루의 화학사’(『과학자들 2』) 혹은 ‘양초의 화학적 역사’(『최고들의 이상한 과학책』) 또 혹은 ‘촛불의 과학’ 『The Chemical History of a Candle』(1861)이다. 70세 패러데이가 실험을 시연하며 강연한다. 소박한 그림도 몇 개가 같이 실렸다. 실험 조교를 (번역을 그렇게 했겠지만) ‘앤더슨 군’이라 부르며 정다운 말투로 강의하는 모습이다. 1826년 패러데이가 시작하여 계속 열린 왕립연구소 크리스마스 행사이고 이 기록이 아마 패러데이로서는 마지막 강연이었던 듯싶다. 크리스마스 강연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초의 연소 원리, 공기의 구성과 압력, 산소·수소·이산화 탄소·질소의 특성과 역할, 물의 전기분해 등을 선보인다. 패러데이의 ‘온화함’이 전해져 마음이 따뜻해진다. ‘패러데이의 삶은 세상을 밝히는 온화한 조명처럼 느껴진다. 대장장이 아들, 씩씩한 신문배달부, 실로 꿰맨 공책, 배움에의 열망, 불 켜진 공부방….’(『최고들의 이상한 과학책』, 55) 번역 초판이 1990년, 내 손에 온 건 2019년 개정판이다. 어이없는 오탈자가 많다. 안타깝다. 작고 사랑스러운 책인데. 흑+끝.


강연을 끝맺으면서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초가 탈 때 주위 환경과 조화롭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듯이, 여러분도 성장해가면서 주위 환경과 잘 어울려 살 수 있는 인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촛불이 주위를 밝게 비추듯이 여러분도 주위 사람들에게 빛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즉 여러분은 함께 살고 있는 인류에 대한 의무를 다함으로써 촛불의 아름다움을 승화시켜주시기 바랍니다. (169)




백자평과 밑줄: 사랑광기죽음, 카메라, 소설가, 성자, 역사의끝 Smoking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 오라시오 키로가 |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제목이 선방했다. ‘사랑-죽음’이라는 진부한 조합 사이에 광기가 들어가니 병적으로 어두워진다. 내용도 그러한가? 글쎄. 사랑이 있고 광기가 있고 죽음이 있기는 하다. 사랑은 싫고 광기는 가끔 무섭고 죽음은 별 감흥이 없다. 이를 어쩌지. 기예르모 델 토로의 극찬을 어째. (로 시작하는 리뷰를 알라딘에 썼다.)


올해 3월 20일, 산타페 차코 지방의 어느 마을 사람들은 아내를 엽총으로 쏜 다음, 자기 앞을 지나가던 인부까지 쏴 죽인 미친 남자를 추적하고 있었다. 짐승 같은 자를 잡으려 무장하고 숲으로 들어간 마을 사람들은 마침내 나무 위에 숨어 있던 그를 찾아냈다. 그는 여전히 엽총을 든 채, 섬뜩하게 울부짖었다. 아무래도 한 방에 쏴 죽여야 할 듯했다. (305, <광견병에 걸린 개>)


카메라를 보세요 | 커트 보니것 |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아고 따뜻해라. 미발표 초기작들이라니 본인이 원했을지는 알 수 없는 출판이지만 14편 모두 무척 애틋하고 사랑스럽다.


글쓰기에 대한 커트의 야심의 고백에 가장 가까웠던 것은 자신의 소설 창작 규칙 중 하나를 내게 읊어주었을 때였다. “전혀 모르는 사람의 시간을 사용하되 그 사람이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만들 것.” (12, 서문, 시드니 오핏)


소설가의 죽음 | 퍼트리샤 콘웰 | 홍성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소설가 죽고, (전편처럼) 살인 이어지고, 스카페타 선생 여전히 고생 많으신 가운데 과거 ‘흑역사’도 조금 드러나 인간미 뿜뿜. 그나저나 시리즈 이어지면서 마리노가 점점 호감형으로 바뀔 듯한 예감이 드네요? (그새 정들었나...)


나는 악몽에 시달렸다.

에스리지가 담뱃불로 조끼에 구멍을 내고 있었다. 필딩이 검시하고 있던 시체가 갑자기 커다란 쿠션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시체의 동맥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리노는 가파른 언덕 위에서 스프링이 달린 죽마(竹馬)를 타고 있었다. 나는 그가 곧 떨어지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283)


지복의 성자 | 아룬다티 로이 |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아아 멋져.


어제 내 파키스탄인 친구가 이걸 보내줬는데, 휴대전화를 통해 돌고 있는 내용이라 독자들도 이미 보았을지 모르겠다.

나는 다리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는 남자를 보았다.

“그러지 마세요!” 내가 말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가 말했다.

“신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신을 믿으십니까?” 내가 말했다.

“예.” 그가 말했다.

“당신은 이슬람교인입니까, 비이슬람교인입니까?” 내가 물었다.

“이슬람교인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시아파인가요 수니파인가요?” 내가 물었다.

“수니파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나도요! 데오반드인가요, 바렐비인가요?” 내가 물었다.

“바렐비요.” 그가 대답했다.

“나도요! 탄지흐인가요, 타프키르인가요?” 내가 물었다.

“탄지흐예요.” 그가 대답했다.

“나도요! 탄지흐 아즈마트인가요, 탄지흐 파라트인가요?” 내가 물었다.

“탄지흐 파라트요.” 그가 대답했다.

“나도요! 탄지흐 파라트 자미아 울 울룸 아지메르인가요, 탄지흐 파라트 자미아 울 누르 메와트인가요?” 내가 물었다.

“탄지흐 파라트 자미아 울 누르 메와트예요.” 그가 대답했다.

“죽어라, 카피르*!”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를 다리에서 밀었다.

다행히도 그들 중엔 아직 유머 감각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다. (225-226)


역사의 끝까지 | 루이스 세풀베다 |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짧은 책에 긴 역사. 마지막 장편소설 고맙게 읽었습니다. RIP. (이하 스포) 반인민 반인륜 범죄자를 겨냥한(말 그대로 AK-47의 가늠쇠 구멍 안에 넣은) 것만으로 위안을 삼아야 하겠다. 역사적 처단과 복수는 죽음보다는 기억일 터.


「거기서 평생 고통 받으며 살도록 내버려 두세요. 앞으로 천년 동안 갇혀 살도록 말이죠.」 (286, 에필로그)



2020년의 책 술이깰때까지자시오

뽑아 봅니다. 방구석 안읽쌓탑에 후보들은 즐비한데 미처 펴보지 못해 아쉽고 미안합니다. 시간은 빠르고 팬데믹은 우울하고 퍼즐은 재밌어서 그랬습니다. 어찌어찌 훅 지나간 2020년 출간+완독한 책 중 완소 10권을 추렸습니다.


1. 올해의 죽음

적대적 상황에서의 생존 메커니즘 | 올리비아 로젠탈 | 한국화 옮김 | 알마 | 2020년 1월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서바이벌 가이드 아닙니다. 소설입니다. 아 참, 소설 같지 않은 텍스트도 중간 중간에 끼어듭니다. 이게 뭐지? 하는 사이 리듬에 올라타고 있었습니다. 가끔 등장하는 긴 호흡의 문장이 무척 멋지거든요. 이야기 혹은 꿈, 또 혹은 기억 그도 아니면 분위기 다섯 개가 연작을 이룹니다. 올해 가장 독특한 작품으로 기억합니다. 올 여름 어떤 한 죽음 무렵 읽었던 책이라 더 각인됐지 싶습니다.


2. 올해의 테러

인형의 주인 | 조이스 캐롤 오츠 |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8월

재밌습니다. 무섭습니다. 오, 빅마마...


3. 올해의 모로코

탄제린 | 크리스틴 맹건 |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9월

위의 오츠 선생 추천사가 달린 책입니다. 믿고 봐도 좋겠다 싶었지요. 믿고 봐도 좋았습니다. 오츠 선생 문장에 덧붙여 써봅니다. 하이스미스의 씁쓸함, 길리언 플린의 의심스러운 화자, 가스등이펙트의 미묘한 권력 행사가 한 권에 다 들었습니다. ‘탕헤르의 나른한 공기와 태양’이라고 하면 이 또한 편견일까요. 조심스럽습니다(가보고 싶습니다). 아무튼 현기증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4. 올해의 여행

카뮈 | 최수철 | 아르테 | 2020년 1월

가보고 싶다고 쓴 김에 알제리와 프랑스를 이어 놓습니다. 작가과 장소와 작품이 균형감 있게 녹아든 카뮈 해설서입니다. 제 생각에 <결혼 여름>을 읽은 독자라면 향수와 더불어 더욱 와 닿을 듯합니다. 가보지도 못한 장소가 그리울 수 있는 건 정말이지, 문학이 하는 일일 겁니다. 고퀄 사진도 덤입니다.


5. 올해의 비행기

플레인 센스 | 김동현 | 웨일북 | 2020년 6월

비행 중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을 간단히 다뤘겠지 하는 기대로 열어 봤습니다만 큰 감동을 먹고 덮었습니다. 이렇게까지 많은 내용이 들었을지 몰랐습니다. 보관함에 있던 다른 비행기책들(네, 관심 분야였습니다)을 삭제했습니다. 이 한 권이 제게는 역할을 거의 다 했거든요. 하이재킹이나 테러, 밀항 에피소드 뿐 아니라 비행기 구조와 각 부분의 역할, 유명 제작사들의 기종 등을, 질 좋은 시각 자료 첨부해 잘 설명해줍니다. 특히 좋았던 건 보잉과 에어버스의 연혁 소개 부분이었습니다. ‘강인함과 섬세함의 경쟁’이라는 소제목 아래 보잉과 베테유의 철학을 각각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비행 중 내 위치를 알기 위한 노력, 경도 측정 관련 시계 발명 일화는 사이먼 윈체스터 <완벽주의자들>에서 본 내용이기도 해서 반가웠습니다. 저 유명한 존 해리슨 시계 말이죠. <완벽주의자들>은 롤스로이스 엔진과 관련해서도 함께 볼 수 있는 책 되겠습니다. 이 외에도 유명 비행사들, 위성항법, 콜사인, 웨이포인트, 시뮬레이터 등등, 두껍지도 않은 책에 정보가 빼곡하고 뛰어납니다. 기장이 썼습니다. 공학자나 역사가가 쓴 ‘비행서’라면 아마도 이렇게 꾸리지 못했을 겁니다. 항공 기술과 역사가 없지 않으면서도 실제 경험과 배움으로 엮은 내용이 다채롭습니다. 따로 독후감을 쓰지 못해 못내 아쉬울 정도로 고맙게 읽었습니다. 너무 좋아서 한 권 더 사고 싶었습니다. (응?)


6. 올해의 주기율표

주기율표를 읽는 시간 | 김병민 | 장홍제 감수 | 동아시아 | 2020년 4월

역시 독후감을 남기지 못했네요.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와 묶어 포스팅해야지, 하고 있다가 게으름에 지고 말았습니다. 빼곡하게 붙은 포스트잇 문장들을 어떻게 옮겨 놓아야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도 같습니다. 다만 이렇게 백자평을 쓰기는 했네요. ‘이제 주기율표가 그냥 네모 칸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웨스트민스터 궁전으로 보입니다?) 사물을 이룬 원소들의 개성표, 아름다운 예술작품 같습니다. 친절한 설명 덕분입니다. 책 만듦새도 으뜸입니다. 올해의 책으로 꼽습니다.’


7. 올해의 소설

엄마의 반란 | 메리 윌킨스 프리먼 | 이리나 옮김 | 책읽는고양이 |2020년 10월

작은 책에 단편 4개가 묶였습니다. ‘나이 든 여성들, 꼿꼿함, 배려, 부드러움’이라고 메모를 남겼네요. 참 좋았습니다. <세계 호러 걸작선 2>와 <고양이를 읽는 시간>에도 프리먼 선생 작품이 한 편씩 실렸으니 찾아봐도 되겠습니다. 책읽는고양이 출판사의 얼리퍼플오키드 시리즈 3권을 다 보았는데 하나같이 훌륭합니다. 모두 짧아 아쉬울 정도로 말이죠. 시리즈 순서대로 이렇습니다. 케이트 쇼팽, 이디스 워튼, 그리고 메리 윌킨스 프리먼. 지금까지는 프리먼 선생이 가장 큰 발견이었습니다.


8. 올해의 스릴러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 올가 토카르추크 |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가장 나중 나온 번역본 토카르추크를 가장 먼저 만나보았습니다. 듣기로는 토카르추크 작품군에서 ‘튀는’ 소설이라지만 뭐 어떻습니까. 무려 스릴러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더구나 이 책에서는 윌리엄 블레이크도 재발견하게 됩니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라는 제목 출처이기도 한, 영국 시인 화가 판화가 말이에요. <천국과 지옥의 결혼>이 보관함에 들어갔습니다. 걸출한 캐릭터 두셰이코 선생을 만나 첫 인상 좋게 (꽤 까다롭다는) 토카르추크 님께 다가갑니다.


9. 올해의 명왕성

뉴호라이즌스, 새로운 지평을 향한 여정 | 앨런 스턴, 데이비드 그린스푼 | 김승욱 옮김 | 황정아 해제 | 푸른숲 | 2020년 10월

행성 지위를 잃어 더욱 애틋해진 하트 소행성 플라이바이 기록입니다. 뉴호라이즌스호를 쏘아 올리기 위해 벌인 경쟁과 정치를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자와 공학자 들의 훌륭함을 봅니다. 논픽션이 전하는 감동이 큽니다. 사진 자료도 멋져서 계속 간직하고 싶은 책입니다. 물론 누군가 옆에서 침 흘리며 쳐다본다면 슥 뽑아 주고 말겠지만요.


10. 올해의 아룬다티 로이

지복의 성자 | 아룬다티 로이 |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그렇습니다. 제 완소 작가인 만큼 장르가 아룬다티 로이입니다. 소설가로서는 과작(寡作) 작가여서 더욱, <지복의 성자> 출간은 2020년의 큰 사건이었습니다. 여름에 읽었는데 미루다가 독후감을 쓰지 못했네요. ‘복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구자라트 학살, 이슬람 사원 파괴, 언론-관료 간 유착, 카슈미르 저항 운동, 숲 마오주의자들에 대한 폭력, 철 조각품 얘기(정부와 기업의 광물 착취)’ 등의 메모가 남아 있습니다. ‘아아, 멋져’로 시작하는 제 독후감 한글파일에는 사진만 있네요. (왜 이럴까요) 지금은 <자본주의: 유령 이야기>까지 획득하였습니다. 언젠가 아룬다티 로이를 모두 다시 일별할 때 <지복의 성자>도 한 번 더 읽어볼 예정입니다. 멋진 지식인 활동가 저자 로이 선생입니다.



알라딘 기록에 의하면 2020년에 308권을 샀습니다. 어제 마지막 주문을 했으니 312권 되겠네요. 작년보다 많이 줄어 뿌듯합니다만 읽은 책도 그만큼 줄었다는 함정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많이 읽고 쓸수록 사는 권수도 많아지는 모양입니다. 올해는 읽다 만 책도 꽤 있고 독서 기록도 게으르게 썼습니다. 첫 책 에드워드 불워 리튼 <폼페이 최후의 날>부터 마지막 책 루이스 세풀베다 <역사의 끝까지>까지 채 120권을 못 읽었습니다. 어처구니없어서 284권! 읽으신 이웃님 서재에서 그저 웃고 나왔네요. 200권 읽자고 작년 기록에서 말했는데. 망했지요? 2021년 독서 계획은 그래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아무려나, 곧 구랍이 될 오늘입니다. 해피 뉴 이어!




P. S.


2020년 마지막 지름이 도착했습니다. 한밤 칵테일 마시려고 디카페인 콜드브루를 샀습니다. 지금 마시고 있고요. 2년에 걸쳐 마실 요량입니다. <한순간에> 랜덤 장갑으로는 베이지색을 받고 싶었는데 브라운이 왔어요. 요것도 예쁘네요. 껴보니 톡톡하고 귀여운 촉감입니다. 손에 아주 밀착! (작은 건가?) 양말은 까만 스마일로 선택했습니다. 새해 첫 책으로 <새해>도 좋겠으나, 무계획이 계획이므로 아무 말 않겠... 아듀 2020.



뉴호라이즌스, 새로운 지평을 향한 여정 NoSmoking

뉴호라이즌스, 새로운 지평을 향한 여정 | 앨런 스턴ㆍ데이비드 그린스푼 | 김승욱 옮김 | 황정아 해제 | 푸른숲


1989년. 제안서 제출

2001년. 승인

2006년. 발사

2007년. 목성 플라이바이

2015년. 명왕성 플라이바이

2019년. 카이퍼대 MU69 플라이바이

~현재. 계속 날아가고 있음


뉴호라이즌스 간단 이력이다. 저 행간들에 숨어 있는 이야기, 명왕성 근접비행까지 26년간의 우여곡절이 담겼다. 우주선 설계, 발사, 경쟁, 정치, 협동, 탐사 장비, 내용, 결과 그리고 사람 등이 그려진다. 뭐 이런 훌륭한 사람들이 다 있담. 이들의 열망에 응답이라도 하는 양, 명왕성은 하트를 뿅뿅(명실공히 포토제닉 소행성)+안개를 뿜뿜(표지의 역광 컷)거리고 있었으니... 비전공자 독자들이 읽기 좋을 수준으로 조절한 스토리텔링과 고퀄 사진이 일품이다. 논픽션이 전하는 감동에 두어 번 울컥했다.


1930년에 이십대의 클라이드 톰보가 발견한 이래 명왕성은 쭉 연구와 동경의 대상이었다. 태양계 가장 끝에 있는 행성이라는 점에 더해 뉴호라이즌스 호가 한창 날아가고 있던 2006년에 행성 지위를 잃어버리면서 더욱 애틋해진 듯싶다. 카론이 위성치고는 꽤 커서 명왕성과 이중행성을 이루고 있는 사실도 이색적이었을 거다. 자전주기가 지구 시간으로 6.4일, 공전주기 248년이다. 지구에서 48억 킬로미터 거리다. 아득해라. 저 멀리를 어떻게 가지.


뉴호라이즌스 호는 목성의 중력을 이용해서 속력을 얻을 계획이었으므로 지구, 목성, 명왕성이 발사에 적합한 위치에 늘어서는 시기가 한정적이다. 그때가 언제? 2002~2006년이었다고 한다. 마지막 해에 발사한 셈이다. 태양과도 너무나 멀어서 태양열판은 무용지물, 핵 배터리를 동력원으로 달고 갔다. 플루토늄을 싣고 플루토(명왕성)로. 행성의 이름을 딴 원소가 해당 행성 탐사에 쓰였다니 그것도 재미 포인트다. 무게를 줄이려고 온갖 애를 쓰는 와중에도 장비 7종 외에 하나 더 실은 게 있었으니, 바로 클라이드 톰보의 유해 일부다. ‘우주선에서는 이런 감성적인 일조차 엔지니어의 손을 거쳐야 하기 때문’(306)이었을까, 감동이 더하다.


장비 7종과 각 역할은 이렇다. 자외선 분광계(대기 중 기체 구성 파악), 적외선 지도 작성 분광계(표면 지도 작성과 성분 파악), 전파신호 실험계(대기의 온도와 압력 측정), 장거리 정찰 촬영 장치(고퀄 사진), 플라즈마 장비 두 개(대기 탈출속도와 탈출기체의 구성성분 파악), 먼지 카운터(행성 간 입자 측정). 장비 설명 부분도 아주 친절해서 옮겨놓고 말았다. 그래서 뉴호라이즌스 호가 대장정에서 밝혀낸 과학적 사실은 무엇인가. 부록 편에 10가지가 실렸으니 읽어보면 되겠다. 자연을 과학으로 풀어냈다고 해서 그것의 아름다움이 덜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명왕성의 애틋함도 인간의 협력과 훌륭함도 더 고무된다. ‘등대처럼 반짝’(496)이는 명왕성 하트가 얼어붙은 질소 바다라고 해도. 메탄 비가 내린다고 해도.



앨런은 뉴호라이즌스 호가 명왕성으로 가는 길에 마지막 동면에서 깨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텔레비전 드라마 <스타트렉: 엔터프라이즈>의 심금을 울리는 주제곡인 <진실한 믿음Faith of the Heart>을 골랐다. 뉴호라이즌스 호의 여행에 이 노래 가사가 아주 잘 맞는 것 같았다. 사실 앨런은 이 노래를 들었을 때, 마치 명왕성 탐사계획의 자초지종을 말하는 노래 같다고 생각했다. (416-417)





백자평과 밑줄: 주인공, 결, 담배영화, 책끝시작, SF세계 NoSmoking

주인공은 선을 넘는다 | 오후 | 사우


영화 텍스트가 비상하게 잘 쓰인 경우입니다. 전작들보다 오후 작가 의견이 훨씬 많이 드러나네요. 선을 넘는 화끈한 글발과 매력이 단비 같습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이런 용기. 부디 계속해주세요.


광풍을 뚫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했는데, 사랑하는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 세상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치열한 싸움 뒤에 공허함만 남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인가. 유치하게도 나는 여전히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 믿는다. 그 대상이 거대한 이상이 아니어도 좋다. 꿈이 아니어도 좋다.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너무 사소해서 다른 사람이 비웃는 것이라면 더 좋다. 남들이 비웃는 그 사소한 것을 위해 당신은 세상을 바꿀 것이다. (265-266, 포기하지 않는 용기 <소공녀Microhabitat(2017)>)


결: 거칢에 대하여 | 홍세화 | 한겨레출판


‘옳기 때문에 내 편이 되는 게 아니라 내 편이므로 옳다고 주장하는 세상’(39)에 환멸을 느끼던 참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존재가 고마운 홍세화 샘.


세계를 떠다니는 인간 부초들, 이주노동자들이 이 땅에 정주하면 안 된다는 정부 당국자의 발상에는 단일민족, 혈통 보존이라는 전근대적 사고와 함께 제3세계 출신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제3세계 사람들에 대한 한국인의 우월감은 백인들에 대한 비굴한 태도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제3세계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표시하는 사람일수록 비굴할 정도로 제1세계와 백인을 선망한다. 예멘 난민들에 대한 혐오는 이러한 ‘GDP 인종주의’에 무슬림에 대한 편견이 결합되어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196-197, 외교부 : 법무부)


담배와 영화 | 금정연 | 시간의흐름


어쩜 이렇게 잘 쓰실까. ‘실패’에 감탄+체호프 조언 이행해줘서 고맙습니다! (호프가 꿀맛은 아니었을 거야... 담배맛)


누군가 내게 담배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릴 것이다. 다시 한 번 묻는다면 말끝을 흐리며 잘 알아듣지 못하게 중얼거릴 거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묻는다면 그때 비로소 내 지저분한 신발 코를 바라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할 것이다. 문장…… (네? 뭐라고요? 제발 알아듣게 좀 말해요!) 담배는 문장이라고요……

하나의 문장은 언제나 다음 문장을 부른다. 담배 역시 언제나 다음 담배를 부른다. 로만 야콥슨의 분류에 따르면, 그때 담배는 은유가 아닌 환유가 된다. (125, 언어와의 작별)


책 읽기의 끝과 시작 | 강유원 | 라티오


부록 장미의 이름 읽기는 장미의 이름보다 더 잘 읽히고 유익하네요. 또 하나의 ‘아욱토리타스’ 되겠습니다. 절판 단행본이 아쉬웠던 독자라면 득템 기회.


서평뿐만 아니라 모든 글의 첫 문장을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든가, ‘우주는 거대한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 등과 같은 과대한 서사로 시작하는 것은 바보들이 하는 짓이다. 인류를 움직인 중요한 책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신약 성경의 첫 권 <마태오의 복음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읊겠다는 소박한 시도로 시작한다. 서평 말미에 ‘이 책을 읽었으니 앞으로는 이렇게 하겠다’는 맹세를 적는 것은 ‘나는 서평을 쓸 만한 깜냥이 결코 아닌 사람’임을 고백하는 짓이다. 책을 읽고 교훈을 얻었다면 혼자서 조용히 당장 해야 할 일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 좋다. (78-79, 서평의 종류와 기본 형식)


SF가 세계를 읽는 방법 | 김창규ㆍ박상준 | 에디토리얼


짤막한 소설과 해설 40편이 묶였다. 인공지능, 로봇, 유전자조작, 신체증강, 가상현실, 우주진출. 근미래 정말이지 궁금해서 장수하고 싶.. 책이나 읽자.


그 시절 사람들은 속도에 매달리고 요약에 매달렸다. 훗날 연구한 바에 따르면 SNS라는 서비스가 그런 경향을 부추겼다고 한다. 더 날카로운 의견과 표현이 더 많은 사람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할 단어와 문장을 갈고 갈아 무기를 만들었다. (…) 하지만 어느 흐름이든 올라타지 못하고 밀려나는 나뭇잎이 있게 마련이다. 나뭇잎들은 서서히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그 안에 나도 있었다. 우리는 스스로 ‘느린 물’이라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느리고,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 의사를 표현하고, 자극을 싫어했다. (146-147, ‘느린 물’ -김창규)



신이 되기는 어렵다 Smoking

신이 되기는 어렵다 | 아르카디ㆍ보리스 스트루가츠키 | 이보석 옮김 | 현대문학


<노변의 피크닉>이나 <10억 년>을 기대하고 책장을 펼쳤다가 어리둥절... 기사와 귀족, 열악한 처지의 평민이 등장하고 자기 몸보신이나 걱정하는 왕이 다스리는 봉건제 사회다. 싸움과 폭음과 고문과 숙청이 난무한다. 알고 보니 유럽 중세와 꼭 닮은 어떤 행성 관찰기다. 누가 관찰하는가. (미래?) 유토피아 지구 소련에서 파견된 역사학자 안톤이다. 행성에서는 루마타라는 이름의 기사로 분한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의 힘을 입은 안톤이 행성에서는 ‘신’으로 여겨질 터다. 난봉꾼 기사로 연기해야 하는 루마타, 겉으로는 희희낙락하나 역사학자 안톤은……


소련이 추구하던 공산주의 이상향이 지구로 설정되고, 당시 실사판이 행성인 꼴이다. 그러니까 중세 모험기를 빌려온 정치풍자 되겠다. 저자도 후기에서 언급하듯, 출판된 사실이 놀랍다(1964년 출간). 예프레모프가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이상적 인간들이 꾸리는 유토피아를 그렸다면, <신이 되기는 어렵다>의 유토피아 혹은 미래 공산주의 사회 인간은 동정심에 가득 차 고뇌하는 존재로 제시된다. 한바탕 시끌벅적 난리법석 끝 뜻밖의 묵직함에 숙연해지는 이유다. 그나저나 예프레모프는 고생물학자로서 몽골 답사팀을 이끌더니(1946년)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이 작품을 옹호해 주기도(1960년대) 했단다. 열일하신 예프레모프 님이시다.


두 형제 작가 사이 작품 구상 과정을 소개하는 동생 스트루가츠키의 후기도 고마운 선물 같다. ‘창백하고 토실토실한 동생아’(346) 같은 편지 문구 말이다. 공동저작의 분투와 다정함이랄까.


나는 추상적인 고귀함과 명예, 기쁨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 뒤마처럼. 반대할 생각 마. 현대의 문제가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단편이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이 악마 같은 동생아, 내가 무릎 꿇고 빌게! 검을, 검을 허락해 줘! 추기경들을! 항구의 술집들을……!  (347, 후기,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아르카디 스트루가츠키가 쓴 편지 중)



1124알라딘지름 술이깰때까지자시오

늦은 생선 알라딘입니다. 푸짐하죠? 피너츠 일력 귀엽습니다. 어린왕자 상자, 양말, 틴케이스, 젓가락 등 준다고 해서 다 받았습니다. 사은품이 만 마일리지어치네요. <얼마나 닮았는가> 천천히 샀더니 김보영 작가 사인본이 아닙디다. 인기 대단하심. 암튼, 술집 기침하였습니다.


공룡 사냥꾼 NoSmoking

공룡 사냥꾼 | 페이지 윌리엄스 | 전행선 옮김 | 흐름출판


미국은 참 땅이 넓구나, 새삼스럽다. 플로리다에서 어린 시절 수영을 하며 지내다보면 유골이나 화석 같은 걸 막 발견하기도 하는가 보다. 물론 안목과 취향과 열정이 맞아떨어져야 공룡 화석도 찾는 것이겠다. 그러다보면 대륙을 벗어나는 규모로 손을 뻗게도 될 테고. 2012년 뉴욕 경매에 나왔던 몽골의 거대 육식성 공룡 T. 바타르(타르보사우루스) 뼈를 둘러싼 이야기다. 지은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 인물과 사건이 충실하게, 소설처럼 재미있게 구성된 논픽션이다.


공룡 사냥꾼 에릭 프로코피가 중심에 있는가 싶더니 화석을 발굴해온 역사를 짚으며 수많은 이름들이 등장한다. 한 명이 등장하면 그 엄마 아빠, 어린 시절을 다 소개한다. 단 한 명도 평면적으로 두지 않겠다는 듯이 모두가 입체적으로 살아 있다. 그래서일까. 나쁜 놈! 하고 손가락질 할 대상이 없다... 아니, 한 사람 있다면 몽골의 지난번 대통령 쯤 되려나. 그렇다, 몽골 역사 또한 짧게 읽을 수 있다. 엘베그도르지 대통령은 마치 우리나라 이승만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로서, T. 바타르를 이용해 자기에게 유리하게 여론을 이끌었다. 몽골의 정치 상황과 몽골을 자기편에 묶어두려는 미국의 입김이 잘 작용해 타르보사우루스는 몽골로 무사히 돌아가셨다.


프로코피는 분명 범죄(밀수)자가 맞지만 공룡 사냥꾼과 고생물학자와의 관계는 참으로 미묘해 보인다. 그런 면에서 훌륭한 ‘과학자’ 명단에는 들지 않았지만 위대한 발굴을 많이 한 화석 ‘사냥꾼,’ 19세기 영국의 메리 애닝을 언급해준 점이 고무적이다. “소위 배웠다는 자들이 그녀의 뇌를 빨아들여, 엄청난 출판물을 생산해냈는데도 메리는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했다.”(270) 찰스 라이엘과 찰스 다윈의 동시대 인물이고 지질학자 라이엘은 ‘라임의 절벽이 어떻게 지탱되고 있는지 묻기 위해 메리에게 연락’(270)하기도 했다고 한다. 처음 들은 이름이라 귀하고, 자주 언급되어야 할 이름 메리 애닝이다.


이름 하나를 더 기록해두자면, ‘1920년대에 미국이 고비에서 거둔 성공에 고무된 러시아인들은 1940년대에 그들만의 주요 답사를 시작했다. 고생물학자이자 베스트셀러 공상과학소설 작가인 이반 에프레모프Ivan Efremov가 1946년 팀을 이끌었다.’(217) 이 이름을 어디서 봤나 했더니 공산주의 체제 프로파간다 소설 <안드로메다 성운>을 쓴 ‘예프레모프’였다. 반가워라. 아무튼. <공룡 사냥꾼>은 숱한 이름과 삶과 열정과 역사가 좁게, 넓게 또 가까이 멀리 잘 담긴 역작이다. <쟁기> 옮긴이의 말에서 봤지 싶은데, 토카르추크가 강조한 점이 ‘다정함’이란다. 타인에 대한 다정함. ‘지구의 전리품을 얻기 위한 모험’(부제)은 페이지 윌리엄스의 다정한 호기심의 전리품이다.


오늘날에도 한의사는 용의 뼈를 처방한다. 얼마 전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작가 한 명이 유명한 고생물학자인 쉬 싱Xu Xing에게 물었다.

“어떻게 중국 사람들은 21세기를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신화 속의 짐승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쉬 싱은 “어떻게 그 많은 미국인이 여전히 진화를 믿지 않을 수 있나요?”라고 되물었다. (78)



+옥에 티.

+형용모순(?)
대머리일 경우 나는 흑발이 좋음.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