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테미스 Smoking

아르테미스 - 8점
앤디 위어 지음, 남명성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마션> 첫 문장이 생각나는 오마주, 안녕? 화성 욕쟁이 마크 와트니를 이은 욕쟁이 주인공은 재즈 바샤라이고 달의 도시 아르테미스에 산다. 같은 도시에 사는 거부 사업가 트론 란비크 분석에 의하면 ‘엄청나게 활용이 안 되고 있는 자원’(76)이다. 란비크를 언급한 김에 등장인물들 이름을 잠깐 보면, 바샤라, 란비크, 스보보다, 샤피로, 응구기(응국이 아니다, 케냐 출신은 맞다), 뒤부아 등 전 지구적인 인물 분포다. 국적, 피부색, 장애, 나이, 성별이 골고루. 지구를 떠난 설정이라면 이 정도 스케일은 보여줘야 하는 거다. 물론 ‘섹드립’이라고 해야 할지, 몇몇 농담은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유치하기도 하다만.


달 배경 스릴러물 <다크 사이드>와 비교해 읽어봐도 좋겠다. 느낌이 아주 많이 다르다. 뭐랄까, 귀엽고…… <마션> 같다! <마션> 이후 전업 작가가 된 앤디 위어로서는 생존의 문제라서 하는 말, 솔직히, 맞다. <마션>을 뛰어넘긴 힘들 거라는 사실 알고 있었다. <아르테미스> 이후도 꼭 보고 싶은 작가라고 하자. 지구의 거대 범죄 집단으로부터 아르테미스를 구하는 데 재즈의 ‘엄청나게 활용이 안 되고 있는 자원’이 활용될 터이다. 구하려다 말살할 위험에 이르게도 되는 게 묘미. 친구들과 아빠 자원이 합세하는 건 감동. 종내 죽음을 각오하는 점에선 비장미까지. 그렇다고 영웅이 되게 하느냐하면 그건 또 아니어서 더 좋다. 어찌 보면 이 시끌벅적한 ‘헛소동’ 이후 처음과 다르지 않은 가난뱅이 밀수꾼의 자리로 돌아온 게 고맙고 매력적이다. 내가 무척 기다렸던 소품이 있었다고 말했던가? 있었다.


덕트테이프 만세. 갖고 싶은데 아직 안/못 샀다. 쓸 일 없다는 뜻+앤디 위어 귀엽다. 리뷰를 쓸 때 게으른 나는 한글파일을 열고 제목 아래 표제어를 몇 가지 적어놓곤 하는데 <아르테미스>에는 이렇게 돼 있다. ‘+덕트테이프, 좆, 달.’ 혼자 보다가 좀 웃었다는 얘기. 빼 놓은 거 없지?…… 아, 참,


삼출물(渗出物): 1.스며서 나온 물질 2.염증이 생겼을 때 핏줄 밖으로 스며 나온 세포 및 액체 (다음 어학사전)

 


파르므의 수도원 1, 2 Smoking

 파르므의 수도원 
스탕달 지음, 오현우 옮김/신원문화사

 

그의 모든 행동들은 클레리아의 결혼 때문에 생긴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소박하고 기품 있는, 고귀한 신앙심의 발로라고 믿었다. (2권 359)


알고 보면 개인의 욕망을 따른 짓일 뿐인데 그게 역사가 되기도 하더라, 그런 건가. 스탕달 식 욕망이라면 대개는 개인의 사랑과 행복 추구 되겠다. ‘군주의 신임을 잃게 되면 믿을 것은 오로지 돈밖에’(2권 287) 없는 시절, 잘생긴 귀족 청년이 벌이는 뻘짓과, 현명하고 수완 좋은 고모님의 수습이 840여쪽에 걸쳐 펼쳐진다. 무모한 민폐 캐릭은 낭만주의 필수요소인지도 모르겠다만. 순수해서인지 멍청해서인지 모를 좌충우돌이 참... 지루하다.

2권 423쪽


스탕달의 마지막 말이 이래서 읽고 나니 행복하지 않은 다수가 되어 버린 상황, 당황스러워라. 사랑 놀음과 음모, 심리전에 관해서라면 두 세대 전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1782년)에 미치지 못하고 출세지향, 벨리슴에 있어서는 스탕달 자신의 전작 <적과 흑>(1830년)을 능가하지 못한 것 같응. 글쎄, 지루하고 허무했는데 그것도 감상이라면서 남긴다.


고맙습니다락방:) 술이깰때까지자시오


춥고 허기진 날 마침 생각났습니다
당신의 선물 이쿠폰
이크폰 아니고,
이쿠폰

온라인 주문하라는데
할배폰에서
할매컴에서도 듣질 않아
어뜨카지요;

전화했지요, 전화하면 잘 됩니다
아웅 마이쩌

오블로모프 1, 2 Smoking

       
오블로모프 - 10점
I.A. 곤차로프 지음, 최윤락 옮김/문학과지성사

‘오블로모프 기질’이라는 전문용어를 당당히 쓸 자격을 얻기 위해 읽은 숙제. 숙제치고는 예상 외로 재미가 있어 깜짝 놀랐다. 할일은 되도록이면 뒤로 미루고 먹거나 자는 일 말고는 가능한 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실내복과 소파와 이불에서 나오려하지 않는 게으름, 오블로모프 기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초반부는 마치 연극처럼 진행된다. 누워만 있으려는 지주 이야기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역동성과 유머다. (누워만 있는 어떤 다른 사람, 프루스트 류를 예상했던 탓이겠다.) 몸종이면서도 ‘마이너스의 손’을 가진 자하르는 슬랩스틱까지 구사하니 주인과 하인 콤비 연기가 일품이다.


그러다가 중후반부에 웬 연애와 사랑 얘기가 이렇게 길게 나오나 싶었는데, 옳다. 오블로모프의 무기력이 어째 노동이나 재산 불리기나 공부나 여행에만 미치랴. 사랑에는, 결혼에는, 그리하여 가족에는. 다른 말로, 사람의 기질이라는 것이 혹시 사랑이나 우정으로 인해 변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 오블로모프의 나태함과 무관심을 이용하여 등쳐먹는 이들만이 아니라, 그 나태함 안에서 정직과 순수함을 본 올가와 슈톨츠 같은 인물이 오는 이유이리라. 순전한 사랑과 우정으로 무위의 늪에서 오블로모프를 끌어내려는 눈물겨운 노력은 원하는 결과를 얻을까?
(스포) 응 아니야.


안타까우면서도 기꺼운 위로가 되는 건 왜지. 연민이라는 말 쓰고 싶지 않고, 이럴 자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활동적이고 정력적이며 이치에 밝아 끊임없이 움직이는 슈톨츠의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주의를, 오블로모프 식 ‘무위증’이나 ‘무위병’과 대비하여 오히려 ‘무도병’으로 여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지주계급의 타락을 조롱하는 맥락도 있는 모양이나, 내게는 오블로모프의 적극적인 무위가 '반항하는 인간'에 가깝게, 인간의 실용성에 저항하는 모습으로, 그러니까 훨씬 현대적으로 읽혀 구태의연하지가 않다. 모험, 노오력, 경쟁, 소위 성공과 실용만을 예찬하는 병적인 우리 21세기에 한층 새롭게 다가오는 19세기 곤차로프다.


그는 태어나 원형 경기장의 검투사로 양육된 사람이 아니라 격투를 관람하는 온화한 구경꾼으로 길러진 사람이었다. 행복의 불안도 인생의 격정도 그의 소심하고 나태한 마음으로는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으리라. 고로 그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인생 낙원이었기에, 인생에서 도달할 그 무엇도, 바꾸고 뉘우칠 그 무엇도 없었던 것이다. (2권 319-320)





11월 마지막 날 기념 소설 술이깰때까지자시오


케이프코드의 아침



어쩌다 빨간색 옷을 입었을까, 거울을 보며 마거릿은 생각했다. 전화를 받고나서 15분 짬이 있었지만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만큼의 경황은 없었다. 열두어 번 손만 닦기에도 빠듯했다. 은퇴하면서부터 생긴 강박증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지금쯤이면 그들도 거의 도착했으리라. 과연 마당으로 들어오는 자동차 소리가 점점 커졌다. 잔디 손질이 귀찮다며 존이 마당 전체에 자갈을 깔아버린 탓이었다. 요란한 자갈 소리에 마거릿은 욕실 불을 끄고 나와 문을 닫고 서서 7년의 익숙함을 최대한 배제한 시선으로 거실을 둘러봤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군, 변할 건 없을 거야. 마거릿은 이제 거실 저 끄트머리 공간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마당으로 삐죽이 돌출한데다 큰 창이 나 있어 낮이면 집 안에서 가장 환한 곳, 방문객을 제일 먼저 확인하는 장소. 건축 용어로는 뭐라고 정확한 명칭이 있었지만 존과 마거릿은 티 테이블을 놓고 새 이름을 지어 다정하게 부르는 곳. 욕실 문 앞에서부터 발을 떼는 순간 걸음은 저절로 빨라졌다. 예상하지 않았던 바는 아니지만 마당에 서 있는 경찰차를 봤을 때 마거릿은 다리에 힘이 풀려 티 테이블을 짚지 않았더라면 쓰러질 정도였다. 파란 경찰 마크가 선명한 자동차에서는 두 사람이 내렸다. 짧은 목례 후 마거릿은 뒤로 돌아 현관문을 열러 갔다. 현관으로 이어지는 복도 왼편에 있는 부엌을 훑어보면서도 마거릿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생각했다. 내게 꽃을 보내다니 참 고맙기도 하지, 어쨌든 이제 곧 괜찮아질 거야. 완벽해, 거의.


“스타인 부인 되십니까?” 제복을 입은 젊은 여자가 물었다.
“네, 아까 전화를 받고 기다리던 참입니다만. 남편 차가 어떻게 됐다고요?”
“부인, 저는 케이프코드 경찰서 소속 브라운 경감입니다. 이쪽은 그린 경사이고요.” 나이든 남자 경찰이 말했다. 사복 차림이었다.
“오, 저와 통화했던 분이시네요. 제가 마거릿 스타인입니다. 또 음주운전인가요? 피해자가 있나요? 남편은 어디……?”
“저, 실례입니다만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브라운 경감.
“아, 이런. 제가 실례했습니다. 어서들 들어오세요.”


마거릿이 현관문을 닫는 동안 두 경찰은 복도 벽에 걸린 사진들에 눈길을 주었다. 무대 조명을 받고 있는 마거릿과 분장실 거울 속 마거릿, 리허설 중인 마거릿과 존 스타인의 흑백사진이었다. 각 이미지 오른쪽 아래에는 살로메, 메데이아, 페드르 등의 고전극 제목과 날짜 캡션이 달려 있었다. 분장을 감안하더라도 지금 마거릿은 십여 년 전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거실까지 가는 동안 브라운과 그린은 부엌으로도 직업적이고 재빠른 시선을 던질 수 있었다. 식탁 한 가운데 화병에 신선한 꽃이 꽂혀있었다. 대리석과 메탈로 된 현대식 주방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깔끔했다. 복도를 지나 거실 끝에 있는 티 테이블까지 가니 창밖으로 앞이 탁 틔어 이십여 미터 거리의 정문과 더 멀리는 바다까지도 보였다. 자갈밭에는 스타인 부인 것으로 여겨지는 빨간 재규어와, 브라운과 그린이 방금 타고 온 자동차가 놓여 있었다. 차고는 건물 오른쪽에 있는 구조인데 마당으로 들어올 때 본 바로는 문이 닫혀 있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연극연출가의 대단한 차량 컬렉션이 있으리라는 건 짐작 가능했다. 건물 왼쪽의 숲까지 훑어보다가 브라운은 마거릿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배우자를 잃었으면서도 한 명의 피의자가 되어버린 사람을 신문해야하는, 무겁고도 지루한 아침 업무가 브라운을 짓눌렀다.


티 테이블에는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어 마거릿과 브라운이 마주보고 앉았다. 안쪽으로 물러나 있는 응접실 소파세트 간이 의자를 창 쪽으로 돌려 앉은 그린은 마치 관람석에 자리 잡은 관객 같기도 했다. 밝은 빛 속에 앉은 두 사람과 그늘 속의 한 사람. 지금 시작될 드라마는 브라운이 진행하는 형사물이겠지만 전직 배우와 함께 앉아 있는 장면은, 조명과도 같은 햇빛 속에서 펼쳐지는 부조리극 같았다. 그늘 속에서나마 할 역할이 남아 있음을 아는 그린은 어느새 주머니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내어 손에 들고 있었다. 수첩에는 ‘음주운전?’이라고 첫 줄을 채웠다.
“부군께 사고가 났습니다.” 브라운이 운을 뗐다.
“네, 거기까지는 전화로 들었습니다. 누군가 다쳤나요? 존은요?”
“그러니까…… 그게, 부군께서 사망하셨습니다. 즉각적인 죽음이었고, 부군께서는 다른 차를 피하려고 끝까지 노력하셨습니다. 부인께 애도를 표하려고 이렇게 직접 뵙기로 한 거랍니다.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아.”
“놀라셨을 줄 압니다.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정말 유감입니다. 출발 전에 부군께서는 술을 많이 마셨습니까? 정확한 결과는 정밀 조사를 거쳐야 나오겠지만, 한편으로는 브레이크 고장이나 급발진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에스유비 차량은 새것이더군요. 언제 구입하셨는지……. 저런, 물이라도 좀 마시겠습니까?…… 그린!”
튀듯이 일어난 경사에게 마거릿은 못내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쉰 목소리였다. “아니, 아, 네. 그러시면 고맙겠습니다. 부엌은 저기 복도 왼쪽에……”
그린 경사가 부엌으로 향했다. 아까 지나오면서 보았던 완벽한 부엌. 개수대 위 찬장 문을 여니 샴페인 병 옆에 목이 긴 유리잔이 있었다. 급한 대로 수돗물을 받아 돌아서자 식탁 화병 옆에 놓인 카드가 보였다. ‘마거릿에게. 당신의 메데이아를 기억하며, 수전으로부터.’ 그린은 재빨리 거실로 돌아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창백해진 마거릿이 잔을 받으려고 떨리는 손을 들었을 때 위팔 안쪽의 희미한 멍 자국을 본 사람은 그린이었다. 팔을 내리면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고마워요.” 그린과 마거릿의 눈빛이 마주친 짧은 순간이었다. 물은 충분히 시원했고 도움이 됐다. 위로와 이해와 격려 같다고, 마거릿은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얼굴에는 곧 경련이 일어 일그러진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마거릿이 말했다.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부인. 부군께서는 오늘 아침에 떠난 게 맞습니까?” 브라운은 기계적인 신문을 이어갔다.
“주말 보스턴 공연 최종리허설이 오늘부터 있다고 했어요. 며칠, 그러니까 다음 주 월요일까지 일정으로 오늘 이른 아침에 떠났죠. 존은 새로 올리는 공연 최종리허설에 새 차를 갖고 가기 좋아했어요. 이번 차를 사면서는 어찌나 기뻐하던지, 아이처럼 말이죠. 브랜디 병을 차 어딘가에 숨겼으리라 의심했지만 이러리라곤…… 오 맙소사.”
“출발 전에는 술을 얼마나 마셨습니까?”
“이번 공연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제 앞에서 대놓고 마시진 않았지만 술병을 늘 가까이 두고 있다는 건 알았죠. 출발할 때만 해도 취해있진 않았어요. 혹시나 해서 제가 태워다주겠다고 여러 차례 얘기했는데 완강하게 거절하더니 어쩜, 세상에……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분수처럼 솟을 스타인 부인의 눈물이 미리 부담스러웠던 브라운은 잠깐 기다린 다음 곧 이어 말했다. “이런 말씀까지 드리게 되어 죄송스럽습니다만, 부인. 조수석에 동행한 분이 있었습니다. 역시 사망하셨습니다.”
초점 잃은 마거릿의 눈이 목소리 쪽을 더듬거리며 찾았다. 보이지 않는 대본 지문을 정확하게 이행하는 듯했다. 놀라면서 동시에 실망한 어조. “그럴 리가요…….”
“수전 플래밍이라고, 아시는 분입니까?”
“주말 공연의 메데이아 역을 맡은 배우 이름이네요. 그분은 집이 보스턴인데, 여기서 존이랑 같이 이동할 이유가…… 그래요. 어쩌면, 네.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오, 세상에. 존이……. 아, 그래서였군요.” 결국 툭 떨어지는 얼굴을 두 손에 파묻은 채 마거릿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경찰서로, 아니 병원으로 가야할까요, 아무튼 그러기로 하고 지금은 혼자 있고 싶네요. 두 분께 죄송합니다만, 정말 혼자 있고 싶습니다.”
“이해합니다, 부인. 내일쯤 전화로 다시 뵙죠. 트루로 시립병원 영안실로 오셔야할 겁니다.  어디, 연락하실 분은 있습니까?” 얼굴을 여전히 두 손에 파묻은 채 마거릿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끄덕이고 있을 것만 같아 브라운은 어서 자리를 피해주고 싶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브라운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마거릿의 어깨에 잠시 손을 올렸다 내렸다. 불행과 배신을 한꺼번에 짊어진 여인의 어깨가 무시무시하게 떨리고 있었다. 브라운이 그린을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배 형사의 눈빛이 ‘사건종결’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린은 수첩의 첫 줄로 돌아가 물음표 뒤에 느낌표를 덧붙인 다음 수첩을 덮고 일어섰다. 고개를 수차례 끄덕이는 모습이 마거릿과 닮아 있었다.


다시 시끄러운 자갈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점점 작아지며 페이드아웃. 건축 용어로는 뭐라고 정확한 명칭이 있었지만 스타인 부부가 새 이름을 주었던 공간의 티 테이블에 홀로 앉은 마거릿은 그 이름을 속으로 불러보았다. 미니 무대. 존이 아주 가끔 집에 있을 때면 오렌지 빛 조명 아래 책을 읽거나 대사를 손보던 곳. 방문객이 도착하면 우아한 마거릿이 더없이 반갑다는 몸짓으로 등장하던 곳. 밖에서 보자면 영락없이 ‘화목한 가정’이라는 제목의 연극이 오르던 곳. 지금은 얼굴을 두 손에 파묻은 채 마거릿이 비통한 소식을 속으로 삭이는 아내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있는 곳. 존이 봤다면 오케이 신호를 보냈을, 미니 무대. 마거릿의 어깨는 차츰 더 심하게 떨렸다. 마거릿은 수전과 존의 웃음을 생각했다. 공연 전의 긴장감과 은밀한 사랑과 흥분을. 워셔액조차 갈 줄 모르는 존의 번쩍이는 새 랜드로버 보닛 아래, 단순하고도 충실한 V8터보 디젤엔진과, 고압연료펌프에서 엔진오일 쪽으로 조금씩 흘러들었을 경유를, 그리고 존은 끝내 존재조차 알 수 없을 글로브박스 안의 칼바도스 병을 생각했다. 마거릿은 마침내 목소리를 찾은 듯했다. 아직도 디젤 잔향이 환각처럼 남아 있는 두 손 사이 새어나오는 소리는 지난 10분 간 꾹 참은 웃음이었다. 알피엠이 미친 듯이 올라갔겠지, 엔진, 엔진, 엔진. 우리의 위선과 당신의 배신과 나의 복수 같은 엔진. 급가속. 웃음소리가 차차 커지더니 집을 가득 메웠다.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어떤 무대에서도 내어본 적 없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바보들, 내게 필요한 건 뵈브 클리코였어.” 웃느라 겨우 내뱉은 독백이었다. 마침내 얼굴에서 두 손을 풀고 마거릿이 일어나, 모든 게 비로소 완벽해진 거실을 가로질러, 복도를 지나, 부엌으로 갔다. 웃음소리가 내내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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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에 부친 제 소설은 이랬습니다. 공모 수상에서는 똑 떨어졌습니다만, 저는 뿌듯합니다. 단 한 줄도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은 A4 칼 세 장 분량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ㅋㅋㅋㅋ



죽음의 해부 Smoking

죽음의 해부 
로렌스 골드스톤 지음, 임옥희 옮김/레드박스
 

의학 스릴러이자 팩션. 19세기 말 존스홉킨스 병원 창립 시기가 배경이다. 과학적으로나 위생상으로 획기적인 변화가 생기던 때이기도 하고 그 혜택에서 소외된 사람과 보수적인 의식도 많았던 시기. 저명한 의사들 중 코카인을 자기 몸에 실험하다가 중독자가 되어 버린 홀스테드가 가장 눈에 띈다. 그뿐 아니라 표지에 실린 그림을 그린 화가 에이킨스도 몸소 출현한다. 등장인물 중 많은 이가 실재했던 사람이고 시대상도 마찬가지.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에는 허구를 가미했음을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셜록 홈스를 언급하면서 첫 장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주인공 자신 홈스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그래서 추리물이 펼쳐지리라는 암시. 홈스가 코카인을 종종 자가 처방했다는 점에서는 연결이 잘 되기도 한다. 병원과 시체안치실, 해부수업, 밀거래 임신중절, 코카인까지, ‘스릴’에 맞춤한 온갖 재료가 섞였음에도 희한하게 긴장감이 없다. 많은 자료 조사와 연구를 했을 텐데 논픽션으로 썼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이들보다 조금 앞선 시기 해부학자를 다룬 빌 헤이스의 『해부학자』 같은 작품은 소설이 아닌데도 훨씬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밍밍한 와중에 의미는 또 없지 않아서,


그럼에도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걸쳐 일어난 의료계의 논쟁, 해부를 둘러싼 종교계와 의학계의 갈등, 생명윤리를 둘러싼 혼외임신과 임신중절의 문제, 나아가 미술계의 누드 논쟁, 지하세계의 마약거래 등 당대의 보수적이고 부패한 상류사회와 의료산업이 어떻게 뒤섞여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542, 옮긴이의 말)


원제 『The Anatomy of Deception』을, 역자는 ‘사기의 해부’라고 옮겼던데 deception, 프랑스어로는 ‘실망’이나 ‘환멸’이 먼저 떠오르는 단어다. 그토록 존경하여 아버지 삼고자 했던 이에 대한 환멸이나 상류층의 위선에 대한 실망으로 보자면 마침맞은 제목 같기도 하다. 앞날개 작가 소개, ‘독서광이자 고서 컬렉터인 로렌스 골드스톤은 부인과 함께 톨스토이의 『사랑과 전쟁』초판본과 디킨스의 책을 구하기 위해 고서점을 뒤지면서 일어난 좌충우돌 모험담을 책으로 펴내 단번에 스타 작가로 떠올랐다.’ 그 모험담 궁금하다.



우주의 끝을 찾아서 NoSmoking

우주의 끝을 찾아서 - 10점
이강환 지음/현암사


팽창하는 활자, 표지가 왜 이런가했는데 가속 팽창하는 우주 이야기여서다. 유치한 디자인도 자꾸 보다보니 뭔가 귀엽고 어울리고 스타워즈 같고 나름 정도 든다. 우주라는 넓고 오래된 관측대상을 두고 무슨 얘기를 할 건가. 이것도 조금 저것도 조금 건드리다 보면 자칫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 <우주의 끝을 찾아서>는 우주 가속 팽창‘만’ 다룬다. 전문적이면서 대중적일 수도 있는 거였어. 수학공식이나 물리법칙이 전혀 나오지 않을 순 없겠으나 사람들 얘기, 그러니까 과학자들 얘기가 주를 이루어 그런가 보다. 군더더기 없이 참 잘 쓰였다.


우주가 팽창한다고? 몰랐다면 더 반가웠겠다. 201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천문학자 애덤 리스(1969년 12월생)도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그 사실을 알았다니(47) 어째, 위안이 될는지? 우주가 팽창하고 있음은 1920년대에 밝혀졌고, 빅뱅 이론은 1940년대, 우주배경복사는 1960년대, 인플레이션은 1970년대 말에 차차 등장하면서 서로서로 탄탄하게 맞물려 이론으로 정립된다. 2011년 노벨 물리학상은 우주가 그저 팽창하지 않고 ‘가속’ 팽창함을 밝힌 공로에 주어진 거였다.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 빠른 속도로 멀어진다는 얘기.


애덤 리스 1998년 1월 12일 오후 6:36
“우리의 결과는 놀랍고 심지어는 충격적입니다. 저는 좀 더 확인을 해보고 싶어서 그동안 아무에게도 결과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른 팀이) 먼저 하기 전에 결과를 논문으로 썼으면 합니다…… 자료는 우주 상수가 0이 아니라고 해야 설명이 됩니다! 이 결과를 마음이나 머리가 아닌 눈으로 접근합시다. 결국 우리는 관측자니까요!” (238)


우리가 아는 중력은 어쩌지. 우리가 땅에 발붙이게 하는 힘. 서로 당기는 힘. 예전엔 이로 말미암아 우주 은하들이 한 점으로 뭉치게 되리라 여겼던 힘. 천재 아인슈타인이 우주 상수로 상쇄했던 힘. 천재는 과연 천재여서 우주 상수가 지금은 암흑에너지로 일컬어지게 됐다. 진공에서 나오는 보이지 않는 힘. 밀어내는 힘. 우주를 가속 팽창시키는 힘…… 그런데 이 모든 게, 그러니까 우주가 팽창하든 수축하든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데 무슨 소용일까?


재미있잖아. 경이롭잖아. 숱한 옛날 천재들이 생각했던 정상 상태 우주가 아닌 가속 팽창하는 우주를 알고 사는 거. 뉴턴이나 아인슈타인보다 오로지 후세라는 이유로 더 똑똑해지는 기회, 신기하잖아. 어쩌다가 지구에 지적생명체로 태어나 우리가 떠 있는 공간을 읽어보니 더 경외로운 우주다. 호건이 1978년에 발표한 <별의 계승자 2>에서 가니메데인은 빅뱅을 우주 기원 이론으로 보고 있지 않던데. “인간이 빅뱅 모형의 무시무시한 팽창을 상상했을 때, 인간은 우주를 본 게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본 것이었죠.”(<별의 계승자 2>, 282-283) 그래, 어쩌면 우리 자신을 보기 위해서라도 읽어볼 만한 <우주의 끝을 찾아서>다.


+옥에서 티 봤다. 128쪽. (박사님 일부러 이러신 거 아니죠?)



별의 계승자 2 : 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 Smoking

별의 계승자 2 : 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 - 8점
제임스 P. 호건 지음, 최세진 옮김/아작


가니메데인은 전쟁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전쟁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조차 없었다. 헌트는 바위 밑에서 지저분한 삶을 살다가 그 바위가 막 뒤집힌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124)


더 높은 지적 수준을 가진 외계인을 만났을 때 호모 사피엔스로서 어째 저런 느낌이 들지 않겠나. 더구나 5만 년 동안의 진화와 역사를 ‘검사받는’ 입장이라면. 인류가 지능의 대가로 획득한 폭력성으로 말미암아 빚게 된 야만적인 역사가 부끄럽기도 하면서 가니메데인들이 예상한 대로라면 자멸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음이 뿌듯하기도 하다. 인류의 폭력이 점차 줄어간다는 사실은 가니메데의 거인뿐 아니라 스티븐 핑커 같은 지구의 거인들도 내다보는 바다. 경쟁심과 폭력성으로 인해 공동체는커녕 과학적 진보를 이루기도 힘들 존재로 여겨졌던 인류가 가니메데 거인들로부터 존재인정 받은 느낌까지 든다. 든든한 어른-가니메데인을 대하는 어린이-인류 같은 구도랄까. 진보 또는 진화의 궁극이 평화, 협력, 소통이라는 점을 호건도 강조하는 듯하다.


1권에서 찰리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감동스러웠다면 2권에서는 외계인과의 협력이 따뜻하다. 인류의 기원, 돌연변이의 비밀이 등장한다. 물론 설명충 과학자들 간 토론도 여전하다. 이번에는 가니메데인들까지 합세하니 스케일이 더 크다. 특히 가니메데 인공지능 조락은, <네 인생의 이야기>의 수고로움을 가뿐히 뛰어넘게 한다. 아고 편리해라. 인류를 객관화하여 돌아보게 하는 ‘외신’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유유히 자기 갈 길을 가는 가니메데인들의 뒷모습에서 큰이모삼촌 같은 아우라를 본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 덩치 큰 이모삼촌들이 우리를 외롭게 하지 않으려고 남긴 듯한 한 마디가 있다. ‘3권 계속.’

 

응. 또 만나요.


또 다시 가니메데인들은 그런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들은 개인에게는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본능이 있고, 삶에서 핵심적인 욕구 중 하나가 바로 그 본능을 충족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필요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감정을 왜 스스로 일부러 박탈하려 하겠는가? 그런 욕구가 금전적인 보상의 자리를 대신해서 가니메데인에게 동기를 준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필요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190)



컵의 계승자 : 아작의 친절한 찰리컵



라마와의 랑데부 Smoking

라마와의 랑데부 - 8점
아서 C. 클라크 지음, 박상준 옮김/아작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 라는 책으로 링크할 뻔했다. 대화 아니고 도킹, 만남이다. 라마가 뭐기에 랑데부하나. 태양계 쪽으로 쏜살같이(시속 10만 킬로미터 속도를 ‘쏜살’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날아오는 소행성. 혜성이랄 수도 있겠는데 알고 보니 원통형 인공구조물이다. 길이가 무려 50킬로미터에 달하는 일종의 우주선. 거대한 내부 구조가 황홀하다. 계단, 바다, 절벽, 도시 풍경하며 ‘바이올로지컬 로봇’(바이옷)까지도 멋져. 영화화한다면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할 듯하다. 각자 머릿속에 그린 원통(일명 보일러 통) 내부가 아련한 만큼 아름다울 것이기에.


하나의 세계에 대한 기상학이란 설사 안정된 상태라 하더라도 엄청나게 복잡한 변수들이 얽혀 있기 마련이다. 수세기에 걸쳐 축적된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 지구의 기상 상태를 완벽히 예측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라마 역시 단순히 신기한 존재가 아니라 급속한 대기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하나의 세계인 것이다. (135-136)


클라크의 ‘오래된 미래’ 2130년에도 그렇단다. 기상예보 틀린다고 욕하지 말자. 하물며 지진은. 자연재해를 ‘하늘의 경고’라고 얘기하는 무식함이 재해이더라. 1973년에 쓰였고 아서 클라크 탄생 백주년 2017년에 읽는다. 하늘에 외계문명 부산물 하나 띄워준 게 왜 이렇게 고맙지. 파괴를 막아준 것도, 노턴 선장이 무사히 돌아간 것도. 후속편 라마 모두 다시 나올지는 의문이지만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임팩트가 없어지는 시리즈 경험상(그래, <스페이스 오디세이> 말이다) 이쯤에서 헤어지기로 한다. 노턴 선장처럼.


노턴 선장이 마지막으로 라마를 보았을 때 라마는 금성 너머로 조그맣게 빛나는 반점이었다. 그는 자기 삶의 일부가 끝났음을 알고 있었다. 아직 55세에 불과했지만, 그는 자신의 청춘을 라마의 평원에 두고 떠나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 모든 신비와 경이가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머나먼 우주로 무정하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앞으로 인간이 어떤 업적과 영광을 달성한다 해도 노턴 선장의 남은 인생을 흥분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372-373)




정선생과의 랑데부. 거한 생일술판을 벌였다. 꽐라 다크 사이드로 넘어가서 사진 찍으면 이렇게 된다. 다 뱃속으로 사라진 폐허...



아쿠아리움 Smoking

아쿠아리움 - 10점
데이비드 밴 지음, 조연주 옮김/arte(아르테)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는 이미 굳어가고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엄마가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를 쳐다보던 그 역겨운 표정을 나는 보았고, 그때 뭔가 동물적으로, 즉각적으로 생겨난 반응이었다. 엄마가 나를 때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뭔가가 달라졌다. 어떤 스위치가 영원히 꺼진 것이다. 신뢰나 안전, 혹은 사랑 같은 것은 끝이 났다. 그 스위치를 우린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까? (341)


번역 출간된 데이비드 밴 세 권 중 읽지 않고 아껴두었던 마지막 작품. Axt 가을호 표지인물이 반가운 데이비드 밴이어서 마지막 곶감 빼먹었다. 역시 세다. 사랑과 폭력의 희한한 하모니가 어디 가지 않았구나. 이번엔 어린 딸과 엄마와 할아버지다. 엄마의 분노도 이해가 가고 할아버지의 뉘우침도 절절하며 (기대하지 않았던, 그러니까 일종의 스포.) 화해, 용서까지 담겼다.


아이, 아니 나아가 사람의 성장은,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거나 미워)하다가 어느 순간 그들의 미성숙함을 깨달을 때 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들도 (나처럼) 불완전하고 감정에 휩쓸리며 늘 옳은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시기 말이다.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엄마가 너무 무서웠다가도 끝내는 연민하게 된다. 약간은 더 따뜻해진 데이비드 밴 같기도 한데, 이 말 믿고 보는 사람 없겠지만, ‘센’ 건 밴의 디폴트 옵션이라는 점. 그래서 가끔 만나야 하는 밴…… 이제 곶감 없어서 아쉬운 마음은 일단 Axt로 달래야겠다.


널 가진 후에 모든 게 다 변했어. 몸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다 내가 자초한 일이지만. 평소엔 안 나던 냄새가 났고, 피부는 건조해졌어. 머리카락도 그렇고. 전에 잘 먹던 음식들을 먹을 수가 없었지. 처음으로 알레르기가 생기기도 했어. 너는 내 안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어. 그건 일종의 침략이었어. 암이 시작됐을 때랑 똑같아. 내가 죽어가고 있는 건 다 너 때문이야. (204)


일종의 침략, 암처럼. 지난 가을에 만난 보란스카야 뱃속에는 2센티미터짜리 태아가 들어 있었다. 입덧과 예민함과 무기력함으로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보았다.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암처럼 점령해 기생하고 군림하다가 세상에 나온 당신, 숙주가 당신을 증오하지 않고 어쩌다가 사랑한다면 얼마나 한 행운인지. 당신이 나오기 전부터 그들이,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게 겸손함이자 예의이자 삶의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휴, 데이비드 밴은 정말 쩌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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