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5: 술이깰때까지자시오


이제 좀 살겠어, 싶었던 대선결과 이후 거의 매일 울었던 것 같다. 좋아서, 후련해서, 그리고 안쓰러워서. 어쩌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울 일에 감동하게 되는 이 지경이 ‘비정상’일 텐데, 그럼에도 즐기려고. 응원하려고. 대통령 잘 뽑았다고, 우리가 잘했다고 얘기하려고.


심블리, 미안하고 고맙고 여전히 사랑합니다. 빌 헤이스 다음으로 이런저런 책들을 훑다가, 어떤 책까지 왔는데 짧은 작가의 말 이후 본문이 이렇게 시작하더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홀려서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문장이 이어질지, 훅, 숨을 들이켜고, 그러고 나서도…… 다음 문장으로 눈을 옮기지 못한 채 이러고 있다. 어쩌지. 오랜만에 다시 만난 우리. 침대로 가야겠는데.



해부학자 NoSmoking

해부학자 - 10점
빌 헤이스 지음, 박중서 옮김, 박경한 감수/사이언스북스

 

인간은 오로지 겉으로만 인간일 뿐.
피부를 제거하고, 해부하면
곧바로 ‘기계 장치’가 나타나니.
-폴 발레리 (173)


같은 제목으로 페데리코 안다아시의 소설도 있지만 이  『해부학자』는 빌 헤이스의 것이다. 불면증(『불면증과의 동침』, 2001)과 (『5리터』, 2005)에 이어 이번에는 해부(2008). 150년 전 출판된 이래 지금까지도 가장 유명한 의학 전공 서적 『그레이 해부학』을 쓰고 그린 두 헨리 이야기다. 헨리 그레이(글)+헨리 밴다이크 카터(삽화)를 파헤치기 위해, 글쟁이 빌 헤이스는 역시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은 자료연구와 자세를 보여준다.


자세? ‘강의 첫날, 여섯 번이나 조교로 오해를’(27) 받으면서 1년 넘게 의과대학 청강생으로 해부 실습에 임한다. 그러니까, 한편으로 빌 헤이스의 해부 실습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헨리(들)의 자료가 있다. 150여 년을 왔다갔다하며 풀어놓는 이야기보따리가 지루할 틈 없이 잘 구성되어 글쟁이로서의 진가를 또 다시 발한다. 불면증과 피, 거기에 해부까지. 이제 과학 에세이스트라고 불려도 되지 않을까 싶은 빌 헤이스다. 


그녀가 굴심방 결절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는 동안-이 세포에서 만들어진 전기 신호가 심장 전역에 위치한 다른 세포로 퍼져 나가면서 심장을 수축ㆍ박동하게 만드는 것이다.-나는 해부학과 은유의 그 완벽한 만남에 그만 아찔한 느낌이 들고 말았다. 우리 몸에서 굴심방 결절은 복장뼈(흉골, sternum) 바로 밑에, 그러니까 가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공포나 사랑이나 기쁨을 맨 처음 느끼는 부분이 바로 그곳이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심장이 뛰고 철렁하고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부분이 바로 거기였기 때문이다. (64)


‘해부학과 은유의 그 완벽한 만남’ 같은 부분은 글쟁이에게서 내가 기대했던 바이기도 하고 어김없이 그러하여, 무심한 듯한 헤이스의 ‘칼질’과 함께 전개되는 글은 아름답고도 따뜻하다. 더구나 오랜만에 다시 만난 빌 헤이스가 더 좋아진 이유가 있는데, ‘이번이 시체를 살펴볼 마지막 기회였다. 나는 실습 중에는 시간상 해부를 못 하고 넘어간 부위였던 턱관절(악관절, temporomandibular joint, TMJ)을 살펴보기로 했다.’(231) 왜?


나는 오래전부터 이른바 공식 명칭으로는 턱관절 장애-짧게 줄여서 그냥 TMJ 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 TMJ 장애 때문에 나는 턱에 대해서는 항상 예민하다. (232)


이런 반가울 때가! 재작년 여름이었던가, 치과병원부터 시작하여 결국 대학종합병원 구강내과 구강안면 통증클리닉까지 거쳐 내가 진단 받은 병명이 턱관절 장애였다. 물리치료와 약물복용 이후 다시 특별히 아픈 증상은 없지만 나 역시 ‘턱에 대해서는 항상 예민하다.’ 정해진 실습 과정이 다 끝나고 헤이스 자신만의 고유한 문제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헤이스 식으로 말하자면 ‘그 ‘딱’과 ‘뚝’ 소리의 원천을 찾아가는‘(233) 몇 시간이 어찌나 사랑스럽고 고맙던지.


거의 2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턱관절의 거의 완벽한 표본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표본에는 이 부위의 가장 섬세한 특징 가운데 하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관자뼈(위)와 아래턱뼈(아래) 사이에서 일종의 충격 흡수재 작용을 하는 작은 연골 원반이었다. 이 원반이 손상되거나, 또는 내 경우처럼 닳아 버리면 TMJ 장애가 생기는 것이다. (233)


나의 충격 흡수재도 닳아 버린 모양이다. 내 무릎 관절만 생각해도 자연스레 연상이 된다. 헤이스도 아마 무릎에 관절염이 있지 않을까 싶다. 저 ‘딱’과 ‘뚝’ 소리, 그래…… 중년 소리. 자신의 해부 실습과 헨리의 기록 외에도 해부학에 관한 역사상 일화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사라진 해부학 스케치들의 행방이라든지 베살리우스의 르네상스 시기 대작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De Humani Corporis Fabrica)』를 도서관에서 직접 만져보는 대목도 흥미롭다.


그리고 무엇보다, 헤이스와 16년 동안 함께했던 동반자 스티브가 있다. 『해부학자』를 포함하여 헤이스 전작 모두에서 해맑게 등장했던 이로, 헤이스가 이 책 에필로그를 쓰던 무렵 사망한 모양이다. 시체를 그렇게 들여다보고 파헤쳐보았더라도 해부학은 죽음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는다. 죽음은 움직임이 없는 상태다. ‘생명을 규정하는 상징’(395)으로서의 움직임. 해부학이 그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는 구조를 알게 해준다면, 죽음은 스티브가 가르쳐주었다. 헤이스의 근간 『불면의 도시: 뉴욕, 올리버,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 스티브의 죽음 이후 뉴욕으로 터전을 옮겼고, 아마도, 또 다른 죽음을 헤이스는 배웠을 것이다. 그렇다, 제목의 저 올리버 색스.


거꾸로 생각해 보자면, 우리는 육안 해부학을 통해 생명을, 인간의 생명을 배운다. (…) 그렇다면 생명이란, 또는 생명을 규정하는 상징이란 움직임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눈을 깜박이건, 손가락을 구부리거나, 팔다리를 휘두르고 숨을 헐떡이며, 뭔가를 향해 번개 같은 속도로 달려 나가는 것. 어떤 목표를 향해, 어떤 결승점을 향해, 그 끝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395)



 


사진의 글자가 잘 안 보일까봐 추신. 전작들의 헌사가 ‘스티브 번에게,’ ‘스티브 번에게,’ ‘스티브 번에게 이 책을 바친다’다. 헤이스의 근간 첫 페이지가 ‘올리버 색스에게’일지, ‘올리버 색스에게 이 책을 바친다’일지 궁금하다. 후자에 500원 걸고 싶은데 누구에게 주(거나 받)지? 절판이 안타까운 사이언스북스의 빌 헤이스 전작 세 권.





티투스는 베레니스를 사랑하지 않았다 Smoking

티투스는 베레니스를 사랑하지 않았다 - 10점
나탈리 아줄레 지음, 백선희 옮김/무소의뿔


베레니스만 제외하고 모두가 아는 사실, 티투스는 베레니스를 사랑하지 않았다. 베레니스까지도 포함하여 모두가 아는 사실, 베레니스는 티투스를 사랑했다. 장 라신 비극의 아주 단순한 구조다. A는 B를 사랑하고 B는 C를 사랑한다. 보통은 저 B가 주인공인 드라마 말이다. 소위 삼단일의 규칙 속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격정을 끌어낸 프랑스 고전작가 장 라신의 (재)구성이다.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17세기 작가 라신을 읽기 시작한다’는 책 소개 글. 전적으로 같은 의견이다. 문학사에서 점점이 뿌려진 많은 작품들 중에서 절절 끓는 사랑과 저 A, B, C 방향성의 가차없음을 라신에서만큼 본 적 있을까. 절제(사건, 시간, 장소의 단일)와 폐쇄성(우리는 결말을 안다) 안에서 경험하는 최고의 순간. 내 경험이 인류의 어떤 원형 안에 있음을 확인하기, 이 어처구니없는 방향성 속 한 역할인 숱한 베레니스들의 발견이야말로 크나큰 위로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또 다른 물음이 있겠다. 코르네유가 아니고 왜 라신이냐고? 답, 있다. 300년 쯤 된 대답이다. 코르네유가, 응당 그래야할 인간상을 그렸다면 라신은 당신이나 나, 약해빠진 인간 그대로의 모습을 그린 작가여서다. 문학사를 보다보면 대구를 이루는 쌍이 있게 마련. 내게는 코르네유-라신 쌍이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 쌍 정도로 정리되어 있고 명예롭고 도덕적인 인간을 추구하는 전자와, 사랑에 빠진 평범하고 약한 나를 닮은 인간을 그린 후자로 구분된다. 그리고 내가 끌리는 문학과 취향도 후자에 속하겠고.


라신을 좋아한다고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갈고 닦은 프랑스어로, 엄격한 규칙 안에서, 최고의 격정과 박력을 구성한 사람. 현재형의 시적인 언어로 이토록 아름답게 (재)탄생하여 내게 (다시) 온 라신이어서 냉큼 구해, 빠져들듯 읽었고 아직도 어리둥절하다. 혼자 간직했던 보물을 공유하게 된 김에 칭찬. 번역도 좋다. <앙드로마크>의 피뤼스Pyrrhus가 어느 순간 ‘피로스’로 변한 것만 빼면 말이지만. 어제 읽은 호프만의 <스퀴데리 양>이 다시 등장하여 반가웠다는 사실도 덧붙이자. 파리로 상경한 라신이 드나들게 되는 살롱 ‘토요회’의 주인장이 마들렌 드 스퀴데리다.


제목을 바꿔본다. 베레니스는 티투스를 사랑했다. 페드르는 이폴리트를 사랑했다. 피뤼스는 앙드로마크를 사랑했다. 이 모두 사실이고 과거형이다. 해부한 피와 살에도 새겨져 있을 운명이자 원형이겠다. 사랑했다, 나도 몇몇을. 그리고 그 이별이 라신에 다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


그렇게 사소한 문제에 관해 글을 쓰면 비판받을 거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어? 왜 별것 아닌 문제에 대한 비극을 쓴 거지?
이별은 별것 아닌 게 아니야. (…) 이별 통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포착한다면 우리는 인간 조건의 한가운데, 인간의 욕망과 고독의 중심에 있는 거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영혼의 주검을 해부할 수 있지. (197)



스퀴데리 양 Smoking

스퀴데리 양 - 8점
E.T.A. 호프만 지음, 정서웅 옮김/열림원


마들렌 드 스퀴데리(1607~1701) ‘프랑스의 소설가, 사교계 인사’라고 다음백과에 나온다. 호프만이 실존 인물을 데려다 쓴 범죄추리소설. 독약과 보석으로 인한 범죄가 많았다는 17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한다. 독일 낭만주의 작가가 고전시대 이웃나라를 배경으로 가지고 온 게 흥미롭다. 한 사조에 대한 반동으로 다음 사조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낭만주의의 싹이 고전주의의 풍토에 숨어 있었을 이 무렵이 작가의 관심을 샀을 법도 하다. 엄격함과 온갖 규칙 뒤에 숨어 있는 방종이나 광기나 개인적인 욕망 같은 것 말이다. <모래 사나이>나 <악마의 묘약>에 비하면 소품 같은 느낌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호프만이니까. 이것도 좋다. 보석 세공 천재 예술가 카르디악의 마성.


그러나 완성된 작품을 카르디악에게서 가져가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 결국 주문자의 성화에 굴복하여 보석을 내주어야만 할 때엔 실로 온갖 불쾌감을, 아니 내면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의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보석의 가격이나 금세공의 우아함에 있어 수천 프랑의 가치를 지닌 중요한 세공품을 주문자에게 건네주어야 할 경우엔 작품 주위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저주했다. (45)


 

3001 최후의 오디세이 Smoking

3001 최후의 오디세이 
아서 C. 클라크 지음, 송경아 옮김/황금가지


<스페이스 오디세이> 완전판의 마지막 이야기와 장황한 고별사. 장황하다고는 했지만 매우 친절하고 따뜻한 뒷이야기를 제공한다. ‘출처’도 별개 장으로 엮여 있으면서 과학적인 설명과 땡스투를 겸한다. 과학적인 설명? 이야기의 설정들이 허황된 것만은 아님을 보여주는 구구절절이기도 하면서 누군가 더 따지고 든다면 “이건 허구야, 바보야!”(310)라고 말할 준비도 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지침서라고 할까. 작품 속에서 꾹 참은 유머를 후기에서 다 터뜨린 듯도 하다.


집필 당시 갈릴레오 궤도 탐사선이 목성을 돌고 있었다는 사실에 작가로서는 온몸의 세포가 곤두서있었으리라. 작품에 이미 글로 써놓은 가니메데 풍경 묘사를, 탐사선으로부터 나중에 도착한 사진과 비교해볼 때의 느낌이 어땠을지. 더구나 자신이 머릿속으로 탐사한 풍경이, 전송받은 이미지와 하나도 어긋나지 않았다면! ‘헛기침’(311)할 만한 장황함이고 고마운 후기다.


1, 2, 3권 모두에서 주인공 격으로 활약했던 플로이드 박사가 계속 나오리라 기대했는데, 이크. 더 놀랍고 반가운 사람이 (재)등장한다. 전편들에서, 버려진 우주선을 되찾는 감격 같은 것과도 비슷한 뭉클함이겠다. 까마득한 1000년이기도 할 텐데, 우주적 시간으로는 순간에 지나지 않을 수도. 또한 태양계를 구하는 일에 비하면 ‘변경 마을의 범죄와 부패’는 ‘사소한 걱정거리’이자 ‘위안’(270)이 되기도 하는 규모의 시공간이다. 두 개의 별을 갖게 된 것 말고는 3001년에도 태양계 인류는 무사하다……는 스포1.


클라크의 미래는 밝다. 브레인캡이나 아이덴트 같은 장치와 시스템은 전체주의, 통제사회의 아이템 아닌가 싶은데, 지구에 닥칠지도 모를 큰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작업에 클라크는 너무 바쁘시다. 그러는 와중에도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된 심리분석을 ‘헛소리,’ 더 나아가 ‘전염병’ (130)으로 여기는 점이나 ‘정신 병리학’(162)이 되어버린 종교, 특히 그 잔인함을 역설할 때는 통쾌함 같은 것도 없지 않았다. 클라크의 정확한 통찰력을 빌려 우리 미래의 큰 비밀을 하나 폭로하겠다. 3950년대 말에 지구는 다시금 엄청난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스포2.


“우리가 다운로드될 수 없다면, 우릴 기억해 주게.” (272)



1000년 여행은 끝났고, 떡밥은 전부 수거되었다. 마지막 권 기념사진. 별천지로군. (담뱃재 아니다) 찬조출연 캘리포니아 성운 테이블매트 ⓒ알라딘



이와 손톱, 혹은 석조저택 살인사건 Smoking

이와 손톱 - 8점
빌 밸린저 지음, 최내현 옮김/북스피어


<석조저택 살인사건>은 개봉한 모양이다. 1955년 원작이 영화개봉에 맞춰 새 옷을 입고 나왔다. ‘오래된 새 책’이 반갑다. 뒤표지에서 ‘더 이상 새로운 미스터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권한다!’는데, ‘더 이상 새로운 미스터리는 없다고’ 생각지도 않으면서 사 읽었다. 최근 세 출판사 X세트 의 '깜깜이' 홍보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결말 봉인 특별판’으로 호기심+몸값을 올린 듯도 하다.


따로 시작되었던 두 이야기가 시나브로 겹쳐져가는, 단순하고도 영리한 구조를 하고 있다. 접합 지점이 나타났을 때의 카타르시스는 오히려 봉인 간지(間紙) 전에 등장했지 싶다. 역자 후기에 의하면, 작가가 단숨에 써내려간 작품이라고. 쓸 때 정말 신이 났을 것 같은 느낌이 물씬 든다. 반면, 영화는 글쎄. 원작을 읽고 나니 전혀 보고 싶지 않은 걸 어쩌지. 식스센스, ‘저이가 유령이야’ 급으로 스포 당한 것 같아서.


마술사가 만드는 눈속임과 착각의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마술사가 보여 주기 전까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다. (152)


초판의 봉인을 재현했다는 간지, 19장부터다. 겉에 랩핑포장까지 되어 있는 280쪽 남짓한 책을, 224쪽까지 읽은 이가 나머지 50여 쪽을 읽지 않겠느냐만. 그저 재미이겠거니, 했고 과연 재미가 있다.


이 술 맛있다. 중국식당에서 뽀려온 건 아니다.



사이드 트랙 Smoking

사이드 트랙 - 8점
헨닝 망켈 지음, 김현우 옮김/웅진지식하우스


<하얀 암사자>를 읽었다는 내 기록은 있는데 내용은 거의 생각나지 않는 헨닝 망켈(1948~2015)이다. 스웨덴인이면서 ‘아프리카를 제2의 고향으로 삼게 되었고, 인생의 대부분을 스웨덴과 아프리카를 오가며 연출가 및 작가로 활동’(앞날개)했다. <사이드 트랙>은 ‘쿠르트 발란데르 형사 시리즈’ 10부작 중 다섯 번째 작품이란다. 스웨덴의 아름다운 여름에 벌어지는 엽기적인 연쇄살인. 정계와 재계 거물들의 추악한 욕망이 얽힌, ‘복지국가’ 스웨덴의 어둡고 슬픈 현대 뒷모습이 차차 드러난다.


범인과 범행을 등장인물들에 앞서 독자에게 먼저 보여주는 진행인데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차분하고 꼼꼼한 서술에다, 발란데르 형사를 위시한 인물들이 얼마나 ‘뻘짓’을 하는지, 다른 말로 ‘옆길(사이드 트랙)’로 새는지 (‘전지적 독자’로서) 팔짱끼고 구경해보라는 것도 같다만, 발란데르가 가보는 옆길이 그렇게까지 뻘짓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정의감과 공감과 연민에 성실함까지 갖춘 경찰을 보는 것은 언제나 기쁘다. 피곤에 찌든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로,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경찰의 탄생이다. 발란데르를 고작 두 번 만난 나에게나 말이지만.


시리즈를 순서대로 따라 읽어왔다면 더욱 재미있게 보았을 게, 발란데르 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캐릭터와 개인사들도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하였을 것 같아서다. 발란데르의 가족만 해도 전처가 있고, 늙어가는 아버지가 있고 성큼 커가는 딸이 있음에야. 특히 딸 린다는 <사이드 트랙>에서는 진로를 모색하고 있는 21살인데, 작가는 ‘린다가 경찰관이 되어 활약하는 속편을 쓰겠다고 약속했다’는 소개글이 알라딘에 있더라. 발란데르의 안쓰러운 피곤함, 무섭고도 뭉클한 추리물이다. 어이없는 오타 두 군데가 귀엽게 여겨질 정도로.



그 사람이 기자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했어요. ‘먼저, 진실을 찾아서 땅을 파들어 가는 부류가 있지. 구덩이 안에 들어가서 먼지를 뒤집어써가며 삽질을 하는 거야. 그런데 그 위에서 파낸 흙을 다시 메우는 다른 부류들이 또 있단 말이지. 늘 그 둘 사이의 싸움이야. 지배력을 향한 제4계급의 영원한 시험이라고나 할까. 어떤 언론인들은 사태를 까발리고 폭로하기를 원하고, 다른 이들은 권력의 심부름이나 하면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감추는 걸 도와주는 거야.’ 사실이 그랬습니다. (126)


 

2061 스페이스 오디세이 Smoking

2061 스페이스 오디세이 
아서 C. 클라크 지음, 송경아 옮김/황금가지


1987년에 쓰인 2061년이고 2017년에 읽는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쓰였고 44년 후가 배경인 셈이다. 2061년인 이유는 아마도 핼리 혜성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약 76년 주기로 태양을 공전하는 혜성. 일생 한 번 볼까 말까한 낭만적인 돌덩어리인데다 나는 다시 볼 일 없어 1986년의 아련한 추억만을 가지고 살아야 할 저 태양계 구성원 혜성에, 2061년 이제는 막 간다. 착륙한다는 말이다. 손으로 흙(?)을 쥐어보는 순간은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1986년 3월 8일 촬영된 핼리 혜성 (출처 다음백과)


핼리 혜성은 관찰 차 랑데부한 곳이지만, 달은 물론이거니와 한때 목성이었던(!) 루시퍼의 위성 가니메데에까지 인간의 활동 영역이 넓어졌다. 당연히 전편 2010에서 던져놓았던 에우로파 밑밥을 수거하기 위함이겠다. 2010년의 징조가 어찌나 무서웠던지, 이번엔 거의 가볍고 싱거울 지경이다. 심령술을 닮은 요소도 여전하고. 아무튼 아직까지 지구와 달은 건재하다. 지구 따위 뭐라고, 싶지만 살갑고 애틋한 우리 터전임에야. 복작복작 뭔가 힘들 때 필요한 건 조망효과. 해괴한 번역 문장이 준 짜증도…… 그래, 한낱 지구인동포에 대한 넉넉한 조망효과로 극복.


인류를 단결시키는 것은 우주로부터의 위협뿐이라는 말은 자주 있었다. 루시퍼가 위협인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도전인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26)

 

0511: 알라 술이깰때까지자시오


정선생은 좋겠네 축하한다고 전해줘, 김쫑이 말했다. 문빠 정선생에게 축하를 전하는 방법. 역시, 알라듼잉가……



축하합니다.



여행가방 Smoking

여행가방 
세르게이 도나또비치 도블라또프 지음, 정지윤 옮김/뿌쉬낀하우스
 

36년 간 살아온 나라를 떠날 때 꾸린 여행가방이고 달랑 여덟 가지 물건이 들었다. 설정이나 상징이라고 해도 성공적인 자전소설을 이룬다. 귀납적인 자서전쯤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키득키득 웃은 건 맞는데 짠한 감상이 남는 것도 맞다. 전당포에서는 따지지 않는 소위 ‘감정적’ 가치. 개인의 역사가 담긴 사물들을 전적으로, 감정적이고 향수 어리게 다루는 기억의 글이자 영리한 소설(이라고 쓰고 자서전이라 읽는다). 한 인생이 담긴 글이 중고서점(전당포?)에서 책이라는 형태의 사물로 취급되는 건 어쩌지 못하지만. 새 책 팔러 간 합정알라에서 충동적으로 집어온 중고 절판본이다. 한 인생이 들어서였는지 가방이 무겁기는 했다.


나는 빈 가방을 훑어보았다. 바닥에는 칼 마르크스. 뚜껑에는 브로드스끼. 그리고 그 중간에 구제불능의 별 볼일 없는 인생 하나가 있다. (…) 가방에서 꺼낸 잡동사니들이 식탁 위에 한 무더기 쌓여 있다. 이것이 내가 36년 동안 벌어들인 것의 전부다. 고국에 사는 동안 말이다. ‘정말 이게 다야?’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그래, 이게 전부군.’하는 답변이 따라 나왔다. (13, 머리말)



여행가방에서 나온 건 아니고 여행동지 정선생이 마트에서 데리고 온 산미겔+행복+땡큐. 술병 났다가 나았더니 어느새 주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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